171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9) >
용사가 천천히 걸어온다. 벨을 죽이기 위해서.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지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김유성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만일 지수가 조금이라도 반항할 기색을 보인다면, 김유성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망설임 없이 벨의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라앉은 김유성의 눈동자는 우수에 젖어있었다. 한때 같이 싸웠던 이들에게 검을 겨누게 될지는 몰랐다는 듯이. 그 표정을 보고 지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증스러웠다. 뭘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 자기 자신의 의사로 벨을 죽이려 하고 있는 주제에.
“순순히 체념해라.”
불합리했다. 자긴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아직 체념하지 못한 주제에 이쪽에만 체념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에 엿이나 먹으라고 반박할 만한 힘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김유성은 뚜벅뚜벅 걸음을 멈추는 일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유성이 자신의 앞까지 다다르는 순간 벨은 죽는다.
맞서려는 생각을 내비치는 순간 죽는다. 도망치는 순간 따라잡혀 죽는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호랑이 수준일 때의 이야기였다. 벨을 구해달라고 말하기 위해 이 심연 안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지수에게는 어떠한 선택지도 허락되어있지 않았다.
“멈춰…!”
“멈추지 않아. 어느 때건, 어느 장소건. 그게 용사야.”
알고 있었다.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만큼 똑바로 된 위인이었으면 이 사달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김유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대화로 해결해라.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마라. 그런 당연한 호소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지수는 그 사실이 끔찍하리만치 싫었다.
끔찍하리만치 싫어했다는 사실을, 지금에 와서야 알았다.
원래 세상이란 게 이런 거지 하고 혼자서 젠체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불합리함을 느끼고 있었다. 멈추라는 말은 다가오고 있는 김유성에게만 한 말이 아니었다. 벨의 몸을 침식하고 있는 변이체도, 세상을 먹어치우려고 하고 있는 여왕도. 안식과 상식을 허락하지 않는 이 빌어먹을 세상의 구조 전부.
“멈추라고 말하잖아…!”
고함과 함께, 지수의 몸에서 이질적인 마력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써걱! 폭풍 같은 검격이 그와 동시에 내리쳐졌다. 마력의 격류는 주변을 장악할 새도 없이 김유성의 검에 양단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김유성의 표정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방해물이 아니라 강적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다다랐나.”
김유성이 벨을 업고 있는 지수를 노려보았다. 방금 터져 나온 마력을 베어냈을 때 손끝에서 느껴진 감각. 지수가 발한 기운은 분명히 초월자의 영역에 달해있었다. 육영웅은 수십 년을 전장에서 싸워왔고, 마녀에겐 대대로 그 이상의 경험과 지식이 계승된다. 하지만 지수는 사역마로 거둬져 걸음마를 뗀 지도 얼마 안 된 애송이. 그런 애송이가 육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해 싸우고, 심지어는 초월자의 영역에 까지 입문했다.
요컨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
“백마녀의 사역마가 아니라도, 너는 죽일 수밖에 없겠군.”
그 말에 뒤에 있던 백묵과 허다인의 표정이 변했다. 이야기가 다르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김유성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의 의견에 맹목적으로 찬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벨을 희생시키겠다는 계획도, 다른 선택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긍한 것뿐이었다. 뭐가 어쨌든 벨과 지수는 자신들과 함께 싸웠던 동료다. 가장 힘들 때 도와주러 왔었고, 함께 먹고 자며 정 또한 많이 들었다.
“백마녀가 죽으면 사역마도 자연스레 소멸한다. 이건 확인이 끝난 문제야. 굳이 네가 그 녀석을 벨 필요는 없을 텐데.”
뒤에 있던 백묵이 소극적으로 김유성을 제지했다. 하지만 김유성은 코웃음을 쳤다. 육영웅이라는 녀석이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김유성이 검을 치켜들었다.
“내 눈에는 보여. 저 녀석의 성장세는 도를 넘었어. 단언하지. 일 년만 더 일찍 백마녀에게 거둬졌으면 저 녀석은 너희 둘보다 아득하게 강해져 있었을 거다. 어쩌면 나보다도. 이미 초월자의 영역에 진입하기 시작했어. 누가 떠도는 영체랑 재계약할지도 모르고, 사념만 남아서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김유성, 너 설마….”
