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3) >
벨은 억울해서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흡혈귀를 추적해왔더니 용왕이 나타났다. 벨은 웬만큼 위험한 몬스터가 상대라도 제압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용왕 같은 대재앙을 단신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건 해봐야 인류 최강이라고 불리는 김유성 정도였다.
처음부터 의회장이 함정을 파둔 것인가? 자신을 용왕과 부딪치게 해 체력을 깎아낸 다음, 조련사의 능력으로 용왕을 손에 넣기 위해. 그럴 듯한 가설이기는 했지만, 벨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했다.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그럴 게 반죽음 상태의 용왕이라고 해도 쉘터쯤은 통째로 괴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의회장은 분명히 미친놈이지만 승산 없는 도박에 판돈을 전부 꼬라박을 인물은 아니었다. 벨은 눈앞의 용왕을 쳐다보았다. 승산은 잘 쳐줘봐야 2할이었다.
‘지스를 사역마로 변생시킬 때 힘을 너무 많이 썼어.’
만전의 상태라고 해도 이기는 건 힘들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마력이 부족한 건 뼈아팠다. 벨은 침을 꿀꺽 삼키고 소녀를 보았다. 난폭한 짐승과 달리, 용왕은 높은 지성을 지닌 존재. 서로 싸워봐야 득이 없다는 걸 납득시킬 수 있다면.
“우리 혹시 말로 해결할 수는….”
대답 대신에 날아온 건 새까만 마력탄이었다.
“그래, 없겠지.”
마력탄을 가볍게 상쇄한 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히 용왕 아그리올라의 그것이었지만, 인간 형태의 모습이 벨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 아그리올라는 분명히 은발의 여인이라고 했을 텐데.
‘애초에 용으로 변하지도 않고. 문제가 있는 건가?’
아그리올라의 눈동자는 살의로 가득차있었다. 그것은 상처입은 맹수가 자신의 은신처에 들어온 적을 봤을 때의 눈빛이었다. 이미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벨은 한 순간에 각오를 끝냈다. 그녀가 용왕에게 손을 내뻗었다.
“아지랑이의 성.”
벨의 등 뒤에 안개처럼 흩어져있던 무지갯빛의 환상. 그것은 단숨에 형태를 변환해, 단단한 사슬이 되어 용왕을 옭아매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그마치 용왕. 긴 시간 동안 구속해둘 수는 없었다. 그동안 할 수 있는 준비를 끝내놓아야 했다.
새하얀 마력에 감싸인 벨이 뒤쪽의 지수에게 말했다.
“지스. 널 지켜주면서 싸울 수는 없어. 알아서 피신해.”
하지만 지수는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사역마인데 주인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다, 따위의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도망칠 수가 없는 것이다.
지수는 벨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마력을 공급받지 못한다.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심장이 멈춰 죽어버린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지수는 그나마 싸움의 여파가 미치지 않을 벽 뒤쪽에 몸을 숨겼다. 아그리올라가 마력을 해방했다.
가장 불길한 마력. 폭풍 같은 기세가 그녀를 중심으로 몰아쳤다. 아그리올라를 묶고 있는 사슬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벨은 냉정하게 전투의 준비를 하나씩 끝마쳤다. 벨의 손바닥 위에 나타난 것은 한 권의 두꺼운 동화책이었다.
“재버워키.”
이야기의 정령 재버워키. 가공과 허구를 다루는 존재.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수 있는, 활자로 이루어진 괴물. 재버워키는 계약자의 의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었다. 벨의 재버워키로 만들어낸 건 동화 속 신비를 구현하는 마녀의 마도서였다.
“즉흥시인.”
이야기는 곧 마법이 된다 빛나는 페이지가 촤르륵 넘어가기 시작했다. 정령술과 마녀의 마도를 융합시킨 그녀만의 전투방식. 두꺼운 책을 펼친 벨은 아그리올라를 가리켰다.
“눈의 여왕의 입맞춤.”
마력의 격류가 눈보라처럼 몰아치자, 튀어나온 얼음송곳이 소녀의 몸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하지만 터져나온 검은 마력은 얼음조각을 그대로 깨뜨려버렸다. 이내 아그리올라가 포효하며, 등 뒤에서 수많은 종류의 주문들을 동시에 전개했다.
“인어공주의 물거품.”
마력은 애달픈 선율이 되었다. 그러자 쏟아져오던 온갖 주문들은 수백 개의 수백 개의 비눗방울이 되어 그대로 공중에 증발해버렸다. 마녀와 용왕의 싸움은 그러한 공방의 연속이었다. 작렬하는 주문과 주문. 마치 신화의 한 장면 같았다.
