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4) >
지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 침대의 허리맡에선 벨이 엎드린 채로 잠들어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지수가 처음 깨어났었던 그 방이었다. 죽지 않았다. 적은 쓰러뜨린 건가? 심장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키자, 엎드려있던 벨이 잠에서 깨어났다.
“지스!”
눈을 깜빡이던 벨은 지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지수는 마주 웃어줄 여유도 없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열심이었다. 아무래도 싸움은 끝났다.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 사람들은 뭐지?”
지수의 시선 끝에는 모르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조용히 기다란 칼을 손질하고 있는 장발의 남자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만히 앉아있는 여자아이. 둘 다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지수의 말에 대답한 검은 장발의 남자 쪽이었다.
“잠깐 동안 식객으로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식객?”
지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벨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인사해. 저 사람의 이름은 우진. 옆에 있는 아이는 딸인 유라. 우진은 엄청 대단한 헌터기도 하고, 우리 생명의 은인이야. 집에 묵게 해주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백마녀 님 입에서 거물이란 소리를 듣다니 영광이네요.”
우진이 과찬이라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우진에게선 온화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잘 벼려진 시퍼런 칼날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진부한 표현을 쓰자면, 피냄새가 나는 인간이었다.
몸짓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다. 필시 어떤 분야의 달인일 것이다. 보아하니 적을 쓰러뜨린 것은 눈앞의 남자인 듯 했다. 지수가 우진을 관찰하자 그가 눈웃음을 지어줬다.
“사역마 씨의 헌신 잘 보았습니다. 목숨을 바쳐서까지 주인을 지키려 하다니. 백마녀 님의 수완도 얕볼 수가 없군요.”
우진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곧바로 깨달았다. 지수가 마지막에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우면서 시간을 끌던 것. 우진은 지금 그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행동이 마치 감동적인 미담처럼 포장된 모습에, 지수는 불쾌함을 느꼈다.
“착각하지 마. 난 저 녀석의 사역마고, 저 녀석이 죽어버리면 나까지 죽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나섰을 뿐이야.”
“지스는 훌륭한 방패야. 이름부터 이지스잖아.”
“이지스가 아니라 이지수라고.”
지수는 발끈하며 화를 냈지만, 벨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넘겼다. 우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황폐한 세계. 이런 시대에서는 보기 힘든 익살맞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벨이 우진에게 물었다.
“우진 너, 헌터는 완전히 은퇴할 생각이야?”
벨이 진지한 표정으로 우진에게 물었다. 왜 혼자서 다니고 있냐. 김유성네 일행들이랑 같이 심연행을 다니는 것 아니었냐. 그런 말들은 꺼내지 않았다.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딸을 거두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대강 짐작이 갔다.
어깨를 으쓱인 우진이 옆에 앉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그래야겠네요. 그런 위험한 데에 유라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고. 걸리적거리는 걸 붙이고 다닐 거면 그냥 다른 데로 꺼지라고 우리 용사님한테 일갈을 당해서. 열받아서 대판 싸우고 나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배려해준 거겠죠.”
그리고 침대에 앉아있는 지수가 물었다.
“헌터가 뭐지?”
“뭐, 되게 포괄적인 개념이기는 한데. 쉽게 설명하면 몬스터 사냥꾼?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바깥에서 괴물을 박살내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 거지.”
나도 헌터야. 벨이 자기 뺨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즉 쉘터의 가디언을 수비수라고 한다면 헌터들이 하는 일은 공격이었다. 당연히 위험도는 가디언 따위와 비교가 안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서 적진에 침투하는 특수부대원과 같다.
“기특한 사람들이군. 영웅이잖아.”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인류를 위한 헌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웅적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수의 감상에 벨과 우진 둘 다 미묘한 느낌의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요.”
“맞아. 다들 제멋대로 싸우고 있는 것뿐이야.”
벨이 아는 얼굴들을 떠올리는 듯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그냥 몬스터가 너무 미워서 참을 수 없어하는 사람도 있고, 순수하게 각성자로서 더 강한 경지를 목표로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사람들을 위해 싸운다’는 건전한 동기를 가진 헌터는 거의 없어. 대부분이 머리에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거든. 아무래도 헌터라는 게 제정신으로 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
벨의 목소리에는 자조와 긍지가 섞여있었다. 깊이 동감한다는 듯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나사가 빠져있는 게 우리들 마녀지, 하고 벨은 말을 이었다.
“마녀들은 세상이 더 개판이 되든 말든 신경도 안써. 오히려 아수라장을 바라고 있을 정도지. 언제나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하는 병자들이니까. 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고, 더 깊은 신비를 마주하는 게 마녀라는 인종들의 숙원이야.”
“너한테서 받은 인상이랑은 좀 차이가 있는데.”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벨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 벨은 그게 마녀라는 인종들의 본질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사람들을 걱정해준답시고 자기한테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인간들까지 괜찮다 내버려두는 답답이였다.
