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68화 (168/176)

168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6) >

김유성 일행은 흔히 육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전의 대전쟁에서 활약한 여섯 명의 각성자들. 결국 전쟁은 패배로 끝나, 세상은 반쯤 멸망하고 살아남은 인류는 쉘터에 틀어박히게 됐지만, 그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구해내려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영웅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런 대단한 양반들의 캠프 안에 지수와 벨이 앉아있었다. 우진의 소개장을 읽는 김유성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뭐, 지금은 삼영웅이라 부르는 게 맞겠지.”

자조에 감싸여있는 목소리였다. 김유성의 말대로 캠프에 있는 것은 세 사람뿐이었다. 철갑을 두르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뿔 달린 하회탈을 쓰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 두 명을 대동하고 있는 금발의 청년. 불가살이와 무당, 그리고 용사.

수왕은 사람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쪽을 택했고, 흑기사는 딸을 만들어서 은퇴. 성녀는 싸우다가 죽어버렸다. 이런 세상에서 던전 탐험을 하겠다는 겁 없는 인간들이 더 나올 리도 없을 테니, 육영웅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아마도 용사 혼자만이 남을 때까지. 김유성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으니까.”

용사는 죽지 않는다. 마음이 꺾이지 않는 한, 절대 패배하지 않는 존재. 그것이 용사에게 걸려있는 축복이자 저주였다.

달관한 듯한 김유성의 눈동자는 청년의 그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외관으로 보이는 것만큼 젊지 않았다. 대전쟁 시절에 현역으로 뛰었다는 것은, 김유성이 지금 적어도 40대를 넘어가는 중년이라는 뜻이었다. 동안이라는 수준이 아니다.

‘부럽다고 말하면 화를 낼까.’

지수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김유성이 대답했다.

“화 안 내. 내가 원해서 고른 길이니까.”

"무슨...."

김유성이 피식 웃었다. 그런 김유성과 반대로 지수의 안색은 새하얘졌다. 자신은 결코 생각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생각을 읽혔다. 눈치가 좋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짐작조차 안 갔다. 직접 대면해본 용사는 생각보다 더 괴물이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말했다.

“대충 보니 흑마녀처럼 깽판을 치러 온 건 아닌 것 같군. 미안하다, 솔직히 마녀란 인종들한테는 선입견이 좀 있어서.”

“다투기라도 한 거야?”

벨이 사정을 물어보자 대답한 것은 다른 쪽이었다.

“다퉜다고? 다툰 거라면 그나마 낫겠지.”

김유성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앉아있던 중년이 입을 열었다. 불가살이 백묵. 그 어떤 요새보다도 더욱 굳건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 일컬어지는 각성자. 말하기 시작한 목소리에는 커다란 짜증과 경멸이 담겨있었다. 백묵이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죽을 둥 살 둥 심연을 공략하고 있을 때 흑마녀가 찾아왔다. 도와주러 온 거냐 물어보니 자기 발명품 성능 테스트를 좀 해달라더군. 웃기지 말고 꺼지라고 하니까 대뜸 공격했다. 겨우겨우 골렘들을 다 박살 냈더니, 협조 고맙다고 어딘가로 사라졌지. 그 여자. 언젠가 만나면 죽여버릴 거다.”

말하는 백묵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화를 억지로 삼키고 있다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아무래도 비슷한 짓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그야 그런 일을 몇 번이고 당했다면 얼마나 인내심이 좋아도 꼭지가 돌 만했다. 턱을 매만지던 벨이 납득한 듯 끄덕였다.

“하긴 육영웅 수준의 실험체는 어디 가서 못 찾으니까.”

“...지금 내 앞에서 그 녀석들을 옹호한 거냐.”

“아냐 아냐! 옹호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살기를 담아 쏘아보는 백묵의 시선에, 벨이 양 손바닥을 펴고서 항복했다. 이번에 말을 꺼낸 것은 허다인이었다.

“그러면 함께 싸워주려고 온 거야?”

“그래. 이쪽도 세상을 구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지수가 뒤통수에 양손을 모은 채 말했다. 육영웅이라면 자신보다 훨씬 연장자였지만, 딱히 존대를 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런 세상에서 나이가 많고 적고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예의를 차리는 건 평화로운 시대에서나 할 일이었다.

“아무래도 인류를 위해서, 같은 동기는 아닌 것 같네.”

“미쳤다고 그런 이유로 싸워?”

지수가 입가를 이죽였다. 자신은 정의감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것들과는 요만큼도 접점이 없었다.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건, 그런 걸 좋아하는 정신병자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단지 자신은 벨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그녀의 꿈을 도와주고 있을 뿐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이쪽은 손 하나가 급한 상황이니.”

