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준다는 걸 거절하기엔 (4) >
묘소에 늘어선 그것은, 대대로 이어진 용왕의 계보였다.
초대의 부름에 모인 용왕들은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용은 뼈만 남은 날개를 펼치고 있다. 어떤 용은 비늘 대신 보석이 돋아나 있다. 본 적도 없는 용 들이였다. 화염을 두른 살카르사가 하늘에 불을 뿜었다. 아트마레트라는 숨결을 뱉을 때마다 눈보라를 휘날리며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양쪽 끝에 위치한 것은 백룡과 흑룡.
하늘에 떠 있는 루갈반다의 모습은 고고하다 못해 경건할 지경이었다. 천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날개들이 조용히 바람을 타며 움직였다. 반대쪽에는 그와 반대로 무엇보다 불길한 모습. 세상 모든 걸 찢어발길 듯한 포악한 사룡이 있었다.
‘아그리올라랑 똑같이 생겼네.’
어두운 진보라색의 용을 바라본 지수가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밴더스내치와 아그리올라는 동일한 존재였으니까. 거대한 용들이 웅성거렸다. 모든 용왕들을 소집한 것도 그렇고, 때가 왔다는 루갈반다의 말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했다. 더 이상 미뤄봐야 의미가 없다면, 전력을 다해 적을 물어뜯으러 갈 뿐.”
루갈반다는 완전히 목소리까지 달라져 있었다. 앞에 마주 선 것만으로도 절로 주눅이 들 만큼 엄숙하고 기품있다. 아까 땅바닥에 누워서 밴더스내치한테 얻어맞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형 형 하고 떠들던 자와 동일인물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전쟁을 시작하자.>
루갈반다의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히 역대 용왕들이 모여있는 풍경은 대단한 장관이었다. 하지만 결국 전부 왕들의 묘소라는 던전 안에 묶여있는 영혼이기도 했다.
즉 밖으로 나갈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은 있다.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의 게이트는 시간이 지나면 해방되어, 실체화한 채로 현실을 침식한다. 루갈반다 또한 원래 그것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바깥의 세계는 마왕이 완전히 멈춰놓은 상태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게이트가 해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나가면 된다, 환룡왕 스나크.>
날개를 펼친 루갈반다가 간단한 이야기라는 듯 말했다.
<네게는 자력으로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백룡의 유리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초대 용왕쯤 되면 당연한 것일까, 루갈반다 또한 지수의 해석 능력이나 김유성의 심안처럼 최고 클래스의 간파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무시할 수 있는 힘. 그것을 이용해, 상대가 감추고 있는 것 따위는 전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지수는 루갈반다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김유성에게 받은 힘. 죽는다고 해도 부활할 수 있는 용사의 능력.
사실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불투명한 능력이었다. 김유성은 자신이 너무 잘나서 한 번도 발동시켜 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분명히 지수는 그 능력 또한 계승받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 번 죽은 다음에야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발동이 불가능했다. 어째서 불가능한 것인지 또한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능력 자체가 ‘용사를 부활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지수는 김유성이 지닌 용사의 능력들을 스나크 사냥으로 베껴서 재현했지만, 결국 용사 대행일 뿐 진짜 용사가 아니었다. 부활 능력의 대상을 벗어난다.
원래대로라면 생겨날 수가 없는 오류였다. 용사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용사가 아닌 자가 멋대로 흉내 낸 결과,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는 부분이 생겨난 것이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지만, 지수는 솔직하게 모두 털어놓았다.
“분명히 그런 능력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발동할 수가 없어요. 조건이라고 해야 하나. 자격을 만족하지를 못해서.”
<무시하면 그뿐.>
루갈반다가 숨결을 내뱉자, 지수의 몸에서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떠한 변화가 느껴졌다. 마치 RPG 게임의 컨티뉴 버튼을 누르듯이, 당장에라도 부활할 수 있다는 실감. 지수는 멍하니 방금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해석했다.
스위치가 활성화되었다. 일시적인 일이었지만, 지수가 가진 부활 능력에서 ‘용사여야 할 것’이라는 제한이 사라져 있었다.
‘남의 능력에 달린 제한까지 그냥 씹어버린 거야…?’
마음에 안 드는 걸 무시한다는 저 능력이 남에게도 부여해줄 수 있는 힘이었다니. 지수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루갈반다. 용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들어낸 역대 최강의 용. 그 위명은 지수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지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부활을 시도했다. 금색의 빛이 터져 나오는 것과 함께, 영체의 껍질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육체는 물론,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나 상태까지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로 세이브 파일을 불러온 것처럼. 용왕의 행렬 끝에서 위풍당당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던 밴더스내치도, 다시 복구된 지수의 만년필 안에 들어와 안착했다.
