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열심히 달려온 당신에게 (3) >
어떤 예고도 없이 작렬한 주문에 루드비히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벽에 던전의 경계에 등을 부딪친 루드비히가 고개를 들었다. 경악한 것은 상처를 입었다는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지수의 등 뒤에서 돌아가고 있는 칠흑의 마법진.
‘허세가 아니야. 정말로 해석했다.’
저 마법진은 브로켄의 유령이었다. 아직 여기저기 삐걱이고 있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건 차차 사용하면서 개량해가면 되는 수준이었다. 충분히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다.
그야 그럴 만한 소질은 있었다. 같은 계통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데다, 해석이란 애초에 남의 기술을 분석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진 능력. 어떻게 마녀의 마도까지 익히고 있는 것 같으니, 루드비히의 마법진을 베꼈다고 해도 단지 놀라울 뿐 이상하다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빠르다. 루드비히가 경악에 빠져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상대방을 파악하려 들고 있었던 건 지수만이 아니었다. 루드비히 또한 지수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스피드로 학습하는지, 어느 정도의 영역까지 해석할 수 있는지. 전부 염두에 두고 이쪽의 패를 내보인 것이다.
계속해서 공격한다면, 브로켄의 유령이 해석당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상정하고 있던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같은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러한 관점의 유사성이 루드비히의 기술을 순식간에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야.'
루드비히는 일거에 부정했다. 지금 지수가 보여준 해석 속도는 그런 수준을 한참 뛰어넘어있었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비슷하다느니, 온 힘을 다해서 집중했다느니 하는 사소한 이유로 생겨날 수 있는 변화가 아니었다. 결국 결론은 한 가지.
“하드웨어의 변화인가.”
벽에서 몸을 일으킨 루드비히가 망토의 먼지를 털었다. 능력 자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의 가능성을 전부 열어제낄 수 있을 만큼 하드웨어의 성능이 좋아졌다. 해석 또한 그만큼 고차원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지수는 용왕을 초월한 용왕. 그 오감은 초인의 수준마저 뛰어넘었을 정도로 민감하고 선명하게 세상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감각과는 이미 한참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집중하면 저편의 산에서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오감뿐만 아니라 흔히들 육감이라 부르는 것 또한. 단순히 만질 수 있는 것만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의 흐름, 형이상학적인 개념. 그리고 어쩌면….
“재밌군.”
일어난 루드비히는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이봐, 당신. 이쪽이 공격권을 잡고 있는 거란 말이야. 지금도 바로 쏠 수 있어! 조금쯤은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라고.”
“쏘면 되겠지.”
발끈한 지수가 주문을 발동했다. 이쪽이 유리한 것 같다고 해서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루드비히와의 싸움에서, 아마도 처음으로 잡은 주도권이다. 이때 몰아치지 않으면 저 속 모를 양반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수가 발현시킨 주문은 전부 루드비히의 몸에 닿는 순간 그대로 증발했다. 마력으로 상쇄하거나 보호막을 친 게 아니었다. 일어난 것은 훨씬 더 고차원적인 작용이었다.
“불의의 기습은 좋았다만, 그 한 방으로 끝냈어야지.”
루드비히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걸음을 계속해, 이내 저 위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계단 앞을 막아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발현시킨 무형주문은 한 발, 한 발이 예전에 지수가 다루던 용언마탄과 비슷한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만일 지수 자신이 방어에 모든 마력을 쏟았다고 해도, 상처 없이 막아내는 건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수의 말에 루드비히가 대답했다.
“위력이 아니라 격 자체의 문제다. 나는 마왕이야. 적어도 용언 수준이 아닌 이상, 단순한 마법쯤은 증발시킬 수 있지.”
마왕의 포고령. 공격당한다는 자각조차 없이 불의의 기습을 당하지 않는 이상, 단순한 마법은 루드비히의 몸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파사의 마력의 몇 단계나 위에 위치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부터 이 계단을 올라갈 거다.”