그리고 김유성의 칼날에 금빛의 검기가 담겼다.
“그래. 내 검으로 영혼째로 베어낼 거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역시 그 말에는 백묵도 허다인도 반발했다. ‘어쩌면 위협이 될지도 모르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선택하기엔 너무 도를 넘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김유성은 진심인 듯했다. 허다인은 앞에 나서 중재하려 했지만,
"윽!"
나비로 흩어진 순간 곧장 원래대로 돌아오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백묵과 허다인을 구속한 것은 루갈반다였다. 루갈반다의 입장에서 김유성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까마득한 세월 속에서 겨우겨우 잡아낸 반격의 가능성이다. 저것은 척 봐도 위험하다. 배제할 수 있는 변수는 배제해야만 했다.
“유성, 이거 풀어줘!”
“이봐. 동료인 우리도 믿지 못하는 거냐!”
백묵이 루갈반다가 만들어낸 보호막을 쾅쾅 두드렸다. 김유성은 고개를 돌아보지도 않고 조용히 콧숨을 내쉬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그게 지금 너희들 일이니까.”
검을 든 김유성이 신중히 거리를 가늠하며 지수를 노려보았다. 곧장 뛰쳐나가 공격에 나서지 않은 건 지수가 뿜어낸 불가해한 마력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심스레 대치할 것도 없이, 루갈반다에게 방어를 맡기면 쉽게 끝날 일이었는데. 잔소리하는 동료들에게 발목을 잡힌 꼴이었다.
“하하.”
그리고 너털스러운 웃음이 심연의 한가운데 울려 퍼졌다.
“뭐 도와줄 일 없을까 싶어 왔더니 참 가관이네요.”
마주 선 지수와 김유성 사이에 나선 것은, 검은 갑주를 입고 있는 검사였다. 당연히 김유성이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흑기사 우진. 함께 대전쟁을 헤쳐나온 전우가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유성은 팍 눈썹을 찌푸렸다.
“우진. 방해하려는 거냐?”
“...농담도 참. 방해 같은 거 안 해요.”
특유의 꾸며낸 듯한 웃음을 지은 우진은, 순식간에 온몸의 기운을 갈무리한 뒤 칼자루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찌릿찌릿한 살기가 우진의 온몸에서 터져 나왔다. 간격 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게 누구든지 베어버릴 거라는 필살의 태세.
“방해가 아니라, 아예 박살을 낼 생각인데요.”
“미친놈.”
김유성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생각이란 걸 해보지 그래. 네 능력은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못 끼쳐.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우진이 흑기사로서 가진 능력, 적막. 그 힘의 정체는 전개하는 순간 범위 내 모든 마법의 발동을 근원째로 틀어막는 것.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웃기지 말라고 항의하고 싶을 법한 반칙성 능력이지만, 마법하고는 요만큼도 관련이 없는 김유성에게 있어선 웃기고 있네 하고 코웃음 칠 잡기일 뿐이다.
“누가 그러나요. 제 능력이 당신한테 안 통한다고.”
“내 능력은 적막이 아니라 단련한 검술이다, 뭐 이런 말이라도 하려고? 그따위 말장난으로 상황이 바뀔 것 같냐.”
김유성이 뺨을 실룩였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자세를 잡은 우진의 간격 안에 들어가는 것은 성가셨다. 애초에 지금은 우진과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김유성이 눈을 까닥였다. 심검. 멀찍이서 찌릿하고 노려본 것만으로, 허공에 발현한 참격들은 무형의 폭풍이 되어 우진의 몸을 찢어발겼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유성이 입을 벌렸다.
“뭐?”
“뭐가 뭐? 입니까, 멍청하게. 제가 무슨 동료한테 필살기고 뭐고 다 까발리는 의리 있는 인간으로 보였습니까.”
지금의 우진은 초월자였다. 각성자로서의 격이 올라가면 당연하게도 기술은 진화한다. 주변을 채우고 있는 적막의 역장은 이미 마법만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발동시키는 종류의 모든 능력이, 적막의 봉인 대상이었다.