추궁하지 않고 이야기를 정리한 건 김유성이였다. 내심 텃세나 실력 테스트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것들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저쪽에서 절을 하고 모셔가는 듯한 구도였다. 얼마나 인력난에 시달리는지 알 만했다.

그날부터 벨과 지수는 육영웅과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다. 육영웅 같은 대단한 양반들과 함께 싸운다면 구경만 해도 될 테니 편할 거라 생각했던 지수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그들은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던전들을 박살 내고 다녔다. 쉬는 시간 따위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 한 던전을 싹 다 괴멸시켜버리면 곧바로 다음 던전을 향해 나아갈 채비를 갖췄다. 육영웅들은 당연하다는 듯 던전이 있는 위치를 알아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 페이스로 학살하고 있는데도 아직 세상에서 괴물들이 싸그리 박멸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수준이었다. 어떻게 행선지를 그렇게 잘 고르는 것인가 궁금해서 물었을 때, 김유성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여신님이 다 알려줘. 용사잖냐.”

갑자기 여신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물쩍 넘기려는 말이었다. 무언가 그들만의 비밀 노하우라도 있는가 싶어 지수 또한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온갖 곳의 던전들을 박살 내고 다니는 게 가는 길에 겸사겸사하는 소일거리일 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육영웅들이 정말로 목표로 삼아 나아가는 건 오직 하나. 던전 중의 던전, S급 던전이라고도 불리는 미궁. ‘심연’이었다.

던전이 다 던전이지 무슨 그렇게 거창한 이름까지 붙이면서 특별 취급을 하나 싶었지만, 처음 심연에 들어간 날 지수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심연에 비교하면 그냥 던전들은 가볍게 아침 구보를 뛰는 정도의 준비운동일 뿐이었다.

심연 속에서 조우한 것은 하나하나가 이미 반쯤 멸망한 이 세계를 완전히 끝장내버릴 법한 위기들이었다. 육영웅들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이 세상을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유지하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지수는 그들과 함께 싸우며,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몇 번이고 세상을 지켜냈다.

그런 식으로 끝없이 사투를 계속하다 보니, 지수도 반강제로 노련한 전사가 되어갔다. 물론 육영웅이나 벨에 비하면 뒤에서 보조 역을 맡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적어도 백마녀의 사역마라는 이름에는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무슨 판도라의 상자 같네. 어떻게 열 때마다 더한 것들이 튀어나와? 이딴 걸 넷이서 공략하고 있는 게 웃기는 얘기지.”

“미안한데 다섯이거든.”

“사역마 넌 그냥 백마녀 스킬 같은 거잖아.”

김유성이 도발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지수가 쯧 혀를 차며 중지를 내밀었다. 서로 악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지수와 김유성은 언제나 앙숙 수준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무튼 이대로는 안돼. 끝이 없어.”

지수가 입을 삐죽 내민 채로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사기가 떨어질 뿐이니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수많은 싸움들을 거쳐왔지만 성취감 따위는 요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점점 쌓여가는 것은 짙은 회의감뿐이었다.

몬스터를 죽여도 죽여도 현상 유지가 고작이었고, 아무리 강해져도 다음 심연에서는 언제나 죽기 직전까지 궁지에 몰렸다. 이대로 계속해봤자 무언가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위험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의미가 없었다.

“아니. 끝이라면 있어.”

그리고 김유성은 그렇게 단언했다. 마치 신에게 계시라도 받았다는 듯이. 김유성이 지은 웃음은 너무나 상쾌해서, 도저히 수백 마리의 괴물들과 연전을 거듭하며 피로에 지친 인간의 표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김유성이 말했다.

“왕들의 묘소.”

“뭐?”

“마지막 심연의 이름이다. 그곳에는 모든 괴물들의 군주인 용왕들이 잠들어있지. 꽁꽁 잠겨있는 그 문을 아그리올라의 영혼을 써서 강제로 열어젖히면, 그걸로 해피 엔딩이다.”

고개를 돌리자 백묵과 허다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지수는 뜬금없는 이야기에 눈썹을 찌푸렸다. 의문스러운 부분이 산더미만큼 있었다. 그런 걸 네가 어떻게 아는가, 아그리올라의 혼을 쓴다는 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가. 의문점들을 지적하자 김유성은 간단하다는 듯 대답했다.

“말했잖아. 여신이 계시를 해줬다고.”

“지금 농담할 상황 같아?”

“용사는 농담 같은 거 안 해.”