루드비히는 엄지를 세워 자신의 뒤쪽에 이어지고 있는 계단을 가리켰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었다.
“내 수기에 쓰지 않았던 내용을 지금 말해주지.”
지수가 공격하려던 순간, 마치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루드비히가 말했다. 지수는 움찔 움직임을 멈추었다. 루드비히의 수기. 모든 S급 던전들에 대한 정보가 쓰여있던 공략집. 그것 덕분에 S급 던전들을 전부 클리어하고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세계를 부수는 망치.”
“그래. 설명은 쓸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했었지.”
왜냐하면 그곳에 도달했을 즈음에는 루드비히 본인이 앞에 있을 테니까. 예언은 적중했다. 지금 지수는 세계를 부수는 망치에 도달했고, 루드비히는 지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지수는 어떠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곳은 던전일 텐데.
보스 몬스터도 던전의 기밀이라 할 것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저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는 듯한 계단 하나뿐. 그리고 루드비히는 지수에게서 등을 돌리고 계단을 향했다.
“S급 던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 적 있었나?”
여왕이 삼켜 소화한 모든 기록들 중에서도, 세상을 멸망시킬 만한 가능성이 있던 기록들. 정말 조그마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있으나, S급 던전의 심층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보다 확실히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가능성이다.
이를테면 환상의 회랑. 종말의 풍경을 그리고 싶기에 세계의 온갖 존재들을 그림으로 만들어 그 힘을 취했던 엔드로우는, 얼마 안 가 정말로 세계를 멸망시켰을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왕들의 묘소. 용왕들은 하나하나가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대재앙이다. 그들이 함께 날뛴다면 세상을 멸망시켜 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S급 던전인 이곳은 대체 어떤….
생각하고 있던 지수는 아, 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 애초에 이름에서부터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성질이니 구조니 해석할 필요도 없이, 이름에서부터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던전의 이름은 세계를 부수는 망치. 루드비히가 말을 이었다.
“이 끝에 있는 건 사상 최강의 아티팩트다. 그걸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여왕에게 먹혀버리는 것보다 먼저 아주 깔끔하게, 흔적도 남지 않도록 이 세상을 깨부술 수 있지.”
“당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고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너를 보고서 생각한 거다. 내가 세상을 멈추려고 해봤자, 어떤 식으로든 네가 방해한다. 여왕은 봉인에서 풀려났고, 날뛰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얼마 안 가 세상은 여왕에게 잡아먹혀 영원히 그녀의 양분이 되어버리겠지.”
그리고 루드비히는 길고 긴 계단을 한 걸음 올라갔다.
“물러터진 방법으로는 안돼. 그렇다면, 차라리 비참한 꼴이 되기 전에 먼저 산산이 부숴버리는 게 이 세상에 대한 구원일 거다. 이게 더 마왕에게 어울리는 방식이지 않나?”
지수는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와라, 스나크. 내가 이 무대의 악역이다.”
저건 거짓말이다. 본심이 아니다. 지수는 알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 애착을 품고 있다. 그런 세상을 자기 손으로 부수겠다니 당연히 허세인 게 분명하다.
멈춘 세상 속에서 루드비히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곳은 오히려 그 누구도 세계를 부수는 망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전부 무언가의 목적으로 지수를 속이기 위한 기만이다.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수의 심상해석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진심이다.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자신이 계단 끝까지 올라갈 경우 정말로 망치를 휘둘러 세계를 부술 생각이었다. 실행하지 않을 거라면 협박은 의미가 없으니까. 정말로 저지를 생각이다. 막아야 한다. 막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 미쳤어?”
“너랑 나는 닮은꼴인 줄 알았다만, 이제 보니 완전히 정반대였던 모양이야. 서로가 서로를 보고 미쳤다고만 하는군.”
루드비히는 코웃음을 치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지수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등 뒤의 마법진에서 용왕들의 영혼이 각자의 색을 내뿜었다. 빚어진 용언은 하나의 룬이 되어 지수의 주변에 맴돌기 시작했다. 막을 자신은 있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이쪽은 루드비히의 힘을 해석할 수 있었다.
