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7) >
쉘터에 비상 경보가 울렸다. 몇 등급 경보를 울려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통상의 경보라면 쉘터 안에 있는 비상 대피 구역으로 주민들을 피난시켜야 하겠지만, 지금 중앙 쉘터에 찾아온 재해는 완전히 규격외의 것이었다.
“쉘터 바깥으로 피난시켜.”
참상을 바라보고 있는 가디언들의 리더가 말했다. 늑대탈을 쓰고 있는 남자는 이전에 캠프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의회장을 실각시킨 뒤 다시 가디언 업무에 복귀한 듯 했다.
‘쉘터 바깥으로 피난시키라고?’
지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잘 만들어진 농담 하나를 들은 기분이었다. 몬스터들이 날뛰는 밖에서 피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이 쉘터인데, 지금은 오히려 사람이 산 채로 잡아먹히는 바깥이 더 안전할 지경이 되다니.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었다. 결정권자가 이런 단시간에 판단을 끝낸 건 행운이었다.
“판단이 좋네, 저 사람.”
“폼으로 수라장을 넘어온 게 아닌 거겠죠.”
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대로였다. 쉘터 바깥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는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부터가 보통이 아닌 판단력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밖에서 캠프를 유지시키는 건 신중함과 결단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주민을 피난시키고 남은 가디언들이 지수와 벨, 우진의 뒤에 섰다. 잉여인력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였다. 재해 수준의 괴물과도 싸워볼 수 있는 수준의 능력자들. 늑대탈의 남자가 조용히 지시했다.
“중앙 쉘터 집행부. 교전을 개시한다.”
옳지 못한 일을 막으려다 쉘터 밖으로 쫓겨난 시점에서, 목숨을 거는 것쯤은 진작에 각오한 일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몇 초라도 더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기쁘게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진은 고개를 휘휘 젓고 말했다.
“거기 앞에 늑대 님 한 명 빼고 나머진 다 꺼져요.”
“그런…!”
가디언들은 반대했지만 우진은 단호했다. 지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지금 가디언들의 목숨을 걱정해서 저러는 것이 아니라, 여왕에게 변이당해 전력을 흡수당하는 걸 우려하는 것이었다. 어중간하게 강한 놈들이 가장 번거롭다. 싸운다면 최대한 소수로 단기결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왜 남겨뒀지? 꽤 강한가.”
“쓸만합니다. 전투력은 딱 지금 사역마 씨 정도?”
“끝내주나 본데.”
그리고 벨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밝게 말했다.
'S급 상당이 넷에 그 중 초월자가 둘. 이거 할 만한 거 아니야? 아그리올라 정도면 볼 것도 없이 낙승인 수준인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지수가 차갑게 대꾸했다. 눈앞에 있는 저것이 그때 싸웠던 아그리올라처럼 깜찍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가 깨닫고 있었다. 장도의 칼자루를 쥔 우진이 지수에게 눈짓했다.
“그래서 브리핑은 있습니까?”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불가해의 전장에 있어서 지수의 역할은 누구보다 빨리 성질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공략해야 할지 최소한의 실마리를 잡는 것.
익숙한 일이었다. 지수는 분석 능력 만큼은 자신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사용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육영웅들과 함께 심연들을 헤쳐나가며 필사적으로 갈고 닦은 게 바로 이 분석 능력이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활용법, 능력의 신경지를 개척할 수준이었다. 지수가 말했다.
“저 새빨간 촉수에 닿으면 안 돼. 방어력이라든가 위력이라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닿으면 그 시점에서 변이가 시작된다. 살짝만 스쳐도 치명적일 수 있어. 지면이나 벽에 닿아도 그 지점에서 변이체가 튀어나올 수 있으니 조심하고.”
결국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태생이 검사인 우진은 다른 식으로 이해한 듯 했다.
“요는 한 대도 맞지 않고 막아내야 한다 이거군요.”
그리고 뛰쳐나간 우진이 신속의 속도로 발도했다. 대여섯 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뛰쳐들었지만, 그 모두를 일거에 양단한 우진의 몸에는 핏방울 하나 튀지 않았다.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옆에서 마법으로 보조를 넣어주자 우진이 힐끔 쳐다봤다.
“못 본 사이에 상당히 강해지셨군요, 사역마 씨.”
“댁만 하겠어.”
지수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예전에는 우진이 얼마나 강한지 체감할 수 없었지만, 육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워온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흑기사 우진. 이 자는 끔찍할 정도로 강했다. 마법을 봉인하는 힘이니 뭐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능력 이전에 스스로 갈고 닦은 기술의 경지가 광기의 영역에 달해있다.
