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8) >
여왕의 진격은 이미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잠깐이라도 여왕의 움직임을 막아낼 수 있는 요소가 존재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용사 김유성의 손에 제거당했다. 체스가 끝나 땅따먹기 게임이 시작되었고, 벌써 세상은 반절 가까이 여왕의 영토로 변해버렸다.
원래 반쯤 몰락해있던 인류에게는 저항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쉘터에 틀어박히거나 은신처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가능한 것은 아직 남아있는 멀쩡한 땅으로 끊임없이 도망친다, 단지 그것뿐. 그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하지만 변이당한 사람들보다는 나은 최후였다.
결국에는 시간 벌기일 뿐, 언젠가는 상황이 나아질 거란 희망 따위 없었다. 여왕의 손길이 세계 구석구석까지 뒤덮이는 순간 그걸로 끝. 평등한 멸망이었다. 지수는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이전의 세상에 불평하고 있던 것이 끔찍한 사치였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는 천국이었다.
살아남아 도망치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일도 슬슬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할 만큼 지옥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챙겨주는 게 그리 번거롭지 않을 만큼 숫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벨이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도 없어졌다. 이야기 속으로 도피할 수조차 없는 절망이 등 뒤에 서있었다. 이미 쉘터에 거주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열 명이 채 안 되는 숫자로 줄어들어있었다. 그들의 상태 또한 좋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반쯤 미쳐서 광신도 집단 비슷한 것이 되어있었다.
“참고 견딥시다. 기다리고 있으면 용사님이 저 간악한 괴물을 베어 세상을 구해주실 겁니다. 대전쟁 때에 그랬듯이!”
원을 그리며 둘러앉은 사람들은 흐느끼며 기도했다. 발단은 한 노인의 증언이었다. 그는 대전쟁 초기, 김유성이 여왕과 똑같이 생긴 괴물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김유성은 여왕 강림 이후에도 거대한 용과 함께 겁도 없이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여왕으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는 이들에게 변이된 지역을 당당히 돌아다니며 괴물을 물리치는 김유성은 희망 그 자체였다. 용사 신앙. 그렇게 이 멸망한 세계에서 하나의 종교가 생겨났다.
지수가 신기해한 것은 바로 그 용이었다. 등에 김유성을 태우고 날아다니는 꼴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김유성에게 보호막을 쳐 촉수를 막아주는 게 그 용이었다. 분석한 결과 아마도 용왕 혹은 그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일 것이다.
‘그런 몬스터가 수호해주면 쉘터도 제 기능을 했을 텐데.’
하긴 아무리 강대한 용이라한들 쉘터 만한 크기에 보호막을 계속해서 쳐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잠깐이라도 풀었다간 변이체가 안쪽으로 들어와버릴 테니까. 앉아서 생각하던 지수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러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쉘터 안에 살고 있을 땐 바깥에서 싸우는 김유성을 멍청하다 경멸하던 그들이, 지금은 김유성을 희망의 상징으로 삼아 매달리고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삶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달라진 것은 벨에 대한 취급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마녀라고 뒤에 숨어서 돌을 던지던 이들이, 지금은 벨의 말 한 마디에 껌뻑 죽는 추종자가 되어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붉은 촉수에 닿아 변이당할 뻔한 생존자 아이를 벨이 되돌려준 것이었다. 그런 것까지 치료할 수 있다니 참 재주도 많다 싶었다. 둘러앉은 채 김유성을 찬양하고 있는 집회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인간들이 진상을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상황이 이렇게 된 결정타를 날린 게 바로 그 대단한 용사님인데. 확 돌변해서 지옥에 나가라고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르겠어.”
"......."
아무 대꾸 없는 벨의 반응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평소 같으면 ‘그 사람도 그냥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너무 탓하지 마~’ 뭐 이런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뻘쭘하잖아.”
벨을 돌아본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벨은 정말 그렇다는 듯 힘겨운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걸 본 지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벨의 얼굴 구석에 식은땀이 잔뜩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건가. 안색이 좋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거의 실신 직전의 상태였다.
"벨!"
지수가 급히 벨에게 달려가 몸상태를 살펴보았다. 벨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몸 속 힘의 흐름까지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런 상태론 제대로 된 마법 하나 발동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벨은 지수를 앞에 내세운 채로 싸우게 만들었다.
‘자기 몸상태를 숨기기 위해서 그런 거였나?’
