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67화 (167/176)

167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5) >

지수의 마법 실력은 쭉쭉 늘어갔다. 분석 능력을 활용해 벨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해나간 지수는, 마녀의 사역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량을 굳혀나갔다. 이미 그녀와 주문의 구성에 대해서 토론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벨이 말한 대로 지수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거의 천재적인 재능이. 무엇보다 지수 자신이 마법을 배우는 데에 열의를 보였다. 그것은 학문적인 열정이라기보단, 자신의 힘으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자신의 주인이 꿈을 이루는 데에 협력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웃기는 꿈. 그걸 위해서는 일단 괴물들을 싹 박멸시켜서, 이 빌어먹을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내 지수가 말했다.

“근데 댁들은 뭐야? 잠깐 동안만 식객으로 신세 좀 지겠다고 했으면서. 그냥 평생 여기 눌러앉아 살 생각인가?”

손에 턱을 괴고 바라본 쪽에는 우진과 이유라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매일 계속되는 벨의 마법 교습을 옆에서 견학하고 있었다. 이유라의 경우엔 마법에 대한 소양이 있어 같이 배우지 않겠냐고 벨 쪽에서 권유했고, 우진은 마법에는 관심 없지만 유라가 공부하는 모습은 보고 싶어서요, 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였다. 지수의 말에 우진이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캠프 분들이 계획을 짜고 계셔서요. 쉘터를 갈아엎는다고 해도,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하는 거겠죠. 전부 다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막무가내로 생각 없이 체제를 부쉈다간 더 큰 혼란만 생길 테니.”

그리고 어깨를 으쓱인 우진이 칼자루를 툭툭 두드렸다.

“저는 뭐, 사람 죽이는 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애꿎은 쉘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인격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진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쉘터 사람들이 몰살을 당하든 말든 우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단지 자기 딸의 보금자리가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라기에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댁도 영웅이랑은 거리가 멀군.”

“그야 흑기사니까요.”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벨이었다.

벨의 손에는 납작한 접시가 들려있었다. 접시 위에 있는 것은 수제 쿠키였다. 달콤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감쌌다. 과자를 만들기 위한 재료 또한 온갖 그녀가 별짓을 다 해가며 손에 넣은 것이었다. 과자 만들기는 이른바 벨의 취미였다.

이런 시대에서 취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치였다. 지수는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데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것에 쏟을 시간에 자신과 마법에 대한 토론을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쓸데없는 것에 수고를 들이는 게 삶이란 거야, 지스.”

그런 지수의 불평에 벨은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런 세상에서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과자를 굽는다고 해도 제대로 먹고 감상을 들려주는 건 이유라뿐이었다. 우진은 음식이란 것 자체가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지수는 그냥 달콤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식감이 조금 바뀌었네요. 이 쿠키.”

“어, 눈치챘어? 어제 백마녀표 마력 화로를 개선했거든.”

과자를 먹어본 이유라가 말하자, 노력한 걸 알아준 것이 기쁜지 벨은 반죽이 어쩌니 설탕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에 열을 불태웠다. 저런 상태가 되면 한동안은 마법 수업 따위 뒷전이었다. 지수는 한숨을 쉬며 주문의 구성을 끄적거렸다.

‘부족해.’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수는 마법사로서 일 인분은 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적어도 벨보다는 강해지고 싶다는 게 지수의 희망이었다. 마법으로 백마녀를 뛰어넘는다. 그게 얼마나 커다란 목표인지 지수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할 거라고 결정했다면 제대로 한다는 게 지수의 주의였다. 지수는 벨을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결심했다.

벨에게 가르침 받는 건 단순히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벨은 지금까지 깨부숴왔던 S급 던전의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같이 싸웠던 헌터들의 성격이나 능력에 관한 이야기도. 그중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건 김유성이란 남자가 이끄는 일행들의 이야기였다.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우진이 말을 덧붙였다.

“심연은 분명 엄청나게 위험한 곳이지만… 그 이상으로 김유성이라는 남자는 대단했습니다. 그가 패배한다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용사라는 말에 걸맞아요.”

벨도 우진도 심연의 최전방에서 상상을 뛰어넘은 괴물들과 싸워온 초일류의 헌터였다. 있었던 경험을 들려주는 것만으로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지식이 되었다. 지수는 얻은 정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정리해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심연에 들어가야 했다.

마법 수업이 끝나면 감상의 시간이었다.

지수는 혼자 벨의 ‘보물창고 방’에 들어가서, 벨이 직접 쓴 이야기를 읽은 뒤 감상을 들려주었다. 아주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야 세상을 구하는 건 부수적인 과정일 뿐이고, 벨의 진짜 목표는 작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글을 쓰지 못해서야 이야기가 안 된다. 지수가 원고를 한 장 한 장 넘겨 갔다.

‘많이 발전했어.’

사실대로 말하면 벨의 문재는 완전히 파멸적인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제 슬슬 문장처럼 보이는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장족의 발전에 감동의 눈물이 다 흐를 지경이었다. 지수는 벨이 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일을 생각했다.

<투명 마법사는 졸라 짱 세서 마법사 중에 최강이었다. 마법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한 번만 쏴도 다 이겼다. 드래곤도 이겼다. 으악 제기랄 도망가자. 괴물들이 도망갔다. 투명 마법사가 짱이었다. 그래서 괴물들은 도망간 것이었다….>

‘악몽이었지.’