지수를 노려보는 김유성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설마 제정신으로 여신의 속삭임을 들었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꽉 주먹을 쥔 김유성이 희망에 가득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버티기만 할 뿐인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니야. 우리가 왕들의 묘소까지 도달한다면, 그걸로 모든 상황이 뒤집혀.”

“뭐, 거기 도착하면 모든 몬스터가 사라지기라도 하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김유성이 대답했다.

“여신이 이 세상에 강림한다.”

멋지게 말했지만 지수는 벙쪄서 눈을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김유성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를 리더로 따르고 있는 허다인과 백묵 또한 그것을 목적으로 행동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날 밤 지수는 벨만을 따로 불러내서 말했다.

“아무래도 빠져나오는 게 좋겠어. 저놈들 다 맛이 갔다고. 무슨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 여신? 계획에 현실성이 없잖아.”

지수가 툴툴대며 말했다. 사실 어이가 없다 불평하려고 벨을 불러냈을 뿐, 정말로 김유성 일행과 헤어지자고 꺼낸 소리는 아니었다. 뜬금없이 여신을 강림시키니 뭐니 하는 게 아무리 허황된 계획 같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선 그 외의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벨은 진지한 얼굴로 수긍했다.

“응. 지스 말대로 저쪽이랑은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뭐? 아니, 잠깐만. 나는 그냥….”

당황한 지수를 내버려 두고 벨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여신이라는 존재가 실재하기는 할 거야. 단순히 전승이나 추측에 의지해서 도박을 걸고 있다 생각하기엔 김유성의 태도가 너무 확신에 차 있어. 그건 ‘직접 대면해본’ 인간의 반응이야. 아마도 용사의 능력의 근간이 되는 존재 같은 거겠지.”

거기까지 말한 벨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내가 너무 의심이 많은 걸지도 몰라. 이야기에 심취해있어서 그런가,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망상부터 하는 버릇이 있으니. 어차피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하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나라도 의심을 해야만 해. 어쩌면, 그 여신이라는 존재가….”

거기까지 말한 벨은 지수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내일이라도 떠나자.”

“떠나자고? 있어 봐, 우리가 떠나면 심연 공략은.”

“이 일행은 어차피 김유성의 원맨팀이야. 죽어도 몇 번이고 부활해 싸울 수 있는 용사의 능력이 있는 이상, 우리가 빠지건 말건 심연을 공략하는 데에는 아무런 차질도 없어.”

지수가 놀라서 멍하니 벨을 쳐다보았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벨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불길한 상상에 쫓겨 초조해하는 듯이 보였다. 아무튼 그것이 주인의 뜻이라면 알겠다고 따르는 것이 사역마의 역할이었다. 다음 날, 지수는 벨을 등에 업고서 이탈을 고했다.

“…쉘터에 갔다 와야겠다고?”

“그래. 우리 주인님이 아프셔서 진료 좀 받아야겠다. 왜. 천하의 용사님이 가지 말라 붙잡으면서 엉엉 울려고?”

지수의 도발에 김유성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김유성의 입장에서 벨과 지수는 동지가 아니라 우진의 땜빵으로 잠깐 동안 협력하러 와준 용병에 불과했다. 그들이 그들 사정으로 이탈한다는데 불가하다고 막아설 권한은 없었다.

“가든 말든 너희들 자유지. 유감인 건 그거라고. 이제 거의 다 온 참인데, 제일 맛있는 부분을 못 먹고 가다니.”

김유성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조금 있으면 왕들의 묘소에 도달한다. 슬슬 목적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계는 구원받는다. 그런 생각에 이전 같은 독기가 상당히 빠져나가 있었다. 그것은 백묵과 허다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떠나려는 지수에게 허다인이 방울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받아둬. 연락책으로 쓸 수 있을 거야.”

인사한 지수는 벨을 업고 비행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쉘터였다. 김유성 일행이 왕들의 묘소에 도달하기 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전력들에게 예상외의 사태에 대비해 태세를 정비하게 만드는 것이 벨의 목적이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뭔가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긴장하라 주의를 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거면 그냥 솔직히 말하고 나왔어도 되잖아.”

“만약에 대비하는 거니까. 저쪽이 눈치채면 의미가 없어.”

저쪽이라는 게 누굴 가리키는 건지는 몰라도 지수는 벨의 의향에 따를 뿐이었다. 쉘터에 도착하자 쿠데타에 성공한 우진을 만날 수 있었다. 벨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우진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자, 우진은 기꺼이 대답해주었다.

“아, 여신 말이죠? 분명히 그런 말을 하긴 했어요. 저는 그냥 제 기술 연마하려고 그 인간들이랑 같이 다니던 거라 듣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그때는 그치들이 세상을 구하든 말든 솔직히 알 바 아니었거든요. 강해지는 것만 생각하느라.”

