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2) >
의자에 앉은 지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정말로 빌어먹을 상황이었다. 기억을 잃고 깨어나 보니 모르는 여자의 사역마, 말이 사역마지 목숨을 저당 잡힌 노예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불평할 수가 없었다. 죽어가던 것을 살려낸 것이니 살려낸 게 불만이면 자살하라는 게 벨의 주장이었다. 빈틈 없이 강고한 논리였다.
‘뭐 이건 밤중에 몰래 도망칠 수도 없고.’
그야 당연했다. 자신은 지금 벨의 사역마였다. 벨과 멀리 떨어지는 순간 마력의 연결이 끊겨 죽어버릴 것이다. 엄밀히 말해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상태였다.
지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쉘터까지 오는 도중 잠깐 본 정도지만, 벨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길만 걸어도 괴물들이 습격해오는 세상에서 그런 강자의 일행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한 행운이었다.
‘개뿔이.’
목줄이 걸려서 사역마가 돼버렸는데 그거 참 행운이다. 그렇게 자조하고 있으면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지수를 바라보았다. 근엄한 표정의 중년 남자는 의회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 쉘터의 지도자쯤 되는 것 같았다.
“별일이군. 마녀가 동행을 데리고 오다니.”
“동행 아니거든. 내 사역마거든.”
의회장의 말에 벨이 정정했다. 그 말에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하려 드는 것처럼, 기분 나쁜 시선이 지수 쪽을 향했다. 쿵!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쳐, 시선을 끊어내고 주의를 집중시킨 것은 벨이었다.
“뭐. 불만 있어? 조련사 님께선 애완동물에 깐깐하시나?”
의회장을 쏘아붙이는 벨의 목소리는 완전히 시비조였다. 진정하라는 듯 양손바닥을 내보인 의회장이 말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천하의 백마녀가 거둔 사역마 치고는, 딱히 큰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의회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감시병한테 들었다. 또 괴물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만 했다더군? 불살의 마녀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말이야.”
말하는 목소리에선 가시가 느껴졌다. 이유야 짐작이 갔다. 바깥의 괴물이 죽으면 그만큼 이곳을 위협하는 적이 줄어드는 것이다. 죽일 수 있는데 굳이 제압만 하고서 떠났다는 건, 쉘터 입장에서 충분히 아니꼽게 여길 수 있는 일이었다.
“너는 의도적으로 마물을 살려줬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곳 쉘터를 간접적으로 공격한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쓸데없는 곳에 힘 쓰기 싫다는데 웬 참견질이야? 마음에 안 들면 지금 당신이 나가서 마무리를 하든지.”
“흠. 리스크를 지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군.”
의회장이 깍지를 낀 채 대답하자, 벨이 코웃음을 쳤다.
“리스크를 지기 싫다라. 그러신 분이 왜 지하에 별의 별 마물들을 다 꽁꽁 감춰두고 계세요. 쉘터에 사는 사람들도 강제로 끌고 가서 실험하고 그런다며? 진짜 대단하다. 당신 같은 미친놈도 흔치 않은데. 걔네들 풀려나면 어쩔 생각이야?”
“모든 건 더욱 튼튼한 안보를 위해서다.”
대놓고 싸움을 걸어도 의회장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척 보기에도 엄청난 철면피였다. 앉아있는 지수가 입술을 이죽였다. 저런 식으로 되도 않는 명분을 갖다대며 제 뜻대로 쉘터를 쥐락펴락하고 있겠지. 엮이기 싫은 인간상이었다.
이내 큼큼 헛기침을 한 의회장이 벨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널 부른 것도 사실이다.”
“쓸데없는 거 싹 빼고 본론만 말해.”
“실험체 하나가 빠져나갔다. 흡혈귀의 인자가 폭주해버려서 말이야. 인간을 먹어치우려고 혈안이 되어있겠지. 먹잇감의 냄새도 민감하게 맡을 테고, 쉘터 바깥에서 숨어사는 몇몇 쥐새끼들은 이미 발견당해 몰살당했을지도 모르겠군.”
