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 열심히 달려온 당신에게 (1) >
거대한 불꽃놀이를 터뜨리고서 상당한 간격이 지났지만, 루드비히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는 지수의 몸속에서 용왕의 영체들이 떠들었다. 아트마레트라가 콧숨을 내쉬었다.
<안 오는군.>
<그야 이런 엄청난 걸 보여주니 쫄아붙기도 하겠지!>
지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루드비히는 고작 이 정도에 겁을 먹어 꽁무니를 뺄 정도로 간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몇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세계를 전부 멈춰버릴 때 루드비히까지 함께 멈췄다거나, 다른 어딘가에 들어가 있다거나.
“아. 그런가.”
무언가를 깨달은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순서의 문제였다. 자신은 커다란 불꽃놀이를 터뜨려 루드비히에게 화려한 초대를 보냈지만, 과연 초대장을 먼저 보내놓았던 것은 누구인가. 지수는 루드비히의 수기의 내용을 떠올렸다.
‘세계를 부수는 망치.’
환상의 회랑을 돌파하고, 왕들의 묘소도 무너진 지금. 오로지 하나만이 남은 최후의 던전. 루드비히는 이렇게 말했었다.
‘공략법은 의미가 없다.’
‘글로 적을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도달한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내가 있을 테니.’
지수는 아무것도 없는 고원에서 눈을 감았다.
지수가 용왕으로서 지니고 있는 격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이미 단순한 용왕이라고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주변에 펼쳐져 가는 감각은 인간의 인지를 한참 뛰어넘은 영역에 있었다.
지수는 던전의 게이트를 찾아내 열고 들어갈 필요조차 없었다. 게임의 대기실에서 개설된 방 목록을 보듯이, 세계와 이어진 아공간들의 연결고리를 더듬어보면 그뿐이다. 물론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지만, 지수의 해석 능력은 그런 것쯤이야 멋대로 간파해 열어버릴 수 있었다.
‘루드비히도 이 비슷한 짓을 하고 있던 건가.’
지수는 지금까지 루드비히가 나타나던 순간들을 회상했다. 어떠한 기척도 전조도 없었다. 단지 툭 하고 구둣발을 내딛는 소리가 난 순간, 루드비히는 그곳에 서 있었다. 말 그대로 신출귀몰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것은 초고도의 응용이었다.
집중하고 있던 지수가 눈을 감은 채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주변의 풍경은 아까까지의 고원과는 다른, 하나의 새하얀 계단으로 바뀌어있었다. 지수가 계단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오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
그리고 루드비히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짝, 짝, 짝, 짝 담담한 박수 소리가조용히 울려 퍼졌다. 화려한 문양의 가면, 새까만 망토, 가면 뒤에서 목까지 흘러내리고 있는 은발.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아예 경이까지 느껴진다는 눈빛이었다.
“회랑의 그림 속에 가뒀는데도 빠져나와 결계에 도달했을 땐, 확실히 마무리를 짓지 않은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가슴팍을 꿰뚫었는데도 되살아날 줄이야. 인정하도록 하지. 너는 완벽하게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내 박수를 멈춘 루드비히가 지수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내 방해를 하고 싶은 건가, 스나크?”
“저런 걸 눈 뜨고 내버려 두는 게 미친놈이지.”
지수는 아까까지 서 있던 고원을 생각했다.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완전히 멈춰있었다.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가 단절된 채로 박제되어간다. 그것은 가장 조용한 방식의 멸망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정상인이라서.”
지수가 투지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루드비히를 보았다. 루드비히와 자신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그의 생각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루드비히는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조용한 눈으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왜 모르는 거냐. 이게 얼마나 기적적인 광경인지.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세계는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거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것과 죽은 건 달라.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다. 스나크! 내가 이걸 더 설명해야겠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은 한순간, 한순간이 찬란해! 그것들이 불타 재가 될 일 없도록, 내가 계속해서 박수를 치겠다.”
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다물었다.
애타는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무대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도록 커다란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극의 진행을 그대로 멈춰버린다. 그렇기에 쇼 스타퍼.
