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1) >
지수는 꿈결 같은 어둠에 가라앉고 있었다.
언제까지 빠져드는 것인지, 얼마나 떨어져야 끝이 보이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루드비히가 품고 있는 절망의 깊이였다. 의식의 침범은 천천히 지수의 자아를 덮어갔다. 모든 것을 잊고서, 루드비히가 연출한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암전.
새까맣게 막혀있던 시야가 하늘하늘 흔들린다. 이윽고 지수는 그것이 무대의 커튼이 나풀대고 있는 것이라 알 수 있었다. 호리존트의 전등들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한다. 극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앙코르의 박수와 환호 소리였다.
그러한 박수갈채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인영이 하나.
새까만 망토와 화려한 문양의 가면. 오페라 배우를 연상시키는 루드비히의 복장은, 극장의 배경과 완벽히 맞물렸다. 무대 앞에 서있는 과묵한 광대가 천천히 독백을 시작했다.
<이것은 최악에서 시작해, 더욱 최악으로 치닫는 동화.>
오르간의 반주가 내려앉는다. 한 남자가 무대에 난입하지 않은 것만으로, 각본은 비틀리고 공연은 엉망진창.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고,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결말은 정해져 있어서, 종막에는 기계장치의 여왕이 내려와 모든 배역을 평등하게 죽여버리는 희대의 공포극(Grand Guignol).
<그러면, 상연해보도록 하자.>
주연 배우, 이지수.
제작과 연출,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한 명뿐인 관객은 곧 한 명뿐인 배우였다. 커튼이 양쪽으로 갈라져간다. 지수는 왕이었던 자신을 잊었다. 그야 연극이 시작되면 배우는 그 역할이 되어, 무대에 몰입하는 것이 도리였다. 극장 어디선가 그리운 오프닝 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노예가 신분을 역전해 왕이 되는, 뻔하디 뻔한 신파극.”
무대에 선 광대가 노래를 부르듯이 타이틀을 독백했다.
<출세의 이야기>.
개막.
***
눈을 떴을 때 지수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지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누운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지수는 자신이 지금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리자, 창밖은 황폐한 풍경이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고원. 그곳에 빌딩들의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다. 박살이 난 시가지와 사막을 반반 비율로 뒤섞어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걸 보고도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원래부터 그것이 당연한 형태인 것처럼.
그때, 한 여자가 불쑥 방 안에 걸어들어왔다.
“깨어났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방 안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다 무너진 건물들의 폐허만이 있었지만, 지수가 누워있는 방은 금간 곳 하나 없이 말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가온 여자가 지수에게 말했다.
“몸 상태는 어때? 슬슬 회복됐으려나.”
여자가 지수에게 따뜻한 물을 내밀었다. 들고 있는 컵은 아기자기한 머그컵이었다. 바깥의 황폐한 풍경과 대비되는 귀여운 소품에 따라가지 못하고, 지수가 눈을 연신 끔뻑였다.
“회복이라고.”
“그래. 다 죽어가고 있었잖아, 피범벅이 돼서.”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요만큼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팔이나 손을 움직여보면 확실히 움직임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제 막 회복한 환자처럼 몸 전체의 관절이 삐걱이고 있었다. 떠오르지 않는 건 부상을 입은 이유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도, 자신이 무엇을 하던 인간이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리지 못하게 일부러 누군가가 막아둔 것처럼. 이내 지수의 코앞에서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여기 이게 뭐 하는 물건인지 알겠어?”
여자는 자신이 들고 있는 머그컵을 작게 흔들었다. 지수가 상념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고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게 뭐 하는 물건인 줄 알고 있냐니. 지수는 불쾌하다는 듯 질문의 대답을 툭 내뱉었다.
“컵. 액체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받쳐주는 도구.”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컵을 건네주었다.
“상식 부분은 멀쩡한 모양이네. 말도 통하는 것 같고.”
“다른 부분은 멀쩡하지 않다는 걸 아는 말투인데.”
“그야 뭐, 죽기 직전인 걸 억지로 고쳐놨으니. 누더기를 기워붙인 거나 마찬가지니 사소한 고장들은 감안해야지.”
말한 여자는 한 건 해결이라는 듯 쭉 기지개를 폈다.
따뜻한 물을 홀짝이며, 지수는 조용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정신을 차려보자 자신은 기억상실에 걸린 채 어딘지도 모를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나타난 이 여자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간호해준 것 같았다.
말하자면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감사인사를 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죽어가고 있으면 그냥 죽게 냅두지 왜 멋대로 구해서 빚을 지게 만드냐, 하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여자의 목숨을 구해줄 때까지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런 불평을 내뱉으려 하자, 여자는 이미 성큼성큼 방에서 나가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여자가 지수를 돌아보았다.
“뭐 하고 있어? 안 따라오고.”
행동이 굼뜬 부하를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깨를 으쓱인 지수는 컵을 든 채 쫄래쫄래 여자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오자 서있었던 건물은 빛의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신기루나 환상이 아니었다. 지수는 분명히 건물 안의 침대에 누워있었을 텐데. 지수가 휙 돌아보자 여자가 말했다.