지수는 벽 안에 몸을 숨긴 채로,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엄청난 마법전을 지켜보았다. 말 그대로 초월자들의 영역이었다. 벨은 흡혈귀 따위 몇 마리가 나타나도 문제가 안 된다 말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허세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오히려 겸손을 떨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양쪽 모두 괴물이다.
하지만 지수가 넋이 빠질세라 싸움의 광경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역량에 감탄해서가 아니었다. 지수는 그러한 동경 따위와는 요만큼도 접점이 없는 성격이었다. 가늠하는 것은 단지 지금 상황이 어느 쪽을 향해서 기울고 있는 상태인지.
주관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철저히 냉정해져야 한다.
그저 합리적으로. 지수의 눈동자에 작은 안광이 감돌았다. 서로의 전력. 기술 사이의 간격. 옆에서 관전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꽤 많았다. 그리고 지수는 결론을 내놓았다. 지금 이대로 공방이 계속된다면, 패배하는 것은 벨 쪽이었다.
‘곤란해.’
그야 벨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했다. 결착이 지어지기 전에 무언가 변수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저런 엄청난 싸움에 자신 따위가 어떻게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지수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이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벨은 지수가 원래 상당한 수준의 능력자였다고 했다. 싸우는 방법을 기억해낸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자신이 뭘 하던 인간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자체가 누군가의 손에 표백되어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지수가 예측했던 대로 흘러갔다.
벨과 아그리올라는 서로가 서로의 주문을 계속해서 상쇄하는 듯 했지만, 벨이 한 번 박자를 놓친 순간 새까만 창이 쏘아져나가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피투성이가 된 벨이 바닥을 굴렀다. 지수가 앞으로 달려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스…!”
어깨의 상처를 움켜쥔 벨이 당황해서 말했다. 사역마로서 여차할 때 주인을 보조해주길 바라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앞으로 나오는 것은 그냥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아직 싸우는 방법도 기억해내지 못했을 텐데. 그러한 벨의 제지에 지수는.
“착각하지 마. 네가 죽으면 내가 곤란하다고.”
딱히 구해주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본능에 덜덜 떨리고 있는 몸을 이성으로 진정시킨다. 이내 지수는 쓰러져 있는 벨에게서 정령의 마도서를 빼앗았다.
“지스, 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어.”
지수의 눈에 자그마한 안광이 흘렀다. 싸우는 방법을 잊어버렸다면, 잊어버린 채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 탐색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지수는 벨이 쓰러질 때까지, 마도서를 사용하는 모습 하나만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
“무슨 원리인진 몰라도,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겠어.”
부모가 리모콘을 누르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는 아이처럼. 그 모습을 본 벨은 자그맣게 숨을 삼켰다. 바로 지금, 자신의 사역마가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분석(分折)….”
마법사가 드물게 각성하는 능력 중의 하나. 어렵고 복잡한 정보를 잘게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는 스킬. 전투보다는 주문을 연구하거나 개발할 때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분명 드물다면 드물지만,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능력은 아니다. 벨이 알고 있는 마법사들 중에도 분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도구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흑마녀. 하지만 지수는 스스로가 지닌 집중력과 관찰력으로, 분석 능력을 직접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마녀인 자신조차 빛이 바래보일 만큼, 순수한 재능의 덩어리. 지수가 즉흥시인의 마도서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
지수가 마도서의 재버워키에게 말했다. 자신은 마법사가 아니다. 예전에는 마법사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주문을 구성하는 방법 따위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런 것쯤은 마도서가 어떻게든 해준다. 필요한 것은 마력을 공급해주는 것뿐. 다행히 그것이라면 지수 또한 가지고 있었다.
-네 생명력은 내 마력으로 대신 메꿔둔 상태야.
벨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대로 지금 지수는 마녀의 사역마.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명력이 아닌 마녀의 마력. 마도서가 주문을 만들어낼 연료는 지수의 몸뚱이에 가득 들어차있었다. 마도서가 지수의 생명을 먹어치워갔다.
심장에서 격통이 느껴진다. 마력을 제어하는 방법 따위는 한 줄도 모른다. 터져나간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마법. 마력을 운동력으로 변환시켜 쏘아낼 뿐인 주문이었다. 이른바 매직 미사일. 당연히 그런 것이 용왕에게 대단한 타격을 입히는 건 불가능했지만, 아주 잠깐 주춤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만둬, 지스…!”
이걸로 1초를 벌었다. 다음 1초를 벌기 위해, 또다시 생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펴간다. 거대한 매직 미사일이 날아갔다. 지수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냈다.