지수의 추궁에 벨은 곤란한 듯한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나는 마녀들 사이에서도 별종이거든. 다른 애들은 내 이름도 몰라. 백마녀는 대대로 겉도는 게 전통이라서.”
“왕따인 게 자랑이야?”
“너무해, 지스! 주인님한테 그런 말을! 흑….”
손으로 얼굴을 덮은 벨이 과장되게 우는 척을 했다. 지수는 입가를 이죽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기다란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은 우진이 말했다.
“사실 사역마 씨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헌터도 존재하긴 합니다. 아니, 그런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할까요. 대부분이 미친놈들인 헌터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미쳤다고 소문이 난 남자죠. 진지하게 시대를 뒤집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있는 인간.”
그 이름하여 용사 김유성. 인류 최강의 각성자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그 말에 지수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은 즉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이 황폐한 세계를 다시 인류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 확실히 어느 정도의 광기에 몸을 담그지 않고서는 관철해나갈 수 없는 각오였다.
그런 우진의 말에, 벨도 당당히 가슴을 펴보였다.
“공상이라고 하지만, 꿈을 쫓는 건 용사 뿐만이 아니야. 언젠가는 분명 다시 평화로운 시대가 와! 사실 나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구. 대단하지? 칭찬해, 지스!”
“아 그래, 대단하십니다.”
지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서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몰라. 어차피 나랑은 별세계의 일이라고. 이쪽은 힘없는 소시민이란 말이야. 괴물이 어떻느니 세상이 어떻느니 하는 이야기는, 그만한 재능이 있는 녀석들이나 생각하면 돼.”
김유성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결국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이쪽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 해도 벅찬 약자다. 심지어는 기억도 없었다.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야겠다 하는 거창한 생각을 할 여유 따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수의 말에 벨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아니야. 너한테는 재능이 있어. 마녀인 나조차 매료돼버릴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대단한 재능이!”
이쪽을 바라보는 벨의 얼굴은 커다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누군가가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준 것은 아마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도 없을 것이다. 이내 완연한 미소로 들떠있는 마녀는, 자신의 사역마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마법을 배우자, 지스.”
담겨있는 것은 순수한 호의. 그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에, 지수는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쉘터에 방문한 것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용왕의 숙주였던 실험체의 유해를 넘겨준 벨은, 의회장에게서 원하고 있던 물건을 받았다. 그것은 어떠한 빛나는 원반 같은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우진 손에 실각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겠지. 의회장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겠어.”
그러고 보면 집에 식객으로 들어와있는 우진이, 쉘터의 관리자를 싹 갈아치우려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외부에서의 쿠데타라는 것이다. 그런 계획을 간단한 일이라는 듯 단순하게 말하다니. 지수는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인간. 그렇게 강한 건가?”
“우진 말이야? 그야 강하지! 쉘터 안의 모든 전력이 다 뛰쳐나와도 제대로 된 상처 하나 못 입힐걸? 애초에 영역 자체가 다르니까. 토끼들이랑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은 거야.”
“그 인간이랑 너랑 비교하면?”
“음…노 코멘트.”
흥, 지나 보군. 팔짱을 낀 지수가 마음속으로 납득했다. 쉘터에서 나와 황야를 걷고 있으면 괴물들이 속속들이 나타나 이쪽을 덮쳐왔다. 이것도 이제 슬슬 익숙해졌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괴물들 사이를 지나치며, 두 사람은 집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건 뭐지? 꼭 손에 넣고 싶었다더니.”
돌아오는 내내 신경쓰였던 것이었다. 위험한 심부름을 해주는 대가로 의회장에게서 받아낸 물건. 지수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벨이 배시시 웃었다. 이내 그녀는 지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어딘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멈춰선 것은 지금껏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방문의 앞이었다.
“지스 너한테만 특별히 보여주는 거야.”
내 보물창고. 끼익 문을 열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지수는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기계장치. 앞에 볼록한 유리창이 달려있는 커다란 상자 같은 고철덩이와, 새하얀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네모난 천막이었다.
이내 방 안에 걸어들어간 벨은 한 권의 책을 꺼내서 지수에게 건네주었다. 지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것은 마도서 같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일지나 자료를 기록해둔 장부 또한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였다.
“소설이야.”
특별히 알려준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벨이 말했다. 소설이란 게 무엇인지쯤이야 지수 또한 알고 있었다. 사전적인 의미 정도는 분명히. 지수가 멍하니 소설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눈을 감은 벨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히 주워서 처음 읽었을 땐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줄 알았어. 충격이었지. 지금까지 아마 백 번은 넘게 읽었을걸.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보니까, 후기에 이 책의 영화판이 있다는 거야.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리고 벨은 조용히 방의 불을 끄고, 쉘터의 의회장에게 받아온 빛나는 원반을 기계장치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천장에 붙어있는 네모난 철제 상자가, 형형색색의 광선을 쏴 새하얀 천막 위에 움직이는 영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벨은 이쪽에 와서 앉으라는 듯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그것은 영화였다. 지수는 벨의 옆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온갖 잡동사니 고물들을 겨우겨우 모아 재현해낸 영화관. 화질은 조악했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옆에서 벨이 소설에서는 저 장면이 어땠었다느니, 어떤 대사를 생략돼서 짜증난다느니 조잘조잘 떠들어대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벨이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말이야, 출판사라는 게 있어서 온갖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서점에서 그걸 구입하는 거야. 자기 취향인 재밌어보이는 이야기를 골라서 그 안에 빠져드는 거지. 그리고 자기가 뭘 느꼈는지,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는지 다른 사람들이랑 공유하고….”