지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혼자 싸우게 한 것인 줄 알았는데. 지수는 자책감에 휩싸였다. 벨의 상태는 정말로 심각했다. 명색이 사역마라면 조금 더 빨리 눈치채야만 했다. 자신은 상황을 기계적으로 분석할 뿐 이해하지 못했다.
증상의 원인은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벨의 가슴팍에서 그녀의 생살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아니다. 부패하는 게 아니라 끓어오르며 변이하고 있다. 지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왕의 침식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벨은 그 빌어먹을 촉수 괴물들에 접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지수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전에 변이체에 접촉해버린 사람을 벨의 손으로 되돌려준 것. 그것은 다른 사람의 변이를 치료해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게 가능했다면, 여왕이 강림한 날 쉘터에서 도망쳐올 필요도 없었다.
여왕이 가진 침식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어떤 방법으로도 후퇴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잠깐 멈추는 게 고작. 벨은 감염체를 자신의 몸으로 옮긴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어느 정도 침식에 저항할 수가 있으니까.
미친 짓거리였다. 지수가 아연해하며 벨에게 물었다.
“너 진짜 멍청이야?”
떨리는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분노가 깃들어있었다. 벨이 자신과 달리 배배 꼬이지 않고 좋은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지수를 억지로 살려놓고 자기 사역마로 재활시킬 만큼, 남에게 참견하길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취미로 사람을 돕겠다는데 그 걸로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분석하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변이체를 받아들인 벨의 환부는, 조금씩이지만 맥동하며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지금은 온 힘을 다해 억눌러놓고 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이대로 변이가 계속 진행된다면.
지수는 눈을 질끈 감고 사고를 멈추었다. 상상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지만 치료할 수 있는 방법 따위 모른다. 의사에게 데려간다고 나을 수 있는 종류의 증상도 아니다.
“역시 화내는구나… 하긴 그것도 당연한가. 주인인 내가 잘못되면 사역마인 지스도 큰일일 테니까. 그래도 걱정하지 마. 다른 마녀를 찾아서 다시 계약할 때까진 버텨볼 테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드물게 화내는 지수의 모습에, 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몽롱한 눈으로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지수는 혀를 차고서 바깥으로 성큼성큼 나왔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은 걸 확인한 뒤, 지수가 가슴팍에서 꺼낸 것은 허다인이 줬던 방울이었다. 유사시에 연락책으로 쓸 수 있을 거라고 건네주었던 물건.
톡 까놓고 말하자면 연락은 왔다. 고의로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무슨 용무로 전언을 보낸 것이라 한들 어차피 헛수고일 테니까. 여왕을 눈앞에서 포착하고, 누구보다 강력한 분석 능력을 지닌 지수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쓰러뜨릴 수 있고 없고를 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영역이 다르다.
‘그러니까 다 포기하고 도망이나 다닐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벨이 저런 상태가 되어버렸으니 김유성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김유성과 같이 다니는 그 새하얀 용이다. 루갈반다라고 했었나. 그 신비한 용에게, 어떻게든 협박을 해서라도 벨의 변이를 막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김유성을 여왕의 영역에서 보호해준 당사자니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지수가 씁쓸한 얼굴로 입안을 깨물었다. 방울에 마력을 불어넣고 딸랑딸랑 흔들자, 파장이 공명하며 음성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김유성의 것이었다.
<사역마. 길게 말할 시간 없으니 잘 들어.>
음성은 감정 없이 용무만을 딱딱 전달하고 있었다.
<이곳은 마지막 심연이다. 전에는 왕들의 묘소가 마지막 심연이라고 했었는데… 사실 아니었던 모양이야. 판도라의 상자 맨 아래에 있는 건 희망이었다. 여왕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어.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야. 너희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연락을 받는 즉시 최대한 빨리 찾아와라.>
김유성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의도적으로 억양이나 어조를 감춘 듯한 기색이었다. 분석하려고 해도 뭘 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런 세상에서 감정이 폴짝폴짝 뛰노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지수는 굳이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반드시 백마녀를 함께 데리고 와.>
김유성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한 이야기였다. 지수는 벨의 사역마이기에, 벨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질 수가 없다. 김유성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왜 굳이 벨을 데려오라 강조를 하는 것인가. 사역마인 너 따위는 쓸모없는 덤이니 주인이나 제대로 모셔오라는 건가.
“아무튼 갈 수 밖에 없어.”
지수 혼자 벨을 업고서라도 김유성이 있는 곳까지 도착해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벨은 가장 끔찍한 형태로 죽는다. 그게 아니면 그렇게 되기 전에 지수 손으로 죽여주든가. 그 따위 결말은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쳐보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시간이었다.