김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을 이리저리 휘저어본다. 발동하지 않는 형태의, 축복 종류의 능력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심검처럼 스스로 발동시켜야 하는 종류의 능력은 완전히 틀어막혔다.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각성자에 대한 천적 능력. 그것이 우진이 도달한 적막의 종착점이었다.
“계급장 떼고 한번 붙어보죠. 어느 쪽이 위인지.”
“이봐!”
벨을 업고 있는 지수가 소리쳤다. 하지만 우진은 자세를 풀지 않고 등을 보인 채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감사의 말은 됐습니다. 유라가 먹은 과잣값이라 치죠.”
지금 김유성이 하는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어도 오랫동안 함께 싸워왔던 동료로서, 한 대 패줘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사소한 은혜 갚기는 덤으로 해줄 뿐이다. 상황을 살핀 우진이 발도 자세 그대로 말을 전했다.
“뭐, 어차피 얼마 안 남은 목숨입니다. 오히려 잘됐네요. 저도 죽기 전에 저 사람이랑 제대로 겨뤄보고 싶었으니까.”
“뭐?”
“처음 쉘터에서 그 괴물이랑 대치했을 때. 가까이만 가도 독에 당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땐 그냥 찌릿한 수준이었으니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가관이 되더군요.”
우진은 담담히 충격적인 사실을 말했다. 그 또한 여왕에게 당했다. 실제로 이미 갑주 안의 피부는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그가 딸을 지켜주는 걸 포기하고 도박을 하러 나선 이유는, 더 이상 딸을 지켜줄 수 없을 거라 알았기 때문이다.
“백마녀씨를 데리고 위로 올라가세요.”
목소리는 냉정했다. 우진은 김유성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 망치인지 뭔지 하는 핵폭탄 스위치를 먼저 손에 넣는다면, 저쪽도 섣불리 백마녀씨를 건드리지 못하겠죠.”
우진의 판단은 지수가 분석한 것과 같았다. 그것이 유일한 활로였다. 지금은 저 용도 육영웅 두 명을 묶어두는 데에 힘을 쏟느라 이쪽을 견제하지 못한다. 우진이 김유성을 묶고 시간을 버는 동안, 계단을 올라 이 심연의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수는 답지 않게도 곧장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너, 그런 몸으로는 도저히….”
“괜찮습니다. 싸우는 도중엔 아픈 걸 못 느끼는 체질이라. 나중에 제 시체라도 유라한테 갖다주세요. 예전 동료였던 인간한테 억울하게 뒤통수를 맞고 죽었다는 말이랑 같이.”
“무슨 소리지? 내가 언제 네 뒤통수를 쳤어.”
김유성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우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연약한 애거든요. 그런 동기라도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제멋대로인 생각이지만, 아무리 지옥 같은 세계라도. 복수심에 괴로워하면서도… 유라는 살아주길 바라요.”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였다면 부모고 뭐고 그런 거짓말을 해도 될 권리는 없다고, 그런 어이없는 부탁에 협력해줄 리가 있겠냐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도저히 거절의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침묵한 지수를 향해 우진이 빙긋 웃었다. 꾸며 내지 않은 진짜 웃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쉘터니 뭐니, 열심히 유라가 있을 곳을 만들어주려 했지만… 제 곁에 두겠다는 것부터 잘못된 거였어요. 저는 결국 피 냄새나 풍기며 싸움만 몰고 다니는 인간이니까.”
우진은 조용히 고백했다. 자신의 행적은 딸을 위해준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이 있고 싶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다고. 지수는 표정을 팍 찡그렸다.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주저리주저리….
마치 유언 같지 않은가.
천천히, 칼집에서 장도를 빼낸 우진이 읊조렸다.
“동화 속 나라 같은 곳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저 같은 인간도 싸우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누구든 자기 삶에서 도망쳐서 편안히 살다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내가 만들어볼게. 여기서 나가게 되면….”
“그거 멋지네요. 하지만 역시 제가 죽을 장소는.”
전장이 어울려요. 그렇게 말하고 뛰쳐나간 우진이 기다란 검을 휘둘렀다. 동작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야 당연했다. 몇백 번, 몇천 번. 머릿속에서 되풀이한 공방이었다. 언젠가는 김유성을 검으로 꺾고 싶다는 욕심만을 갖고.
“가세요!”