덜커덩. 난폭하게 의자에서 일어난 벨은 의회장의 멱살을 쥐었다. 벨의 얼굴은 확연한 분노로 일그러져있었다.
“너, 설마 일부러…!”
쉘터 바깥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그런 지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남아가며 버티는 이들은 두 종류였다. 가진 게 없어 쉘터에의 입주를 거절당했거나, 스스로 쉘터를 박차고 나왔거나. 후자는 쉘터 측과 적대하고 있는 반동분자 세력이었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위협은 아니지만, 가만 놔두기에도 영 꺼림칙한 놈들이다. 그들을 청소하기 위해 일부러 괴물을 풀어줬을 가능성이 있었다. 대충 정리가 끝났겠다 싶은 타이밍에, 빠져나간 실험체를 회수할 심부름꾼을 불러내고.
충분히 가능한 추리였다. 하지만 의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지 말아. 뭐, 네가 여기까지 오는 시간 동안 귀찮은 놈들이 정리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인정하지. 하지만 실험체가 빠져나간 것 자체는 단순한 실수야.”
차근차근 해명하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얄미웠다. 벨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죽일 듯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벨의 두 손을 조용히 떼어냈다. 그리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이쪽이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손에 넣고 싶은 게 있겠지? 실험체를 처리해주면 요청한 물건을 넘겨주지. 생포하든 죽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의회장과 벨의 시선이 몇 초간 교차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벨은, 휙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방을 걸어나갔다. 이야기가 끝났다면 남자의 얼굴 따위 일 초도 더 보기 싫다는 태도였다. 지수는 사역마답게 조용히 벨의 등 뒤를 따라나섰다.
복도에 나온 지수가 담담히 감상을 말했다.
“한 대 패고 싶은 인간이군.”
그 말에 벨이 동감한다는 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러했다. 이내 벨이 지수를 휙 노려보며 말했다.
“칭찬해, 지스.”
“뭐?”
“사역마답게 주인님을 칭송하란 말이야. 저런 녀석이랑 얼굴을 맞대고도 폭력의 유혹에 굴하지 않았다고.”
지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찬사를 보내기엔 너무나 미묘한 내용이었다. 그녀 또한 정말로 칭찬해주길 바라고 내뱉은 말은 아닌 듯했다. 벨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벨을 따라서 걷는 지수는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약점이라도 잡혀있는 건가.”
“비슷해. 꼭 손에 넣고 싶은 물건이 저 녀석한테 있거든. 그걸 받아낼 때까지는 저쪽 좋을 대로 휘둘려줄 수밖에.”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는 건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거 없지. 이 쉘터에 있는 가디언이 전부 다 한꺼번에 덤벼도 날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어때. 주인님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 피식 웃은 벨이 팔꿈치로 지수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지수는 벨을 빤히 바라보았다. 빼앗을 수 있으면 그냥 빼앗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질문을 하자, 벨이 담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다간 이 쉘터가 무너질걸.”
온갖 부조리가 판치는 곳이라고 해도, 쉘터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는 공간이었다. 의회장을 비롯한 가디언들이 있기에 이곳이 성립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벨이 의회장을 박살내고 쉘터를 초토화시키면 거주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 말에 지수가 입가를 이죽였다.
“참 여유도 많으시군. 기특하게 남들 생각도 해주시고.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갖고 싶은 물건은 아닌 모양이지?”
“그 반대야, 지스.”
복도를 걸어가는 벨은 웃으며 지수를 돌아보았다.
“꼭 가지고 싶은 물건이니까 그런 거야.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손에 넣으면 의미가 퇴색되잖아.”
지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가치관에 태클을 거는 것도 주제 넘는 일이었다. 의회장과 이야기한 건물에서 나오자, 여기저기서 이쪽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부분 강한 악의가 담겨있는 눈빛이었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벨은 나쁜 의미로 유명인인 것 같았다.