지수가 초조함에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벨의 증상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벨의 상태는 심각하다. 지금부터 김유성이 있는 곳까지 떠난다고 한들 제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을 만큼, 자신의 우둔함과 변이의 진행이 저주스러웠다.
돌아가는 길목에 지수는 벨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허구한 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재미있는 영화와 책들을 수집하는 데에 목숨을 걸고. 소설을 쓰거나 과자를 굽거나 쓸데없는 취미에 몰두하는 것만 좋아하는 착한 마녀. 이런 시대에서 살기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적합한 인간이었다. 이야기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장르에 떨어진 여주인공 같았다.
세상이 좀 더 느긋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망상을 하며, 지수는 다시 심연에 갈 채비를 갖추었다.
***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따라온 것은 우진이었다. 그 또한 상당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인 듯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사람들 옆에 있는 것보단 상황을 진전시키는 데에 주력하는 편이 낫겠다는 이야기였다. 딸은 어쩌고 따라오는 거냐 물었더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봐주고 있으니 괜찮다며 웃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벨은 의식을 차리고 있는 게 고작인 전력외고, 지수 또한 벨을 돌보며 싸우느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우진이 없었다면 김유성이 있는 곳까지 가는 길에서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도착했군요. 마지막 심연이라….”
심연 안은 거대한 신전 같았다. 무너져있지도 않고 금이 가있지도 않았다. 세계가 통째로 여왕의 손에 변이되어가고 있는 지금, 이렇게 멀쩡한 건축물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심연 안이 어떤 모양인지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김유성은 어디 있지? 그 용은?”
지수의 등에 업혀있는 벨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몸의 기능 대부분을 변이의 진행을 억제하는 데에 돌리고 있는 탓에, 면역력이 극도로 약화된 것이었다. 그 결과 변이를 억제하고 있던 힘도 약해진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악순환이었다.
“여기다, 사역마. 우진도 같이 왔군.”
저편까지 이어져있는 기다란 계단에 김유성이 앉아있었다. 그 양쪽 옆에 서있는 것은 백묵과 허다인. 그리고 등 뒤에 수십 쌍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순백의 거룡이 있었다. 그 모습은 가히 경건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김유성을 숭배하는 인간들이 봤다면 말 그대로 신이라고 찬양했을 것이었다.
김유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지수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면 백마녀가 병에 걸렸다고 빠져나갔을 때부터 뭔가 수상했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내가 실패할 거라고.”
“아니야. 만약을 위해 최악을 대비했던 거다.”
지수가 입술을 씹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난 것은 최악보다 더한 최악이었고, 인간의 대비 따위 애초에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김유성은 지금, 아직도 체념하지 못한 채 여왕을 쓰러뜨려보겠다고 또 일을 벌리고 있었다.
지수는 벨을 업고 있는 채로 김유성에게 말했다.
“지금도 너한테 협력하러 온 게 아니야. 충고 하나 하지. 여왕은 세계 그 자체다. 개인으로서는 대항할 수 없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 나도 봤거든.”
알고 있다면 왜? 지수가 그런 의문에 눈썹을 찌푸리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것은 김유성이 아닌 뒤쪽의 용이었다.
“맨 처음 여왕은 무언가를 흡수해 먹어치우는 것 말고는 아무 능력도 없는 보잘것없는 미물이었다. 그랬던 미물이, 뱃속에서 온갖 능력을 소화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지금 같은 괴물로 거듭나버린 거지. 그야 이미 몇 개의 세계를 먹어치운 놈이다. 대항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도리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 도리를 깨부술 뿐. 덧붙인 백룡은 머리를 돌려 신전에 이어진 계단의 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왕이 뱃속에 품고 있는 가장 위험하고 가장 강대한 힘.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심연, 세계를 부수는 망치의 정체다.”
“세계를 부수는 망치….”
그 이름을 읊조린 지수가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걸 여왕에게 휘둘러 여왕을 쓰러뜨리겠단 건가?”
”설마. 그런 식으로 쓰러뜨릴 수 있었다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겠지. 세계를 부수는 망치, 그 능력은 모든 것의 경계를 깨뜨리는 것. 실재하는 것은 물론 개념조차 파괴할 수 있지. 능력에 대고 사용하면 억지로 한계를 부수는 것조차 가능해.“
그리고 그제야 계단 위쪽에 매달려있던 무언가의 형체가 드러났다. 눈을 감은 채 쇠사슬에 칭칭 감겨있는 것은 흑발의 여자였다.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지수의 등 뒤에 업혀있던 벨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힘없이 말했다.