오로지 너무 소중해서. 루드비히는 단순히 지수와 다시 싸우는 게 성가셔서 말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루드비히는 지극히 진정성 있는 자세로 호소하고 있었다. 내가 지킨 세계를, 내가 이룬 구원을, 부디 스나크 너도 이해해달라고.
“웃기고 있네.”
결과적으로 그것은 완전히 역효과였다.
무엇보다 지수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멈춰버린 세계에서도 루드비히가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루드비히도 함께 멈춰버렸다면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모든 것이 멈춰있는 세상에서 오로지 혼자, 끝없는 세월 동안 파수꾼을 자처할 셈이었다. 그 누구도 이 세계를 건드릴 수 없도록.
그런 것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
“언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편히 쉬는 게 좋다면서.”
“누구에게나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루드비히가 대답했다. 살아가다 보면, 더 소중한 것을 위해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루드비히의 저울 한쪽에 걸려있는 건 자신의 온 생애였지만, 그것보다도 이 세계를 지켜내는 것이 소중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는 지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상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었다.
딸을 과보호하는 아버지와도 같았다.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반 시체로 얼려버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비뚤어진 것이다.
지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뱉었다.
“루드비히,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어. 아무도 그 마음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을 거야. 지금이라면 알아. 당신이야말로 내가 만나온 누구보다 세상을 위해 헌신해온 사람이야.”
“그런가. 스나크, 드디어….”
루드비히의 눈동자에 작은 기대가 묻어 나왔다. 누구도 모르게, 세상의 뒤쪽에 숨어서 암약해온 자신의 행적. 그것을 유일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수였다. 최대의 적은 최대의 이해자. 그리고 지수가 편안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막아주겠어.”
흔들리던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흔들리는 새까만 망토 뒤에 새하얀 마법진들이 떠오른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연쇄해 돌아가는 마왕의 술식. 저것이 떠오른 순간 루드비히의 모든 마법은 과정이 생략된다.
“…유감이다, 스나크.”
지수는 이미 한 번 저것에 압도당했다. 루드비히는 아마, 등 뒤에 떠오른 저 술식에 마법의 연산과 시전을 맡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고성능의 컴퓨터와 같았다. 마왕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석 능력의 오리지널. 저 남자는 그것을 술식과 결합시켜, 공격 기술로까지 멋지게 승화시킨 것일 터다.
“나는 마왕 루드비히다. 한 번 죽어놓고서도, 너로선 나를 막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건가.”
루드비히가 손가락을 튕겼다. 거대한 마력이 복잡한 형태를 이루었다. 시전 시간은 물론 발동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발현하는 것과 동시에 표적에 작렬하는 보이지 않는 주문. 상식적으로 대응 자체가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내 앞쪽으로 손을 내뻗은 지수는, 루드비히의 주문을 막아낸 상태였다. 루드비히의 눈동자에 작은 경악이 스쳤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
“그쪽이 생략했으니, 이쪽은 무시했을 뿐이야.”
지수의 등 뒤에 루갈반다의 영체가 떠올랐다. 초대 용왕의 능력. 무언가를 자신의 임의대로 무시할 수 있는 폭군의 권한. 저쪽이 주문의 시전과 발동 시간을 생략한다면, 이쪽은 주문의 시전과 발동 시간을 무시한다. 이렇게 되면 조건은 동등하다. 서로가 똑같이 신속의 칼과 방패를 지니고 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엄청 놀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 당황했던 루드비히는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루갈반다인가.”
이번엔 오히려 지수와 루갈반다 쪽이 놀랄 차례였다.
<나를 알고 있는 건가?>
“알고말고. 초대 용왕, 진룡왕 루갈반다. 용사 김유성의 제일가는 동료 아닌가. 왕들의 묘소에 갔다 온 건가? 이렇게 되면 용사 대행이라는 농담에도 코웃음 칠 수 없겠군.”
루드비히의 말에 지수가 루갈반다의 영체를 휙 돌아보았다. 방금 들은 말은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었다.