“사라진 게 아니야. 아지랑이의 성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내 주변에 허상인 채로 떠다니고 있지. 이런 세상에선 엄청 편리하긴 해. 잠 잘 곳을 확보하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여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별 거 아니라는 듯한 어조 반, 어때 대단하지 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어조 반이 섞인 목소리였다.
지수는 굳이 반응해주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오자 황야의 모래바람이 따가웠다. 그걸 알고 있는지, 앞서 걷는 여자가 뒤쪽의 지수에게 방진 마스크를 건네주었다.
“어때, 친절하지?”
“그래.”
마스크를 받아 쓴 지수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야를 걸으며 얘기하자니, 그녀의 이름은 벨이라고 했다.
“종소리?”
“그냥 별명 같은 거야. 이래 봬도 신비주의거든.”
웃고 있는 표정에는 자조가 담겨있었다. 그러는 그쪽의 이름은? 뒤통수에서 질끈 묶은 벨의 은발이 흔들렸다. 지수는 조용히 앞머리를 만졌다. 자신이 뭘 하는 인간이었는지 요만큼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만큼은 똑똑히 기억났다.
“…이지수.”
“이지스? 이지스라면 신화 속의 방패잖아. 멋진 이름인걸.”
“이지스가 아니라 이지수.”
“좋아, 지스.”
이제 보니 이 아가씨는 남의 말을 안 듣는 성격이었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겠어?”
벨의 질문에 지수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자신은 지금 앞서나가는 벨의 등 뒤만을 졸졸 따라 걷고 있는 중이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이내 뒤돌아본 벨이 정답을 말해주었다.
“쉘터야.”
“그래.”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쉘터라고 하면 그것이었다. 무엇인가의 위험에서 대피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피난소. 그 단어를 듣자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져가는 느낌이었다. 아까 건물들의 상태를 보니 이곳에서 커다란 지진이라도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벨은 그런 재난지대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있던 자신을 구해내, 피난민들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려는 것이었다. 납득한 지수는 등 뒤를 돌아보며 슬픈 감상에 젖었다.
“엄청난 지진이었나 보군. 저만큼이나 부서졌으면 건물들을 다시 세우는 데에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는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시를 재건해야 할 거 아니야. 계속 쉘터에서 살 수는 없을 테고. 다른 지역에서 구호금 같은 걸 보내줄 테니….”
지수는 말을 멈추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벨의 얼굴이 엄청나게 미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되는 괴상한 헛소리를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조금 더 단적으로 표현하면 벨은 지수를 정신병자처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그야 이상하지. 뜬금없이 무슨 지진 얘기야?”
이번엔 지수가 어리둥절할 차례였다. 돌아보면 폐허가 된 시가지의 잔해들이 있었다. 저런 형태로 건물들이 무너질 만한 일이라고 하면 지진 정도밖에 없지 않은가. 설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태풍이 불어제꼈다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게 말하자 벨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뭐야, 상식 쪽 기억은 멀쩡한 거 아니었어? 완전히 백치가 되어버렸잖아. 지진 같이 느긋한 소리나 하고 앉아있고.”
“…“
지진 때문이 아니라고? 그러면.”
“그러면이고 뭐고, 몇 초만 있으면 알 수 있을걸.”
이내 벨은 작게 입술을 움직여 초를 세기 시작했다. 오, 사, 삼. 갑자기 무슨 숫자를 세고 있냐 물으려는 순간, 쿠르릉대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땅바닥이 진동하고 잇다. 이, 일. 그리고 황야의 모래가 폭죽처럼 크게 터져올랐다.
“제로.”
동시에, 벨이 지수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힘껏 내던졌다.
지수의 몸이 황야의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지수가 있던 자리에서 튀어나온 것은 엄청나게 커다란 지네였다. 흉악한 턱은 사람은 물론이요 웬만한 맹수들조차 단숨에 씹어먹을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지수는 멍하니 지네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지수에게 벨이 지네를 턱짓하며 말했다.
“쉘터는 이런 것들을 피하려 만들어진 거야.”
이쪽을 향해 내뿜고 있는 맹렬한 살의. 웬만한 총탄마저 가볍게 튕겨낼 듯한 갑각. 어딜 어떻게 봐도 자연 발생한 종이 아니었다.
하 지만 꿈틀대며 먹잇감들을 내려다보는 지네 괴물을 보고서도, 벨은 요만큼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벨이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자, 짤랑 하는 방울 소리가 울렸다.
이내 지네는 돌연 의식을 잃고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지금 뭘 한 거지?”
“마법.”
벨이 담담히 대답했다.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경악을 느낀 것은 그 능력 자체가 아니라 벨의 태도에서였다.
저것은 괴물을 한두 번 상대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벨은 어떻게 해야 최대한의 효율로 지네 괴물을 제압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마치 숙련된 캠핑가가 벌레들을 가볍게 내쫓는 것처럼, 익숙하고도 유려한 동작이었다. 이내 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마 저런 게 일상적으로 튀어나오는 건가?”