우진이 말한 것은 여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김유성의 행동들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더욱 강해질 수 있는지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 결과 독보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신이 이렇게 하라 계시를 내려준다는 거죠.”

“우진 넌…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어?”

“되게 편리하겠다 싶기는 했는데.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아서 그런 건가, 여신 말이라면 의심 하나 안 하고 따르는 게 좀 불안해 보였습니다. 이용당하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배배 꼬인 인간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요. 우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벨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이 우진에게 요구한 것은 한 가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다른 쉘터에도 연락해 비상 경계태세를 내리게 하고, 가디언들을 전투태세로 대기시킬 것. 이쪽 쉘터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한 우진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지수가 받았던 방울이 빛나며 딸랑딸랑 흔들렸다. 마력의 파장이 확산되며 들려온 것은 김유성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선 전에 없는 흥분이 느껴졌다.

<성공했다. 왕들의 묘소에 도달했어. 꽁꽁 잠가 뒀던 문도 열어젖혔다. 이걸로 계시받은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어.>

김유성 일행이 마지막 심연까지 돌파한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여신의 계시인지 뭔지로 가능한 최단 루트를 최대의 효율로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김유성이 하던 말대로 이제 세상은 구원받는 것인가? 벨 또한 자신의 꿈을 꿀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이제, 인류의 중앙 쉘터에 여신이 강림할 거야.>

지수와 벨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중앙 쉘터라면 바로 이곳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진과 벨, 지수가 함께 모여있는 이곳이라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우진이 말했다.

“하늘.”

그 말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곳엔 거대한 눈이 있었다.

"...어?"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눈동자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수의 얼굴이 굳었다. 분석 능력 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확신할수 있었다. 저것은 여신 따위의 제대로 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고결함과 선(善)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

눈이 마주쳤다 생각한 순간 거대한 눈동자가 사라졌다.

이내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고깃덩어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허공에서 꿈틀대던 무언가는 서서히 형체를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한 굴곡 있는 실루엣. 몸을 이루고 있는 수천수만 가닥의 촉수. 찢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듣기만 해도 미칠 것 같은 비탄의 울음소리.

“저게 뭐야.”

철퍼덕, 하고 커다란 몸체가 쉘터의 광장 가운데에 떨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떨어진 이형의 존재 주변에 있던 인간들은, 그대로 온몸에서 촉수가 뿜어져 나오더니 지성 없는 괴물로 변이하기 시작했다.

광장에는 순식간에 한 사람의 인간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는 새까맣게 꿈틀대는 낙지 괴물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형의 벌레 같은 두부를 하고서 곤충의 날개를 흔들었다. 변하고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는 흙이나 공기조차 가장 치명적이고 끔찍한 형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육영웅인 우진은 분명 이 비슷한 현상을 알고 있었다.

대전쟁이 막 일어났을 때, 잠깐 모습을 비추었다가 사라졌던 모든 재앙의 근원. 막 각성한 김유성이 그 손으로 토벌했다 생각했던, 가장 끔찍한 시초의 괴물. 이 세계를 자신의 맹독에 감염시켜, 결국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 간 존재.

원흉. 이 세계를 먹잇감 삼아 천천히 침식해온 포식자. 그리고 소화되지 않겠다고 꽁꽁 문을 잠가놓고 있던 용왕들의 묘소까지 용사의 손에 의해 활짝 열려버린 지금,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삼라만상 모든 것을 집어삼켜 멸망시킬 존재.

“여왕….”

우진이 정답을 읊조렸다. 그것이 김유성에게 자신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주겠다 달콤하게 속삭이던 여신의 정체였다.

김유성도, 그를 따르는 육영웅도, 함께 싸웠던 지수도. 아마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계는 이미 충분히 비참하기 때문에, 이보다 더욱 나빠질 수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최악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그보다 더한 바닥이 있었고, 상황은 약속되었던 것처럼 더욱 최악으로 뒤집혔다.

이것이 ‘세계’와 ‘여왕’ 사이의 체스 승부라고 한다면, 여왕은 오랫동안 인내심을 발휘해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더 이상 어떻게 체스 말을 움직이든 자신의 이빨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까지, 죽어도 죽어도 살아나는 편리하고 강력한 말을 이용해 방해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갔다.

이제 모든 변수는 사라졌고 오로지 절망만이 남았다. 괴물은 인류를 조롱하는 듯이 결정적인 체크메이트를 두었다.

인류의 중앙 쉘터에 여왕이 수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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