그리고 모든 괴물을 치워버리고 여왕에 다가서려고 하던 우진이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장도를 휘둘러 땅바닥에 선을 그었다. 무언가 영역을 표시하려는 것 같았다.
“여기부턴 다가가기만 해도 독기에 침식됩니다.”
“독기?”
“몸 안이 찌릿찌릿하고 굉장히 아파요. 저니까 이 정도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몸이 안쪽에서 터져버렸겠죠. 미치겠네요. 일단 코앞 까지 다가가야 목을 베든 어쩌든 할 텐데.”
분명히 김유성은 저 중심에 있는 거대한 괴물, 여왕의 목을 베는 것으로 토벌에 성공했다. 그러니 그때처럼 목을 베어내기만 한다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우진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지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목 같은 걸 베어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저건 저 괴물의 본체가 아니라, 그냥 튀어나온 종기 같은 거야….”
“그럼 본체는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우진이 빨리 알려달라는 듯 지수를 보챘다. 쉘터 바깥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 중엔 자신의 딸인 유라도 섞여있다. 일 초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괴물을 죽여버리고 위험에 노출된 딸을 지켜주러 가야했다. 그 말에 지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애초에 분석이 불가능하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미세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그마한 판단 실수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에서 수백 수천 번 분석을 계속해왔기에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감각. 그리고 날카롭게 벼려진 그 감각은, 지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본체 같은거 없어. 아니, 우리 수준에선 포착 자체가 안돼. 시간이나 공간을 보거나 만지지 못하는 것처럼 여왕의 본체는 하나의 세계야. 하나의 세계 자체인 거야….”
“싸우고 있는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입니까!”
“저걸 죽이려면 뜬구름을 잡아야 한다고!”
억울해 소리친 지수가 반사적으로 벨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불가능하다. 우진이 검사이기에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걸로는 쓰러뜨릴 수 없다, 그 따위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들은 여왕이 아니라 여왕의 여드름 속 세균 같은 것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노는 물 자체가 다른 것이다.
지수는 순식간에 모든 판단을 끝내고 벨에게 말했다.
“저건 못 이겨. 못 쓰러뜨려. 멈추지도 못해.”
“지스….”
“도망쳐야 해.”
애원하는 듯한 지수의 목소리에, 벨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이미 쉘터의 광장 뿐만 아니라, 중앙 쉘터 전체가 이형의 형태로 변모해있었다. 광기는 점점 더 영토를 넓혀갈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도화지 전체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버릴 때까지. 지수가 서있는 벨의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저거 백 날 쳐봐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망할 주인님아! 삽질하고 있을 시간 없어!”
“도망쳐? 어디로?”
벨이 담담히 물어본 말에,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도망칠 곳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상 어느 곳에 숨든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저것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싸운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합리적이지 못했다.
“입 다물어! 어디든 사람 두 명 도망칠 구석쯤은 있겠지!”
“지스! 이거 놔, 사람들 대피할 때까지 시간을…!”
“이미 다 도망쳤어! 더 있으면 우리도 죽어!”
벨을 억지로 허리에 동여맨 지수가 늑대탈과 우진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듯 했다. 특히 우진은 딸이 신경쓰여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여왕과의 첫 조우는 끝났다. 인간은 여왕을 쓰러뜨리는 것도, 상처를 입히는 것도, 잠깐 동안 멈추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쉘터에 혼자 남겨진 여왕은 외롭다는 듯 구슬프게 울며, 조금씩 세상을 침식해나가기 시작했다.
***
왕들의 묘소의 문을 열고 여신이 이 세상에 강림한 순간, 김유성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심안은 이미 그러한 경지에 달해있었다. 대전쟁에서 성장을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싸움을 거듭해온 용사. 그는 지금 그 어떤 각성자도 보지 못한 영역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건 또 말도 안 되는 인간이 나타났군.>
김유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거대한 용이었다. 묘소의 주인. 수십 쌍의 날개를 지닌 순백의 용왕, 진룡왕 루갈반다. 그의 눈동자에는 경이로움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비치고 있었다. 불과 삼십 분. 문을 열고 들어온 김유성이 단신으로 모든 용왕들을 박살내고서 루갈반다 앞까지 다다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루갈반다가 놀라워하는 것은 김유성이 지닌 강함 때문이 아니었다. 왕들의 묘소는 용왕 이외의 혼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김유성은 떡하니 묘소 안에 들어와있었다.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용왕의 영혼을 억지로 접합시켰나. 연인이 자신의 혼을 녹여 접착제를 만들어줬군. 대단하군. 웬만큼 잘난 흑마법사라도 자기 영혼을 그만큼 마음대로 주무르지는 못할 텐데.>
루갈반다의 눈 앞에서 사정을 감추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대면한 시점에서 루갈반다는 이곳의 문을 열기 위해 김유성이 무엇을 희생 시켰는지 알았다. 그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루갈반다를 놀라게 만든 건 묘소 안에 들어올 방법을 찾아낸 지혜보다도, 그 방법을 실제로 실행했다는 광기였다.