자기가 받은 감동을 전문적으로 표현하는 직업도 있어서, 맞다! 영화관이랑 극장이라는 것도 있었어. 그리고 또…. 벨의 설명은 완전히 중구난방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는 크게 들떠있었다. 정말 멋진 무언가를 소개해주듯이.
‘그런가.’
지수는 무언가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벨이 흉악한 몬스터라고 해도 살아있는 생물을 죽이기 싫어하던 이유. 그것은 아마도, 죽으면 이야기가 끝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재미있는 사건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는 순간 모든 가능성은 그곳에서 끝나버린다. 즉, 그녀는 단순히 이야기 예찬론자일 뿐이었다.
또한 지수는 이 ‘보물창고’의 정체 또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이야기의 박물관이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즐기던 옛 시대의 자취들을, 보이는 족족 모아서 한 곳에 쑤셔박아놓은 화석 전시장. 벨은 이른바 픽션이라는 것에 도취되어있었다.
그렇게 웃으며 호들갑을 떨던, 벨은 이내 침울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찾아왔지만 지수는 역으로 당황스러워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내 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야. 지스 네 기억, 내가 지운 거야.”
지수의 표정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뭐?”
가볍게 털어놓은 말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자신이 방금 잘못 들은 것인가 의심이 갔다. 지수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백마녀의 특기 중에 하나거든. 표백시키는 거.”
농담으로 꺼낸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그런데도 내면은 묘하게 침착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수는 눈앞의 마녀를 상당히 신뢰하게 된 것 같았다. 적어도 왜 그랬냐 당장 멱살을 잡지 않고 이유를 말해주길 기다릴 만큼은.
“내가 발견했을 때, 지스 너는…자살한 상태였어.
그 말에 지수는 할 말을 잃었다. 결코 납득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단숨에 납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야 이런 세상이다. 식량이 없어 서로를 죽이고, 은신처를 찾다가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세상.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질 만한 이유는 잠깐만 생각해봐도 몇 개나 떠올릴 수 있었다.
“스스로 원해서 죽어가는 건데도, 왠지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 그래서 허락도 맡지 않고 내 사역마로 만들어버렸지.”
지수는 벨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줬다는 걸 알았을 때, 커다란 빚을 져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벨은 오히려 미안해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개인의 선택을 짓밟고, 자신의 주관만으로 삶을 강요해버린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어? 지워진 기억.”
벨이 말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돌려주겠다는 듯.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벨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지수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콧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떠올려봤자 우울해지기만 할 삶이었겠지. 일개 사역마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결국 자살로 끝나버린 생애였다. 가지고 있어봐야 마이너스에 불과한 기억을, 굳이 돌려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말에 안심한 듯, 슬퍼진 듯 벨은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 뒤로는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영화에 집중했다. 이내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만든 장인들의 서명이었다. 당연하게도 알고 있는 이름 따위 하나도 없었다.
“어때?”
대단하지 않았냐는 듯 벨이 지수를 돌아보았다.
지수는 하찮다고 생각했다. 그야 색다른 경험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식량이나 의약품이 없어서 죽는 사람은 있어도, 이야기가 없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이 시대에, 이야기 따위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무래도 좋은 것을 즐기며 떠들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막연히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지수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옆에서 벨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왜 이러나 싶었더니, 벨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있잖아. 지스.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뭔데.”
“비웃으면 안돼.”
“그래.”
“정말로 안 비웃을 거지?
“똑같은 말 두 번 하는 거 싫어해.”
합리적이지 못하니까. 지수가 약간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내 자기 머리를 만지작대던 벨은 잔뜩 쑥스럼을 타며 말했다. 개미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다.
“나, 작가가 되고 싶어. 내 책을 내고 싶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지수가 벨을 멀뚱히 쳐다보자, 벨은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를 상영한 장치들을 다시 정리했다. 어제 말했었잖아, 나도 남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헌터라고.
“그거 거짓말이야.”
벨이 나지막이 읊조린 말에, 지수가 벨을 바라보았다.
“이런 세상에서 소설을 써봤자 읽어줄 사람이 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거야.”
남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이뤄야 할 제멋대로인 세계 구원. 그것은 목표나 도달점조차 아니고, 작가라는 꿈에 도전하기 위해 이뤄야 할 최소한의 전제 조건일 뿐이었다. 벨이 웃으며 지수에게 말했다.
“도와줄 거지, 지스? 너는 내 사역마니까.”
마녀의 어이없고도 당당한 장래희망 선언에, 일개 사역마는 알았다고 대답해주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