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60화 (160/176)

160화.  < 열심히 달려온 당신에게 (2) >

지수의 도발에 루드비히가 코웃음을 쳤다.

“어이가 없군.”

실제로는 정곡을 찔렸는데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어이가 없어서 나온 헛웃음이었다. 그럴 것이 지금 지수는 용왕들의 혼을 품은 채로도 이렇다 할 반항 하나 못 하고 루드비히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중이었다.

지수는 아직 루드비히에게 치명타는커녕 제대로 된 유효타 하나 내지 못했다. 지수가 루드비히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 또한 전부 파훼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질까봐 겁먹었냐니. 단순한 허세다. 실소밖에 돌려줄 것이 없었다.

그럴 텐데. 그래야 할 텐데, 루드비히는 자신의 안쪽에서 기분 나쁜 초조함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넘어뜨리고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선다면, 이번에는 내 눈앞에서 확실히 멈춰주지. 일단은 손발을 뭉개둘까.”

루드비히의 등 뒤에서 새하얀 마법진이 회전했다. 브로켄의 유령. 저것은 하나의 극점에 이르른 기술이었다. 검술의 정점에 심검이 있다면, 루드비히의 무형주문은 마도의 끝이다. 더 이상 개량할 여지가 없는, 완전무결이라는 의미에서의 도달점. 발동 시간도 시전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마왕의 주문.

능력을 이용해 자동으로 해석할 수 있을 리 없다. 같은 계통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저 루드비히가, 이렇게 하면 간파당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내쏘고 있는 것이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실수로 빈틈 따위를 남겨놓는 남자가 아니었다.

루드비히가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진이 움직였다.

‘저건 페이크야.’

지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무형주문을 작렬시키기 전 꼬박꼬박 하고 있는 저 손가락 튕기기. 웬만해서는 저것이 주문의 발화점이라 생각하고 루드비히의 동작에 집중하기 십상이지만, 저것은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는 교란 행동이었다.

사실 의미 없는 페인트 동작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였다.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타이밍을 엇나가게 만들기 위해서, 이때다 싶을 때 저 동작을 해 상대방을 위축시키기 위해서. 교묘하다.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전황을 장악하는 데에 이어진다. 루드비히는 정말로 용의주도했다.

‘나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타입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인정할수 있게 되었다. 지수로선 결코 저 마왕의 빈틈없음과 교묘함에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도리를 뒤엎는 막가파로 나가는 것.

“뭐?”

공격한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번뜩 뜨였다.

무형주문이 지수의 몸에 작렬한 순간, 피부가 찢어지며 새빨간 피가 터져 나왔다. 지수는 루갈반다의 차단막을 덮어씌우는 일도 없이, 심지어는 자신의 마력을 몸에 갑옷으로 두르는 일도 없이 맨몸으로 루드비히의 주문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 대신에 지수가 펼친 것은 마력의 영역이었다. 자신의 몸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던 마력을 다시 안개처럼 흩어지게 만들어, 주변의 모든 상황을 감지해서 파악하려 들고 있다.

루드비히는 지수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깨닫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루드비히의 무형주문은 육안으로 포착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지수는 영역을 펼친 채로 용왕의 감각을 극도로 집중해, 감촉만으로 주문의 형태와 구조를 파악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몸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고서.

그건 솔직히… 미쳤다고밖에 할 수가 없는 짓이었다.

‘용사. 그놈이 쓸데없는 걸 불어넣어서….’

자기 목숨을 끊임없이 판돈으로 올려놓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온갖 칩들을 다 쓸어가려는 광기. 그 정도의 도박을 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는 상대에게 겁도 없이 덤비는 무모함. 스나크는 용사의 빌어먹을 부분만을 닮아가고 있었다.

“스나크. 죽을 생각이냐.”

“영광으로 생각해주지 그래….”

지수가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서는 회복의 룬이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회복의 룬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녹룡왕이 빚어낸 생명의 용언과 수룡왕이 빚어낸 재생의 용언.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어갔다.