지수가 이마를 짚었다.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때는 정말로 벨이 자신에게 커다란 엿을 먹이려고 하는 것인지, 진짜 진지하게 쓴 글을 가지고 온 것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감상을 원하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전자란 걸 알 수 있었지만. 원고를 읽은 지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신경 쓰이는 부분들이 좀 있네.”

“뭔데? 사양하지 말고 다 말해봐! 어서!”

“좋아. 일단 한 가지.”

환하게 웃는 벨에게 지수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왜 배경은 러시아인데 사람들 이름은 독일식이지?”

벨은 멍하니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수는 멈추지 않았다.

“기술 이름 같은 건 쓸데없이 왜 외치는 거야. 적한테 다음 행동을 알려주는 꼴이잖아. 주인공은 아무 이유도 없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고 있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연기하는 말투로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벨이 눈을 끔뻑였다. 부족한 점을 꼬집는 것은 민감한 일이지만 의식해서 고칠 수 있는 부분들을 나열하는 게 벨의 역량을 키우는 데에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받았을까. 그리고 활짝 웃은 벨은 양손을 펼치며 외쳤다.

“멋있잖아!”

“아이고.”

지수는 미간을 꼬집었다. 그랬다. 벨에게 있어 지수가 나열한 결점들은 결점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취향이고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렇다는데 옆에서 참견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단순한 이야긴데.”

벨이 쓰는 이야기는 한결같이 뻔한 영웅담들뿐이었다. 엄청나게 강하고 멋진 주인공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어떤 문제든 단숨에 해결해버린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주공이 나서면 전부 해결됐다.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었다.

“이 세상에도 그런 주인공이 있었으면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벨의 얼굴은 전에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지수는 이런 황폐한 세상에서 이야기처럼 쓸데없는 것에 빠져드는 그녀를 별난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반대일지도 몰랐다. 이런 세상이기에 벨은 이야기에 심취한 것이다.

지수는 잠깐 동안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괜히 머리를 긁적이면서 쑥스러움을 감춘 건, 자신도 모르게 훌륭하다고 감탄을 내뱉을 뻔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수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주인공 같은 인간이라면 있잖아. 그 김유성인가 하는.”

“아니. 조금 달라.”

눈썹을 찌푸린 벨이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는 눈치였다. 지수가 팔짱을 낀 채로 벨의 대답을 기다리자, 벨이 작게 콧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사람은 망설이지를 않아. 몇 번을 생각해도 다른 대안이 없다면,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라도 세상을 지키는 쪽을 선택할 거야.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절대 남에게 떠넘기지 않아. 분명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주인공이랑은 조금 달라. 이어진 벨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했다. 김유성은 주인공이 아니다. 벨에게는 자신 안에 그리고 있는 확고한 주인공상이 있었다.

“주인공은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 좋아.”

눈을 감은 벨이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등에는 멋있는 망토를 두르고, 언제 어디서나 필요할 때에 나타나는. 무리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지켜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

그 말에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전부 다 잃어버리는 거라고.”

“바보, 기어이 지켜내니까 주인공이지!”

“너무 편의주의적이야.”

어린아이의 망상이나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전부 다 지켜낸다. 그것은 이기주의의 극치였다. 세상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치에도 도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수는 조용히 원고를 덮었다.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는 그런 억지를 부려도 좋을지 모른다.

“편의주의적이지만… 나쁘지는 않았어.”

지수가 벨에게 원고를 돌려주었다. 그 말에 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뚱한 표정으로 글을 읽고 부족한 점만을 지적하던 지수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내 벨이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좋아! 오늘 밤에 다음 이야기도 쓸게!”

“뭐? 오늘 밤엔 내 마법 봐준다고 했잖아!”

“지스! 지금 그런 게 중요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보물창고 안에서 벨과 투덕대며, 지수는 마음 한편에서 김유성이라는 남자를 생각했다. 우진과 벨의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그는 신경이 쓰이는 인간이었다.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이 없는 지수가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호감이나 호의 같은 것이 아닌 호기심의 문제였다. 하지만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노력하고 있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될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지수의 생각보다도 빨리 찾아왔다.

아지랑이의 성으로 만들어낸 벨의 자택 앞. 짐을 챙긴 이유라와 우진이 나와 있었다. 내일이 드디어 쉘터 반란 계획의 결행일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동거 생활. 지수는 언제까지 식객으로 지낼 생각이냐고 툴툴대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들과 있었던 날들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져야 할 때가 오니 아주 요만큼은 섭섭했다. 장도를 든 우진이 지수와 벨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일이 정리되면 쉘터에 한번 놀러 오시죠. 유라도 백마녀님의 과자를 먹고 싶어 하니.”

“그래. 걱정은 필요 없겠지. 우진 네가 하는 일이니.”

오히려 의회장한테 명복을 빌어줘야겠어. 그 남자가 순순히 투항하지는 않을 테니. 팔짱을 낀 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나선 우진이 벨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대강 그려놓은 지도와 메모였다. 벨이 우진에게 물었다.

“이건….”

“유라 과잣값입니다.”

어깨를 으쓱인 우진이 특유의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때문에 여기 정착하고 계셨지만, 이제 사역마 씨 교육도 대충 끝난 것 같고. 백마녀님의 본업인 헌터로 돌아가셔야겠죠. 심연을 공략할 생각이시죠? 그러면 그 남자랑 합류하는 게 가장 빠를 겁니다. 마음대로 빠져나왔으니 빈자리를 메꿀 인재를 보내주는 게 동료들에 대한 의리기도 하고.”

그곳에 적혀있는 메모는 가장 최근 발견된 S급 던전의 위치. 김유성 일행의 베이스캠프를 가리키는 지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