“마녀년.”
“저 여자 때문에 우리 남편이 죽었어.”
“몬스터랑 내통하고 있는 거야.”
속닥이는 소리는 노골적이었다. 그것만으로 끝났으면 괜찮았을 텐데, 어디선가 휙 돌멩이가 날아왔다. 벨은 익숙하다는 듯 마력으로 보호막을 쳐 날아오던 돌멩이를 튕겨냈다. 지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이건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뭔데 이거.”
“흔한 이야기지, 마녀가 미움받는 건.”
벨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는 몇 가지쯤 있었다. 힘이 있음에도 쉘터의 가디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것. 몬스터들을 굳이 죽이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 벨이 결코 반격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에 한몫 거들었다. 지수는 상황에 큰 불쾌함을 느꼈다.
“왜 가만 놔두는데.”
“돌멩이 좀 던졌다고 사람한테 마법을 쓸 수는 없잖아. 어차피 저 사람들도 안 맞을 걸 알고서 던지는 거고.”
벨의 말에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이쯤 되면 답답한 것을 넘어서 그냥 웃길 지경이었다. 한쪽은 자기들 걱정해주느라 싸움 걸고 싶은 것도 꾹 참고 있는 인간한테 만만 하다 돌을 던지고 있고, 한쪽은 그들이 힘든 것도 이해해줘야 한다며 제 쪽에서 변호를 해주고 있었다.
자신은 방금까지 벨을 호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건 단순한 호구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병자였다. 그것도 상당한 중증이다. 지수와 벨은 팅팅 튕겨 나가는 돌멩이 소리와 함께 쉘터 밖으로 나왔다.
황야를 걷고 있으면 또다시 거대한 지네들이 튀어나왔지만, 벨은 죽이지 않고 정신만을 잃게 만들었다. 지수가 왜 굳이 몬스터를 죽이지 않으려 하는 거냐고 묻자 벨이 대답했다.
“그냥 살아있는 걸 죽이는 게 싫어.”
딱히 불살주의 같은 윤리적 신념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살아있는 걸 죽이면 기분이 더러워지니까 안 죽인다. 그 정도의 목소리였다. 굳이 살충제를 뿌려 벌레를 죽이기보단 방 밖으로 나가게 놓아준다. 비유하자면 그러한 감각이었다.
취향이라는데 뭐 어쩔 것인가.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그 실험체인지 뭔지는 어떻게 찾을 거지?”
“근처에 알고 있는 캠프가 몇 군데 있어. 그쪽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설마 흡혈귀 실험체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테고.”
걱정되는 건 이미 당해서 시체만 남아있다는 경운데.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던 벨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겠지. 캠프에도 꽤 실력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벨의 말에 따르면,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설비를 갖추고 있는 쉘터와는 달리, 바깥의 캠프들은 폐허가 된 건물들을 뒤지거나 하며 필사적으로 생존해나가고 있다고 했다. 은신처는 당연히 최대한 몬스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잡는다.
확실히 캠프의 출입구는 교묘하게 숨겨져있었다. 미리 알고 있지 않는 이상 우연히 찾아낼 수는 없는 위치였다. 은신처의 안쪽에선 수 많은 철제 컨테이너들이 밀집해있었다.
두 사람을 맞이해준 것은 마른 실루엣의 남자였다.
“여, 늑대.”
“벨인가. 또 ‘물물교환’이냐?”
흑발의 남자는 단련된 칼날처럼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늑대라고 불린 남성. 그가 이 생존자 캠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인 듯 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는 이전에 쉘터의 가디언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했다. 벨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 정보를 원해. 근처에서 흡혈귀가 날뛰고 있었지? 조련사 놈이 만든 거야.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벨의 이야기를 들은 늑대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가 쉘터를 나온 이유는, 쉘터의 안전을 확보한답시고 주민들을 실험체로 삼는 의회장의 기행에 질려서였으니까.