“내가 인정해준 거란 말이야. 적어도 죽을 각오 정도는 하지 않으면, 당신의 기술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것은 해석사로서 표하는 경의였다. 지수의 두 눈이 황색과 청색으로 불타며 빛났다. 루드비히는 확신했다. 지금 저 녀석은, 아주 요만큼의 집중조차도 방어나 회피에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모든 신경을 펼쳐진 영역에. 오로지 이쪽의 기술만을 먹어치우려고 게걸스럽게 눈을 빛내고 있다.

마왕이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용왕의 감각은 인지를 뛰어넘어 있다.’

역대 최강의 용왕인 루갈반다조차 먹어치운 지금의 지수라면, 방어고 공격이고 다 포기하고서 오로지 한 점에 극도로 집중할 경우 세상이 멈춘 듯한 감각까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순순히 주문을 날려주는 게 합리적인 선택인가?

“더 해봐.”

그리고 원상태로 돌아온 지수가 루드비히를 도발했다.

지수는 루드비히의 기술을 파악해 대처법을 알아내겠다는, 그런 사소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준비물은 전부 갖추어져 있다. 마녀의 마도와 해석 능력. 같은 능력에 기반하고 있는 마법이라면, 당연히 이쪽 또한 재현할 수 있었다.

‘먹어치운다.’

남의 능력을 해석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것이 스나크 사냥, 지수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었다.

무엇보다 이쪽이 훨씬 유리했다. 자신은 루드비히처럼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법진의 구조를 만들어낼 필요 없이, 눈앞에 있는 완성품을 베끼기만 하면 된다. 이런 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를 쓰러뜨리겠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서히 몸을 치료해야 할 회복 주문들은 순식간에 지수의 몸을 억지로 봉합하고 복원시켰다. 루갈반다가 자신의 능력으로 과정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아무리 루갈반다의 보호막을 꿰뚫은 루드비히라도, 지수에게 작용하고 있는 능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수가 쓰러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억지로 과정을 건너뛰니까, 아픔이 장난 아닌데.”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다. 회복 주문은 지수의 몸에 충분할 만큼 행동 기능을 되돌려주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눈앞의 마왕을 응시한다.

“이미 반죽음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몸이 돼버렸다고. 확실히 끝장내려면 다섯 발 정도는 동시에 쏴야 할걸.”

몇 발이고 한꺼번에 쏴서 지수를 공격해준다면 지수 입장에서는 환영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버티기만 한다면 전부 해석해 어느 때보다 커다란 수확을 얻어갈 수 있다.

“아니. 세 발이면 충분해.”

“해보시든가.”

말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루드비히의 무형주문이 작렬했다. 피가 터지며 지수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한 발이 아니라 세 발. 팔다리가 덜렁대는 고깃덩이가 되어 저편으로 날아간다. 그런 와중에도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그렇구나.’

맞을 때마다 얻어간다. 훔쳐낼 수 있는 점이 보인다. 그런 면에서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누더기가 되었던 몸이 아슬아슬하게 복원되기 시작했다. 거의 그로테스크할 수준의 회복으로 지수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좀비 드래곤이다! 좀비 드래곤!>

<내가 적이었으면 어이가 없어서 도망쳤다. 용왕들이 다 모여서 작당하니 이런 또라이 짓도 할 수 있게 되는군.>

지수가 안에 품고 있는 용왕들이 떠들었지만, 루갈반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지수가 얼마나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의 능력을 이해하고 있는 루갈반다만이 알고 있었다. 루갈반다는 그저 한마디만을 읊조렸다.

<경의를 표하지.>

그리고 죽지 않은 지수가 일어나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다섯 발은 쏴야 한다고 했지.”

“이제는 다섯 발로도 안 되겠는데, 대충 익숙해져서.”

한 번 더 해봐, 하고 지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루드비히는 얼어붙은 듯 서서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식의 될 대로 되라 전략을 쓰니 기분이 상당히 오묘했지만, 루드비히를 상대할 때에는 이게 가장 잘 먹힐지도 몰랐다. 합리적인 수 싸움으로는 당최 이길 수가 없는 양반이니.

그리고 루드비히는 아연실색을 하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지수가 김유성을 닮아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지금 것을 보고서 확실히 알았다.