이내 연기가 걷히고, 상처 하나 없는 용왕이 있었다.
결국 이런 것이었다. 목숨을 불태우며 날린 공격도, 고작 십수 초의 시간을 끈 게 고작이었다. 무의미할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다만 행동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을 뿐이다. 지수가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아그리올라가 한쪽 손을 들었다.
그곳에 새까만 마법진이 발현했다. 뿜어져나오는 마력에는 요 주변 전체를 초토화시킬 만한 힘이 담겨있었다. 확실하게 상황을 굳히기 위해, 일부러 이쪽의 모든 패가 소모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겠지. 벨 또한 그것을 알기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돌연 빛나던 마법진이 증발해 사라졌다.
“어?”
벨이 멍하니 앞쪽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주변에 퍼져나온 이질적인 기운은, 주문의 발동 자체를 틀어막고 있었다. 알고 있다. 벨은 이 기술을 알고 있었다. 적막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어디선가 칼끝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은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폐허가 된 건물의 옥상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 그리고 새까만 갑주를 입은 장발의 남자였다.
“이것 참, 인연이란 게 묘하군요.”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장발의 남자는 땅바닥에 질질 끌던 장검을 들어, 흑룡을 향해 칼끝을 내밀었다. 꿈틀대는 역장이 공간을 장악했다. 어떤 주문도 사용할 수 없는 금지령.
“백마녀 님을 찾아왔더니, 오래된 숙적을 만날 줄은.”
“우진!”
나타난 것은 명실상부 최강의 각성자 중의 하나, 흑기사 우진. 벨의 얼굴에 화색이 깃드는 것과 동시에, 검은 갑주의 검객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다음 순간, 기다란 장검은 이미 아그리올라의 몸을 양단하고 있었다. 귀신 같은 솜씨였다.
땅바닥에 쓰러진 시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쉴 새도 없이, 벨은 지수를 향해 달려나갔다. 빨리 응급처리를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첫 사역마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릴 생각은 없었다. 벨이 우진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대단하네. 용왕을 단칼에 죽이다니.”
검의 피를 털어내던 우진은 그 말에 담담히 대답했다.
“세 번쨉니다.”
“뭐?”
“아그리올라를 죽인 것만 해도 세 번째라고요. 아무리 죽여도 사념체만은 빠져나가서, 다른 숙주에 안착한 다음 용왕으로 변생하더군요. 저희도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김유성을 필두로 한 우진의 동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벨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빠져나와 우진 혼자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라운 건 다른 쪽이었다.
“그런 게 가능해?”
“뭐, 백마녀 님을 비롯한 마녀 분들이랑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만…급하게 부활해서인지 처음보다 훨씬 약해진 건 사실입니다. 용언도 둥지도 쓸 수 없고요. 애초에 용 형태가 되질 않잖아요. 당장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당장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냥 놔두면 성가시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용왕을 큰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말투에서 이 시대의 최강자 중 한 명다운 관록이 느껴졌다.
이내 벨은 지수를 치료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력이 텅 비어버렸을 뿐, 생명에 치명적인 문제는 없었다. 벨은 그제야 안도해서 긴장을 놓았다. 온몸의 힘이 풀렸다. 칼날에 묻은 피를 전부 털어낸 우진이 벨을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길안내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길안내라니…쉘터? 쉘터라면 바로 보이잖아.”
“아뇨, 그쪽 말고. 쉘터랑 대립하는 쪽 말입니다.”
쉘터 외부 생존자들의 캠프를 말하는 것이다. 은신처의 위치는 그들의 생명줄이다. 아무래도 함부로 알주는 것은 망설여졌다. 벨이 떠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우진은 조금 팔불출 같아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딸을 거두게 돼서 정착할 곳이 필요하거든요. 역시 쉘터에 들어가는 게 좋겠지만, 보니까 애들 교육에 안 좋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뜬금없이 딸을 거두었다니. 그러고 보면, 아까 우진이 서있던 옥상에서 우물쭈물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벨이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라는 듯 쏘아보자, 온화하게 웃던 우진의 표정에 차가움이 깃들었다.
“쉘터 상층부를 싹 갈아치울 겁니다. 전부 베어 죽여서라도. 그러니까 쉘터를 싫어하는 사람들 모임 있죠? 거기 안내 좀 해주세요. 좀 도와드리려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우진이 파릇하게 웃었다. 마치 마당의 잡초를 뽑아내야겠다는 듯 무심하게, 그는 쉘터의 체제를 전복시키겠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