“한 시간 뒤면 경험으로 알게 될걸.”
지수는 곧바로 벨의 뒤를 따라붙었다. 저러한 괴물들이 당연하게 튀어나오는 곳에서 기억상실인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벨의 보호는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둘이서 걷고 있으면 끊임없이 괴물들이 습격해왔다. 거의 일 분에 한 번씩 나타나는 꼴이었다. 벨은 그 모든 괴물들을 아주 간단히 제압했다.
이내 걸어가는 벨이 지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슬슬 기억났어?”
“뭐가 기억났냐는 거지.”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방법 말이야.”
벨이 아마추어처럼 왜 그러냐는 듯이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저 영문을 몰라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는 상당히 뛰어난 능력자였을 텐데. 그러니까 일부러 수고를 들이면서 살려낸 거고. 기억은 지워졌다 해도, 몬스터들을 보면 몸에 새겨진 본능 같은 게 꿈틀거리지 않아?”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저런 괴물들이랑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그럴 리 없었다. 기억 같은 게 돌아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전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그 반응에 벨이 곤란하다는 듯 뺨을 매만졌다.
“큰일이네.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스스로 살아남을 힘이 없는 자들은 도태될 뿐. 그러한 세상이었다. 인간이 괴물의 먹이로 소비되는 시대.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녀 입장에서 보면 지수는 생판 모르는 남인데,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한 기분이었다.
“저게 쉘터인가.”
걷고 있던 지수가 저편의 구조물을 가리켰다. 쉘터라고 하면 괴물들 눈에 띄지 않도록 지하 같은 곳에 숨겨져있을 줄 알았는데, 폐허 가운데에 돔으로 감싸여 있는 거주구는 오히려 존재를 과시하는 듯이 보였다. 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디언들이 지켜주고 있어서 안전은 꽤 보장되지만, 솔직히 그리 살 만한 곳은 못 돼. 지켜주고 있다는 핑계로 가디언 놈들이 주민들한테 별의별 짓거리를 다 하고 있으니까.”
“너는 쉘터에서 지내지 않는 건가?”
“내가 왜 저기서 살아? 아까 우리 집 보여줬잖아. 저 안에서 생활했다간 하루도 안 가서 혈압 터져 죽을걸.”
벨의 얼굴에 떠오른 건 경멸의 표정이었다. 그 놈들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하는. 지수는 쩝 입맛을 다셨다. 대충 견적이 나오기는 했다. 저런 폐쇄적인 사회에 초인적인 힘을 지닌 인간들이 존재한다면, 자연히 그들이 권력을 잡게 되겠지. 견제하는 세력이 없으니 점점 폭주하게 될 것이고.
이내 두 사람이 쉘터 가까이 도착했다. 문 앞에선 위병이 대기하고 있었다. 지수가 마스크를 내려 턱 아래에 걸쳤다.
“이제 헤어지는 건가.”
지수는 작게 콧숨을 내쉬었다. 벨은 생존자인 자신을 쉘터에 데려다주기 위해 안내해준 것일 뿐, 이제는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 것이다. 헤어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목숨을 구해준 빚을 제대로 갚지도 못했는데 도망치다니.
하지만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걸로 끙끙대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다. 마음을 정리한 지수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인의 이름은 잊지 않겠어.”
사실은 불안이 앞서기도 했다. 어찌 됐든 기억이 없는 상태니까. 잠깐 동안의 보호자였던 벨과 헤어지고, 이제부터는 쉘터 안에서의 생활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자신은 애초에 한 번 죽은 목숨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슨 곤란에 처하든 본전치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벨이 뚱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
벨이 짝 손바닥을 치자, 지수는 갑자기 격통을 느꼈다. 땅바닥에 쓰러진 지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멈춘 느낌이었다. 아니, 보다 근원적인 생명력의 흐름이 끊겨버렸다.
“죽어가던 네 몸을 내 마력으로 메꾼 다음 통째로 재구성했어. 나한테 마력을 공급받지 않으면 바로 죽어버린다고.”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지수는 자신의 처지를 체감했다. 지금 자신은 하나의 로봇이었다. 벨에게 마력을 공급받는 콘센트가 끊기면 얼마 안 가 작동을 중지해버리는 로봇. 벨은 자신의 목줄이 아니라 생명줄을 잡고 있었다.
“사역마라고 알아?”
“사역마….”
“지금 네 상태가 정확히 그거거든.”
지수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랬던 것이다. 벨은 애초에 지수를 맡기러 쉘터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용무가 있었을 뿐. 지수를 보며 제 앞가림쯤은 해야 할 텐데 하고 곤란해하던 것 또한, 딱히 지수가 걱정되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여차할 때는 사역마가 주인인 자신을 지켜줘야 하니까.
“한마디로 말해, 내 노예라는 뜻이지.”
벨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쓰러진 지수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