우진에게 밀려난 김유성의 검이 땅바닥에 내리찍혔다. 움직임을 묶었다. 지수는 헐레벌떡 달려나갔다. 적막 안에서는 지수의 마법도 쓸 수 없기에 정직하게 두 다리로 달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어져 있었다.
달려나가며, 지수는 한심하게 울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자신 때문이었다. 눈치챘어야 했다. 김유성이 벨을 불러낼 때부터 위화감은 느끼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의심해야 했다. 벨이 죽을 위기에 처한 건 사역마의 능력 부족 때문이다. 상황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 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지스….”
“괜찮아. 절대 죽게 안 둬.”
벨을 업은 채 달려나가는 지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도중에 가로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상황상 자신이 죽는 게 맞다느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내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롱한 표정의 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내 이름….”
“뭐?”
“내 이름, 알려주고 싶어서….”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벨의 풀 네임을 아직껏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벨은 벨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이제 와서 이름을 가르쳐주겠다느니, 이제 곧 죽을 사람이 미련을 지우려 하는 것처럼. 그건 마치 아까의 우진 같지 않은가.
지수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나가서 듣겠어.”
“아니, 여기서….”
“나가서 듣겠다고 했잖아!”
지수가 고함을 치는 것과 함께, 쾅 하고 커다란 계단 한쪽이 무너졌다. 발현한 것은 거대한 참격이었다. 보이지 않는 검. 용사의 심검이다. 저건 분명히 발동할 수 없을 텐데. 눈치채고 보면, 심연 안을 감싸고 있던 적막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지수가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가 계단을 굴렀다.
“너도 그 녀석도, 하나도 이해를 못 하고 있어. 자기가 동료한테 필살기고 뭐고 다 까발리는 바보인 줄 알았냐고? 그럼 왜 내가 힘을 숨기고 있는 거란 생각은 못 한 거냐.”
계단을 구른 그것이 지수의 눈동자에 강렬히 박혔다. 아래에서 부웅 던져진 것은 우진의 목이었다. 김유성이 뚜벅뚜벅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경악스러운 것은 우진의 죽음보다도 승부가 나는 데에 걸린 시간이었다. 명백하게 이상하다. 달리고서 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다. 김유성이 따라붙은 시간까지 포함하면, 싸움은 시작되자마자 끝난 것에 가까웠다.
“사역마 넌 상황을 분석하는 게 특기 아니었나? 생각을 해봐라. 조금이라도 도와줘야겠다 생각했으면 루갈반다가 저러고 있을 리 없지. 무슨 이변이 일어나든 나 혼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니까 가만히 둘을 묶어두고 있던 거다.”
그 말대로였다. 김유성은 힘을 숨기고 있었다. 숨기고 있었다기보단, 적에게 적당히 고전할 만큼만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동료는 죽지 않게. 자신이 뭐든지 뚝딱 해결해버리면 다른 이들을 성장시킬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조차 이제는 필요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김유성은 이미 각성자라는 범주에도 포함되지 못할 수준의 괴물이었다. 분석할 필요도 없이 지수에게는 승산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지수가 털썩 무릎 꿇었고, 업혀있던 벨이 바닥에 쓰러졌다.
“너희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보이지 않는 거냐? 내가 어디까지 강해졌는지, 이만큼 강해지고도 답이 안 나오는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리고 벨이 바닥을 기어,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김유성이 작게 콧숨을 쉬었다.
“네 주인님은 아는 모양이다. 뭐가 올바른 행동인지.”
“응. 어떻게 생각해도… 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
그 말에 지수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지수 또한 마음 한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하지만 벨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심장에 거대한 닻이 매인 듯한 절망이 느껴졌다. 그리고 힘겹게 일어난 벨은, 김유성에게 등을 돌려 무릎 꿇은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마무리를 짓는 건 너야. 네가 아니면 안 돼.”
“뭐…”
벨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발현한 것은 하나의 새하얀 단도였다.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게끔 쥔 벨은 한쪽 손을 뻗어 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들겠지만 일어나보라고 격려하는 듯이. 벨이 지수에게 말했다.
”지스 네 손으로, 내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어줘.“
심장은 여기니까 똑바로 찌르면 된다고.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주인의 말에, 지수는 그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