그야 대단하기야 했다. 분명히 지수의 몸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결코 혼자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회복 속도였다. 아마 품고 있는 용왕의 혼들이 조력해주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것과는 애초에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주문 한 발이라고 해도, 아무리 용왕의 육체가 튼튼하다고 해도. 무방비 상태에서 마력의 보호막 하나 없이 직격당했다간 정말 죽기 일보 직전의 피투성이가 된다. 잠깐이라도 의식을 놓거나 주문을 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대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루갈반다의 능력으로 회복 주문의 과정을 무시하고 즉각적으로 몸을 복구했다곤 하지만, 그건 거의 반쯤 억지로 몸을 재구성하는 것에 가까웠다. 온몸이 말 그대로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느끼겠지. 그런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려 하고 있다. 아무튼 버틸 수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이건 용사 김유성 이상이었다. 용사라고 해도 이따위 정신병자 같은 무한 자해 작전을 세우면서 싸우지는 않았다.

“스나크…… 미친 거냐?”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냉정해.”

애초에 승산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이 방법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제일 높아 보이니 이것에 거는 게 합리적이다. 루드비히라면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좋아. 스나크.”

루드비히가 흐트러져있던 자신의 가면을 똑바로 세웠다.

“너는 내 비장의 패로 끝내주지.”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행을 보았다고 해서, 저쪽의 페이스에 말려들 필요는 없다.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지수에게는 루드비히의 마법을 피할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었으며, 많아도 일곱 발이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오로지 그것만이 확실한 사실이다. 분위기니 정신론이니 하는, 근거 없는 감각으로 상황을 곡해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할 수 있는 만큼 만전을 기하기로 했다.

“브로켄의 유령 해제.”

루드비히의 뒤에 있는 새하얀 마법진이 사라졌다.

브로켄의 유령. 마치 고성능의 컴퓨터처럼, 사전에 자동으로 술식의 계산과 발동을 끝내놓고서 초신속의 주문 시전을 가능케 하는 능력. 말 그대로 형체조차 알아낼 수 없는 유령의 마법진이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그것을 스스로 해제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모든 계산을 수동으로 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디선가 촤르륵 책이 넘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이지 넘기기.”

루드비히가 오른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지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새하얀 마법진을 이루고 있던 마력은, 하나의 형체가 되어 루드비히의 오른팔에 들러붙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수는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비슷한 종류의 능력을 몇 번이고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

그것은 하나의 정령무장이었다.

훨씬 전에 알아차려야 했다. 지수는 해석 능력을 이용해 정령과 교감하는 것으로, 어이없을 만큼 쉽게 정령과 동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가진 것은 해석 능력의 오리지널. 정령과의 동화는 그 또한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루드비히가 조용히 지수를 겨누었다. 봐준다거나 적당히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이미 루드비히의 사고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모든 변수를 하나하나 제거해가며 지수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흉흉한 마력이 모이기 시작한다.

“한 가지 말해두지. 이걸 맞으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탄창 안에 총알을 집어넣듯이, 온갖 좌표와 궤도, 대상과 변수, 마력의 구조식을 계산해 주문의 설계도를 장전한다.

겨누는 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박자가 어긋나면 지수가 도중에 회복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건 이미 그런 영역의 싸움이었다. 단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말 그대로 동시에 일곱 발의 필살의 일격을 동시에 꽂아 넣는다.

“아까 마법진을 안 꺼내면 속도가 느려질 텐데.”

“어차피 너는 무방비로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니, 시전을 생략할 필요는 없다. 단지 확실한 필살의 일격을 겨눌 뿐.”

“당신… 정말 그래도 되겠어?”

“그래도 된다.”

스나크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은 최대한 이용해 최선의 공격을 한다. 그것이 루드비히의 방침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최속이 아닌 최대 위력의 일격. 이내 마탄을 착탄하려는 순간, 지수가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휙 하고 팔을 들어 올린 순간. 지수의 등 뒤에서 새까만 색의 마법진이 발현했다. 그것은 루드비히가 선보였던 새하얀 마법진과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여기저기의 빈틈을 보완하고 있는 것은 용왕의 혼들이었다.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커졌다.

"브로켄의 유령…이라 하기엔 이제 내 기술이 됐으니.”

지수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적으로 발현된 용언이 루드비히가 공격하기 전에 그의 몸에 작렬했다. 오로지 지수의 자력으로 발현한 최속의 일격이었다.

“용궁 전개.”

해석을 끝낸 지수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