“김유성 씨를 알아요?”
<모르는 이름이다. 짐작 가는 바가 없군. 하지만.>
루드비히가 다시 날려온 무형주문에 루갈반다가 울부짖었다. 진룡왕의 능력이 지수의 몸을 감쌌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전부 무시해버리는 절대적인 왕권. 지수를 상처입히는 것은 마법적인 충격이고 물리적인 충격이고 싸그리 다 취소했다. 그것은 용언보다도 더 위에 있는 초월자의 힘이었다.
<마왕이라고?>
루드비히의 모든 공격을 막아낸 루갈반다가 말했다.
<용이야말로 모든 마법의 종주. 우리들 용왕 앞에서 마도의 지배자를 자칭하다니, 오만한 데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
완전히 사기를 치고 있는 듯한 능력이었지만, 지수가 사역하고 있는 영체인 시점에서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야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여왕을 물어뜯어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묘소 안에서 견뎌온 시초의 용왕이다. 마왕을 압도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루드비히 뒤의 마법진이 격렬하게 회전했다.
“오만한 건 너다, 루갈반다.”
그리고 발현된 무형주문은 루갈반다의 능력을 유리창처럼 깨부쉈다. 주문에 직격당한 지수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달려오는 대형 트럭에 치인 감각이 이럴까 싶었다. 물론 대형 트럭 따위에 치인 것뿐이라면 반사적으로 마력을 두르기만 해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을 것이다. 지수가 쿨럭 피를 토했다.
“자신의 능력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었나? 착각도 자유라고 말해주지. 초월자가 가진 심상능력 따위, 스나크도 익숙해지기만 하면 파훼할 수 있는 허점덩어리일 뿐이다.”
루드비히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실제로 지수 또한 루드비히가 뿜어낸 쇼 스타퍼를 어떻게든 해석해서 상쇄했다. 초월자의 능력은 절대적이지만, 같은 초월자가 상대라면 충분히 파훼할 수 있다. 그 법칙에 루갈반다의 능력만이 예외가 될 이유는 없었다. 루드비히는 이미 분석을 끝낸 상태였다.
<저놈 대체 뭐냐?>
“그러게요.”
루갈반다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지수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대체 뭘까. 저런 반칙 같은 존재가 어디 있냐고 세상에 대고 따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전투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루드비히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지수는 웃었다.
“왜 웃는 거지, 스나크.”
타당한 지적이었다. 새로 얻은 루갈반다의 능력이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는데, 마음이 꺾여 절망하기는커녕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그 기괴한 광경에 루드비히가 지수를 추궁했다.
“답지 않다고, 당신. 원래 자길 막는 건 불가능하다느니 너로선 나를 이길 수 없다느니 센 척하는 성격 아니었잖아.”
입가의 피를 닦은 지수는 천천히 일어났다.
이전과는 다르다. 용왕으로서 훨씬 더 격이 상승해, 루드비히의 무형 주문 한두 방은 몸으로 맞으며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은 똑같았다.
이전과는 다르다. 루드비히와 똑같이 이쪽도 주문의 시전 시간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루드비히의 마법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마법사로서 가진 역량의 차이였다.
그걸로 좋았다.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냥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살아서 꽁무니를 뺄 수 있을지 하는 생각에만 급급했다. 어느 정도 힘을 얻은 뒤에도 충돌하지 않으려 쉬쉬하며 움직였다. 루드비히를 쓰러뜨린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루드비히에게 완전히 짓밟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쓰러뜨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마법의 제한을 풀고, 전력을 다한 루드비히에게 일방적으로 박살 났다. 심지어 죽어버렸다.
루드비히와 마주해온 행적은 지수의 패배 행적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앞으로 걸어왔다. 저번에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던 방식에, 다음번 만났을 땐 어떻게든 대처했다. 패배할 때마다 조금씩 강해졌다.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싸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루드비히는,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지수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지수가 씨익 웃었다.
“당신 겁먹었지. 나한테 질까봐.”
그 말에,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