“이런 곳에 흡혈귀라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어디 있는 줄 알아?”
“대충 짐작은 가. 멀리서지만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한동안 그쪽은 일부러 피해다녔으니 지금도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흡혈귀의 생태대로라면 자기 거처를 만들었겠지.”
이내 팔짱을 낀 채 말하고 있던 늑대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역시 그냥은 알려줄 수가 없어.”
쉘터에서 버림받은 이들. 그들은 언제나 식량이나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폐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입장이었다. 요 주변 지역의 정보라고 한다면, 양으로든 질으로든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료들의 목숨으로 그려낸 피의 지도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벨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위험한 걸 처리해줄 테니 공짜로 정보를 내놓으라고 할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야. 충분한 값을 쳐주겠어.”
이내 벨의 등 뒤에서 신비한 색의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그러자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식수와 식량, 의약품 같은 생활필수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늑대는 그걸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몇 번쯤 보았던 광경인 듯 했다.
물건들을 살펴본 늑대가 벨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군. 솔직히 네가 때맞춰 찾아와주지 않았으면 위험했을지도 몰라. 섣불리 바깥으로 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하지만 지금 벨에게 받은 자원이 있으면 몇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다. 퀭한 눈이었던 캠프 안의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수는 뒤에서 그 광경을 인상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짓을 보면 마녀가 아니라 아주 성녀였다.
경의를 표하는 듯이, 늑대가 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최대한 빨리 해결해볼게.”
실험체의 추정 거처를 알아낸 벨은 곧장 가르침받은 위치로 향했다. 일 초라도 빨리 일을 해치우고 원하는 물건을 받아내고 싶은 듯했다. 위험한 분위기가 풀풀 풍겼지만, 벨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아 흡혈귀 정도라면 낙승인 듯 했다.
“지스. 한 번 실전 경험을 해보는 건 어때? 죽을 것 같으면 싸우는 법이 떠오르겟지. 위험해지면 내가 나설 테니까.”
이런 말까지 하는 판이니 말 다 했다. 지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캠프의 늑대가 알려주었던 곳으로 가자, 확실히 괴물의 것으로 보이는 영역표시가 난폭하게 휘갈겨져 있었다. 폐건물의 벽과 바닥 곳곳에 거대한 칼로 베어낸 듯한 커다란 손톱자국이 박혀있다. 콘크리트가 통째로 뜯어져나간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걷기만 해도 튀어나오던 괴물들이 이곳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명백했다. 같은 괴물들조차 두려워하는 무지막지한 괴물이 이 주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벨은 여유라는 듯 느긋하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영역 안에 들어왔으니, 대충 걸어다니기만 해도 저쪽에서 알아서 나타날 거야. 흡혈귀는 그런 것에 되게 민감하니까.”
“이길 수 있나?”
“그냥 평범한 흡혈귀면 몇 마리가 덤벼도 낙승이지.”
벨은 건물 곳곳에 새겨진 흉흉한 흔적들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아무래도 벨은 지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이내 뒤쪽 저편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뻗쳐왔다. 겉으로 보기에 그건 한 명의 여자아이였다.
연분홍색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는 소녀. 하지만 멀리서 보고 있기만 해도 온몸이 찌릿찌릿 떨리는 게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경보가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다. 이쪽에는 벨이 있었다. 지수는 어깨로 벨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엄청 세보이는데. 이길 수 있지?”
분명 흡혈귀라면 몇 마리가 덤벼도 낙승이라고 말했을 터. 하지만 벨은 눈썹을 떨면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보세요. 벨 씨. 대답 좀 해봐요.”
"...망했다.”
저거 흡혈귀 아니야. 혼잣말처럼 흘린 벨의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흡혈귀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고개를 돌린 벨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떨떨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목소리는 표정과 달리 반쯤 울먹이는 채 떨리고 있었다.
“저거 용왕이야….”
연분홍색 머리칼의 여자가 새까만 흑룡의 날개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