“흑마법사가 아니라 성녀다.”
그것 만큼은 정정해야 한다는 듯, 바싹 마른 입술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올려다보는 김유성의 얼굴은 완전히 피폐해져있었다.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은 속아넘어갔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떠나왔던 지금까지의 여정은, 여왕의 생각대로 게임판을 비틀기 위해 이용당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깨달았나?>
루갈반다가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김유성에게 물었다.
<이곳은 여왕을 막고 있던 유일한 억제력이었다. 사실 억제력이라 하긴 부끄러운 수준이긴 하지. 문 꽁꽁 닫고 이 안에 뭐 있는지 너도 모르지, 하고 어린애처럼 겁을 준 게 전부야. 하지만 그 유치한 협박도 이제 불가능하게 됐다. 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멍청한 인간이 문을 열어버린 덕분에.>
말하는 내용에는 가시가 돋아있었지만, 딱히 김유성을 탓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어차피 승산은 1퍼센트도 되지 않았고, 이미 패배했다고 체념한 채 물고 늘어지던 싸움이었다. 그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것이 용왕의 긍지였기에, 보기 흉하게 몸을 웅크리고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루갈반다가 김유성을 도발하려는 듯 조롱했다.
<칭찬해주지. 잘도 이렇게까지 상황을 망쳐줬어. 바깥을 거닐고 있다간 사나운 괴물들에게 잡아먹힌다? 깜찍하군. 이제부터는 모든 게 미쳐버릴 거다. 지금까지의 지옥이 천국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비참한 광기의 시대가 시작되겠지.>
그것이 단순한 겁주기나 허세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김유성 또한 알 수 있었다. 여신이 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처음으로 느꼈다. 싸움의 승산과 택해야 할 정답을 도출해내는 용사의 심안. 그 시야에 비치는 것은 끝없는 절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잘도 내 계획을 망쳐줬다고 한껏 매도를 퍼부어줘야 할 상황인데. 네 표정을 보니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군, 불쌍한 인간. 돌아가서 목을 매달든지 하도록 해라.>
“목을 매달라고.”
<그것 이외에는 가능한 게 없을 텐데?>
김유성은 실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까 이 용은 아무 것도 몰랐다. 목을 백 번 천 번 매달아봤자 자신은 죽지 못할것이다. 용사의 권능이 김유성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 강제로 부활시킬 테니까. 정말로 죽고 싶다면 방법은 한 가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걸 포기하고 용사를 그만두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검을 쥔 김유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이 꺾일 것 같나? 자괴감에 미쳐버릴 것 같나? 포기하지 않고 싶어도, 자신이 열심히 하면 할 수록 상황이 엇나가게 된다 생각하니 이제는 반항하는 것조차 겁이 나나.>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고 있어.”
김유성이 눈을 부라린 순간 거대한 참격이 발현했다. 그것은 산 하나쯤은 통째로 갈라버릴 듯한 강렬한 일격이었다. 이내 루갈반다 또한 그만한 공격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위로 돌려버렸다. 양쪽 모두, 서로가 상상한 이상으로 괴물이었다. 이른바 한 세계의 최강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
<그야 잘 알지.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고 혼자 세상을 구하겠다 앞장서다가, 세상이 멸망하는 데에 누구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해버렸지. 광대짓도 그만하면 걸작이야.>
“닥쳐…!”
김유성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자괴감이었다. 자신 따위가 용사를 하면 안 되었던 거라고. 결국 자신이 거대한 삽질을 했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거라고.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검을 쥐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 거라고.
루갈반다가 고개를 떨군 김유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꺾였다면 검을 버려라, 인간. 그 검으로 세상을 구하겠다고? 너에겐 이미 그걸 쥘 자격조차 남아있지 않아.>
말한 것은 오히려 경멸이 아니라 동정이었다.