지수가 루드비히의 뒤를 뒤쫓아 계단을 올라갔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보팔의 검은 하나의 대검으로 변했다. 마검 밴더스내치. 용사의 힘을 머금은 검이 황금빛의 기운에 휩싸였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참격을 꽂아 넣어줄 생각이었다.
“그건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지수를 향해 몸을 돌린 루드비히가 칼날의 궤도를 읽었다. 그 또한 주변을 해석해 칼날의 궤도나 몸의 움직임 정도는 눈 감아도 훤히 읽어낼 수 있었다. 단순한 회피에 있어서 해석 능력은 거의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다. 공격을 맞추는 것이 전제인 김유성의 능력과는 상성상 유리한 면이 있었다.
검이 통하지 않으면 마법으로, 마법이 통하지 않으면 육탄전으로라도. 서로가 서로의 공격들을 능숙히 피해가며, 계단에서의 추격전을 벌였다. 정말로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던전의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용왕들의 용언뿐만이 아니었다. 정유현의 중력 능력과 서민하의 피의 무구, 흑마녀가 가진 흑마도.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그 자리에서 조합해 쏟아부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패를 숨기거나 할 단계가 아니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순수한 전력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얻어터지는 건 지수 쪽이었지만.
루드비히는 그것이 조금쯤 유쾌한 듯했다. 자신이 정말로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도, 버텨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좀 멈춰!”
“멈추지 않는다.”
입장이 반대가 됐군, 멈추라고 한 건 원래 내 쪽이었는데. 루드비히가 익살스런 농담이라는 듯 희미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지수의 얼굴에 루드비히의 무형주문이 작렬했다.
헤쳐나온 전장이 다르다. 전투에 있어서의 노련함이 다르다. 그런 탓에, 서로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빈틈을 허용하고 마는 것은 지수였다. 피투성이가 된 지수는 계단을 굴러떨어져 내려갔다. 하지만 곧바로 강제로 회복했다.
“거기 서라고!”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는 루드비히를 향해 뛰쳐 올라간다.
또다시 빈틈을 찔려 직격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굴러떨어진다. 곧바로 회복. 지수는 다시 루드비히에게 따라붙었다. 그런 과정을 한 번 거칠 때마다 지수의 실수는 점점 줄어들어 갔다. 지수는 루드비히가 싸우는 방식을 따라 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맞아서 굴러떨어지다 보면 학습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출수하는지, 공격을 거둔 것은, 여기서 파고들자고 판단한 것은 어떠한 의도인지. 경험이 쌓여 완성된 요령.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지수는 루드비히라는 존재를 조금씩 이해해나가고 있었다.
‘좀 더.’
이윽고 지수는 완전한 집중 상태에 다다랐다. 좀 더. 좀 더 루드비히를 깊게 이해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사고에 기초해서 행동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면 루드비히를 쓰러뜨릴 수 있다. 피투성이가 되어 계단을 굴러도 아무 느낌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루드비히 한 명에만 집중했다.
그것은 게임에 몰입하는 것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마치 몬스터의 패턴을 프로그래밍된 코드째로 훑어보듯이.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파악한다. 가져올 수 있는 것, 훔쳐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먹어치운다. 눈빛은 어느 때보다 게걸스러웠다.
‘심상해석.’
지수의 푸른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흩날렸다. 초월적으로 곤두선 감각은 심상해석 또한 폭주시켰다. 떠올리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아예 마음의 근간까지 읽어내버릴 정도로. 깊게. 더 깊게. 지수는 루드비히에게 몰입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지수의 손이 루드비히의 공격을 쳐냈다. 움찔하는 것과 함께, 지수가 루드비히를 향해 공격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노린 공격이었다. 지수는 조금씩, 루드비히에게 공격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맞았다기보단 스쳤다고 표현해야 할 공격이었지만, 아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루드비히의 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