밴더스내치의 묘소가 천천히 무너지며 백지가 되었다.
이미 지수는 용왕의 묘소에 묶여있는 환룡왕 스나크의 영체가 아니라, 던전 안에 들어온 한 명의 헌터였다. 당장에라도 묘소의 문을 열고서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다.
지금 지수는 이곳에서 완전하게 부활했다.
<잘됐네, 왕님. 이걸로 다시 싸울 수 있어. 다시 싸운다고 해서 그 괴물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지수가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행운아였다. 패배했는데 또 어떻게 남의 도움을 받아 활로를 손에 넣었다. 이제는 이게 대체 몇 번째일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바깥에서는 루드비히가 기다리고 있다.
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서, 다시 싸운다고 해도 루드비히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마왕은 그냥 괴물이었다. 최대한 과대평가를 하자고 생각했지만, 그것마저 과소평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작게 한숨을 내쉰 지수가 루갈반다에게 묵례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나가서 어떻게든 세상이 다시 움직이게 해볼게요. 솔직히 멈춘 양반이 너무 세서 자신은 없지만….”
그리고 지수가 등을 돌려 묘소를 떠나려는 순간.
<어딜 나간다는 거지?>
루갈반다가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너 지금 뭐 하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수가 눈을 끔뻑였다. 그야 자신이 일단 밖으로 나가 루드비히의 정지를 해제시켜야, 시간이 지난 뒤 묘소의 문이 열려 다 같이 여왕과 싸우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럴 필요는 없다, 최후의 용왕.>
루갈반다가 발톱을 들어 가리킨 것은 지수의 머리였다. 말했던 대로 부활한 지수의 몸은 전부 완전하게 돌아와 있었다. 비틀려 피투성이가 됐던 팔다리나 루드비히에게 꿰뚫린 가슴은 물론, 찢어졌던 옷도 부서졌던 만년필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지수의 머리 위에는 새까만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S급 던전, 망령왕의 무덤에서 손에 넣었던 아티팩트. 언데드 로드의 다이어뎀. 그 능력은, 쓰러뜨린 존재의 영체를 자신에게 귀속시켜 사역할 수 있는 것. 지수는 그제야 루갈반다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눈치채기 시작했다.
<너만이 나갈 수 있다면, 네가 다른 왕들을 품으면 그뿐.>
루갈반다는 지수에게 언데드 로드의 다이어뎀을 이용해 묘소에 존재하는 모든 용왕의 영체를 사역해보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수는 회의적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각자가 용왕의 격을 지닌 용들이었다. 하나나 둘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용들의 영혼을 지수 혼자 사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뭔갈 하기는커녕 영혼들을 제어하는 데만도 벅찰 것이다.
<알고 있다.>
“정말로 알고 있는 거 맞아요?”
<환룡왕 스나크. 너는 강하다. 용을 초월한 용이라 불린 이 루갈반다에게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이례적으로 강해. 그렇다 해도 너 혼자서 이 모든 왕들을 품는 것은 무리겠지.>
알고 있으면 왜 다이어뎀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루갈반다의 기괴한 능력을써서 일을 진행시키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진짜 문제는 용량 부족 같은 게 아니야.’
언데드 로드의 다이어뎀이 가진 능력은 어디까지나 왕관의 주인이 죽인 존재의 영혼을 귀속시키는 것.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용왕들은 이미 죽어서 영체가 된 존재들이었다. 한 번 부활시켜서 다시 죽이지 않는 이상 사역은 불가능했다.
<알고 있다.>
그리고 순백의 용은 담담히 충격적인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난 애초에 아직 죽은 적이 없으니.>
새하얀 용이 땅에 내려앉았다. 수십 장의 날개는 조금만 펄럭여도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지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루갈반다. 지금으로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여왕에게 흡수당한 채로 와신상담하고 있던 최초의 용왕.
지수는 그런 루갈반다를 보고, 고래의 뱃속에서 살아남아 있었다는 남자를 생각했었다. 그것과 같았다. 왕들의 묘소에 안착한 용왕들은 당연히 죽어서 회수된 영체들이었지만, 묘소의 주인인 루갈반다까지 죽었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나의 심장을 네가 취하는 거다. 이곳 왕들의 묘소는, 오로지 다른 용왕의 영체를 붙잡아두는 것만을 위한 나의 둥지. 나를 귀속시키면 묘소째로 너의 둥지에 병합되게 된다.>
즉, 루갈반다 혼자서 이곳 묘소에 안착한 모든 용왕들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지수는 루갈반다의 영혼 하나만 취하면 나머지 용왕들을 사은품처럼 얻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지수가 루갈반다를 죽이는 것.