세계라는 단어의 무게는, 실제로 짊어져본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 막대한 질량 아래에서 개인 따위의 하찮은 가치는 산산조각이 나 무너지게 된다. 이전에 자신이 실패했을 땐, 용왕의 완전한 지성을 가지고도 정신적 압박에 인격을 봉해둘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면 곧장 부서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꺾였냐고….”
하지만 김유성은 검을 놓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놓지 못했다. 사죄하며 스스로 자결하는 것 이외에 가능한 것이 없는 상황이라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외를 허락받지 못했다. 과거에 품었던 결의와 각오가. 동료와 나누었던 약속이. 자신이 희생해온 것들과, 자신이 희생시켜온 것들이. 전부 새빨간 손의 저주가 되어 김유성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꺾일 마음 같은 거, 이미 남아있지도 않아.”
그건 용기도 희망도 뭣도 아니었다. 이미 김유성의 판단과 결정엔 감정 같은 얄팍한 것이 개입하고 있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 싸운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할 수가 없다. 이미 김유성이라는 개인은 용사라는 쇠사슬에 묶여버렸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에 수백 자루의 검을 찔러넣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김유성은 등을 곧게 펴고, 검을 쥔 채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망가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싸울 수 있다.
<그렇다면 너는 나보다 낫다.>
이내 루갈반다의 말투가 변했다. 끊임없이 김유성을 몰아붙이고 있던 진룡왕은, 김유성의 진의를 확인하자마자 목소리에 호의적인 감정을 묻혔다. 그것은 일종의 동질감이었다.
<세상에 자신만 잘났다고 믿고, 혼자 몰래 일을 진행시켜가며 세상을 구하려 하던 얼간이. 나도 똑같은 실수를 해서 내 세계를 날려먹어 버렸지. 그리고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버렸다. 하지만 넌 여기까지 와서도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군.>
그리고 날개를 펼친 루갈반다가 자신의 등에 김유성을 태웠다. 용이 자신의 등에 누군가를 태운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뜻이었다. 자그마치 용왕 중의 용왕, 진룡왕 루갈반다가 인간에게 등을 양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을 몇 번이고 일으키지 않으면, 이미 끝나버린 이 세상을 구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눈에 비치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간 루갈반다가 도착한 것은, 여신이 강림한 현장이었다. 우선은 김유성의 눈으로 적을 직시해둘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일으켜버린 것인지 또한. 그곳에는 이미 괴멸되어버린 쉘터가 있었다.
아니, 괴멸되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정중한 표현일 것이다. 꿈틀대는 새빨간 촉수. 원형의 입과 수백 개의 이빨. 사람들은 물론 동식물이나 건물까지도 괴이한 형태로 변해 서로를 포식하고 있었다. 김유성은 충격에 빠져 말을 잇지 못했다.
“저건…. 이럴 리가….”
<알고 있다. 자기 때문에 이 참상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네가 무슨 선택을 했든 이 세상은 멸망했을 거다. 만일 내 준비가 온전히 갖춰져 있었다고 해도, 전쟁터로 삼은 이 세계는 박살이 났을 테니.>
여신이라 자칭하고 있던 존재의 정체를 목격한 김유성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것은 용사의 힘을 얻고서 처음으로 죽인 괴물이었다. 여왕을 죽이기 위해 얻은 힘은, 여왕 스스로가 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괴물과 싸우고 있는 이들.
“저 녀석들…!”
<아는 얼굴인가?>
김유성이 초조한 얼굴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여왕의 중심체와 교전하고 있는 인간들. 당장에라도 뛰어내려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가세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루갈반다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미치기 직전까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의미가 있는 행동만을 실행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책임이었다.
<저건 자신의 부하로 변이시킨다거나 하는 거창한 능력이 아니다. 단지 소화하기 쉬운 흐물흐물한 상태로 만드는 거지. 저렇게 온 세상을 소화하기 쉬운 상태로 만든 뒤엔 세계 그 자체가 잡아먹힌다. 나의 고향이 그렇게 섭취당한 것처럼.>
하늘을 나는 루갈반다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것을 파국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이것은 단지 종말의 서곡에 불과하다. 이제부터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루갈반다의 입장에선 당연히 목소리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의 오산에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지.>
하늘을 날고 있는 백룡이 등 위의 용사에게 말했다.
<왕들의 묘소는, 마지막 심연이 아니다.>
그것이 루갈반다가 도달한 진실. 판도라의 상자 맨 아래에 있는 것은 희망일지니. 세계를 부수는 망치, 그것이 우리들이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쉘터에 강림한 여왕을 뒤로 하고, 용사를 태운 용왕은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