”흑마녀….“
”저 여자가 흑마녀라고?“
”그래. 저 녀석이 우리 계획의 핵심이다. 지금껏 저 녀석의 사정으로 마음대로 이쪽을 이용해왔으니, 이쪽이 이쪽 사정으로 마음대로 자길 이용한다 해도 불평할 수는 없겠지.“
확실히 이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흑마녀는 한창 심연을 공략할 적, 몇 번이고 그녀의 발명품 실험대로 육영웅들을 이용해왔다고. 물론 동의 따위 구하지 않고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한 것이었다. 다만 지수가 궁금한 건 그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김유성의 목소리는 성공할 거란 확신에 차있었다.
그 의문에 대답해준 것은 하늘에 뜬 순백의 용이었다.
“흑마녀가 가진 고유의 능력은, 다른 마녀의 능력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누구보다 여왕과 닮아있는 힘이다. 그 능력의 한계를, 세계를 부수는 망치를 이용해서 깨부순다. 본인이 의식을 잃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런 제약쯤이야 나의 힘으로 무시하고서 발동할 수 있다.”
“무슨 소리야?”
“이내 경계가 사라진 칠흑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겠지.”
뭐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지수가 팍 눈썹을 찌푸린 채 설명을 요구하자, 김유성 옆에 선 허다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흑마녀가 가진 능력을 폭주시켜서,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우리도 하나의 ‘세계’가 되면, 여왕과 제대로 마주보고 싸울 수가 있어.”
지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방법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말 놀라운 계획이었다. 경이로웠다. 또라이 같다는 점에서 말이다. 대체 사람이 어디까지 궁지에 몰리면 그 따위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게 여왕에게 잡아먹힐 순 없으니까 또 다른 여왕을 만들어 걔한테 잡아먹히자는 말이랑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지수는 뭐라고 반박을 해보려 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총체적 난국이라 현기증이 느껴졌다. 김유성은 원래 정신병자니 그러려니 하더라도, 어이없는 건 허다인과 백묵까지 그것에 찬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랬다. 자신은 애초에 김유성에게 협력할 생각 따위 없었다. 여기까지 온 건 김유성의 뒤에 서있는 저 용에게 벨의 변이를 막아달라 부탁하기 위해서일 뿐. 루갈반다 또한 눈치챘는지 지수의 등 뒤에 업혀있는 벨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여왕에게 당했나. 억누르고는 있지만 이미 변이가 시작되는 중이군. 어차피 끝난 처지라면 그나마 다행이야.”
그 말에 지수가 멍하니 용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 변이를 고쳐달라고….”
“미안하지만 무리다. 내 능력의 근원은 ‘무시’. 능력으로 차단막을 만들어 변이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있지만, 이미 변이가 시작된 존재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건 역행의 영역이니까. 그런 것쯤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다고…?”
“모를 줄 알았나? 멀찍이서 분석하고 있었지 않나.”
루갈반다의 그 말에 깨달았다. 그랬다. 자신은 루갈반다와 김유성을 목격할 때마다, 그 능력의 성질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 분석을 끝내놓았다. 스스로 그 결과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개를 돌렸다. 진실로부터 도망쳤다. 사고를 그만두고서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쓰러지기 직전의 벨을 억지로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김유성이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손에서 검을 놓지 않은 채로, 그 눈은 시리도록 차가운 빛을 띠고 있었다. 망연하게 입을 벌린 지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모든 존재를 흑마녀의 안에서 하나로 만든다….”
계획을 읊조린 김유성이 천천히 손을 들어 검을 치켜올렸다. 칼끝이 향하고 있는 건 지수에게 업힌 벨의 얼굴이었다.
“유일한 걸림돌이 백마녀 너다. 결코 칠흑에 섞이지 않는 순백. 흑마녀와 상극을 이루는 존재. 네가 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이 계획에 변수가 개입해서는 안 돼.”
그리고 김유성이 눈을 부라리자, 무형의 참격이 발현하는 동시에 뒤쪽의 천장이 무너지며 지수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김유성의 표정은 유감으로 가득차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요만큼의 망설임도 섞여있지 않았다.
“원한은 없다. 어차피 죽기 직전이니 미련도 없겠지.”
벨을 죽이기 위해, 용사 김유성이 검을 쥐고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