‘솔직히 거부감이 좀 들긴 하는데….’
아무리 저쪽이 바라고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우호적인 존재를 스스로의 손으로 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나쁜 일이었다. 예전의 지수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질색을 할 정도로. 하지만 이미 한 번 죽어 영체가 되어보니 그런 쪽의 거부감은 상당히 옅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준다는 걸 거절하기엔.”
지수의 오른손에 재버워키의 정령무장이 형성된 뒤, 밴더스내치의 용언마탄이 장전되었다. 고통 없이 깔끔하게. 파열의 용언이 담긴 마탄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몸을 맡긴 루갈반다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내 백룡의 영체가 떠올랐다.
영혼이 떠오르자마자, 지수의 왕관에서 사이한 기운이 내뿜어져 나오며 루갈반다의 혼에 사슬을 걸치기 시작했다. 지수는 자신과 루갈반다의 혼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생성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둥지와 격이 훨씬 더 커진 것 또한. 지수는 지금 자신 안에 왕들의 묘소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루갈반다의 영혼을 사역하길 끝내자, 지수가 쓰고 있던 왕관에 금이 가더니 스스로 깨져 증발해버렸다.
“뭐야?”
<한계 이상의 영체를 사역하느라 과부하가 갔나 보군.>
웬만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진룡왕 루갈반다의 혼이 강대한 것이었다. 사역한 이후 원하는 대로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 그 자체만으로도 S급 아티팩트에 과부하가 갈 만큼. 이내 밴더스내치가 공명하며 말했다.
<이제는 왕님이 아니라 대왕님이라 불러야겠는걸.>
분명히 처음 계약할 때 밴더스내치는 그렇게 말했었다.
분명히 지수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역대 최약의 용왕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최강의 용왕조차 발아래에 둘 가능성이 있다고. 그 예언은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지금 지수는 모든 용왕들을 자신에게 협력하는 영체로서 둥지 안에 품고 있었다.
‘싸울 수 있다.’
자신의 상태를 살핀 지수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정도로 극적인 변화라면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쓰러뜨린다. 게이트를 열고 왕들의 묘소 바깥으로 나오자, 세상은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발을 한 발짝 내디디며 정지를 상쇄하는 역장을 폈다.
그곳은 고원이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고 나뭇잎도 흔들리지 않았다. 숨을 내뱉는 생물 하나도 없었다. 지수는 마치 온 세상의 색이 빛바랜 것처럼 보였다. 무엇도 태어나지 않고 무엇도 변하지 않는, 그저 그대로 박제되어있는 세계. 이것이 루드비히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러자 지수 안에 있던 살카르사가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막내한테 신고식을 못 시켰는데?>
옳다 맞다 그렇다, 하고 지수의 둥지 내부 묘소에 안치된 용왕들의 혼이 떠들었다. 그들은 막 알게 된 새내기 용왕에게 무언가를 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 보였다. 거칠게 날뛰려는 그들을 중재하고 지수에게 속삭인 것은 루갈반다였다.
<우리가 도와줄 테니, 멋지게 선전포고를 해보도록.>
세계를 멈춘 루드비히를 이번에야말로 쓰러뜨린다.
그것을 위한 선전포고였다. 지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오른팔의 정령무장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이 빛바랜 세계에 필요한 것은, 형형색색의 불꽃놀이였다. 장전된 것은, 이전처럼 밴더스내치가 빚어낸 용언마탄만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 마지막 용왕에게 ‘폭열’의 용언을 바친다.>
<지금 여기 마지막 용왕에게 ‘극한’의 용언을 바친다.>
<지금 여기 마지막 용왕에게 ‘배제’의 용언을 바친다.>
붉고 푸르고 하얀. 수많은 용왕들의 수많은 용언들이, 지금 연환의 마탄이 되어 지수의 정령무장을 둘러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읊조린 것은 쭉 지수와 함께해온 밴더스내치였다.
<지금 여기 나의 왕에게, ‘파열’의 용언을 바친다.>
밴더스내치의 마탄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마탄이 서로를 증폭시키며 돌아갔다. 전에 없었던 거대한 파괴력을 담은 마탄은 세상을 부숴버리려는 듯 하늘에서 폭발했다.
내가 여기 돌아왔으니 올 테면 와 봐라.
그것은 루드비히에게 보내는 가장 화려한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