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준다는 걸 거절하기엔 (3) >
이쪽을 바라본 루갈반다의 눈동자가 빛났다.
“형. 뭐야? 되게 신기하네.”
새하얀 청년이 엄청나게 신기한 것을 발견한 듯 쫄래쫄래 걸어왔다. 루갈반다는 초대 용왕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중에서 제일 오래 산 것이 그일 텐데, 고작해야 20년 살았을 뿐인 지수에게 형이라니. 지수의 표정이 대단히 미묘해졌다.
“내 술식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보통 방법으로는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형, 인간의 영혼이잖아?”
그 말에 살카르사와 아트마레트라가 깜짝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용왕이라는 건, 용의 왕이라는 뜻이다. 용이 아닌 존재가 용왕이 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납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번에 놀란 것은 지수 쪽이었다.
“영혼시를 쓸 수 있는 겁니까.”
별다른 주문이나 기술을 쓰지 않고 쓱 보는 것만으로 지수의 영혼을 간파한 건, 그 또한 영혼시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성녀를 비롯해 교회 쪽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기술인 줄 알았는데. 지수의 말에 루갈반다가 헤헤 웃었다.
"존댓말 안 써도 되는데 루라고 불러."
“초대. 제발 기품을 유지하십시오.”
뒤에서 보고 있던 아트마레트라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쨌든 그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왕조의 시초였다. 누구에게나 우습 게 보여도 될 존재가 아니었다. 혼난 루갈반다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아트마레트라가 말했다.
“원래부터 저런 성격은 아니었어. 진룡왕 루갈반다는 용족들 사이에 고고하고 품위 있는 현왕으로서 이름이 드높았지.”
그런 양반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스나크, 네 질문에는 내가 대신 답해주지. 영혼시라는 건 시각으로 혼의 형태를 포착할 수 있는 영매 체질을 말하는 거겠지? 초대의 능력은 그런 어쭙잖은 게 아니야.”
지수가 아트마레트라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목소리에는 경외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한 명의 용왕으로서 초대 용왕에게 바치는 경의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닌 존재를 향한 순수한 두려움이었다. 빙룡왕 정도 되는 자가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루갈반다를 바라보았다.
“내 능력? 별거 아닌데.”
그리고 루갈반다는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집어넣어,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꺼내었다. 지수와 밴더스내치는 깜짝 놀랐지만, 아트마레트라와 살카르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심지어 지루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장기자랑을 다시 구경한 것처럼. 루갈반다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마음에 안 드는 걸 무시할 수 있어. 지금 이건 살갗이랑 뼈 같은 방해물을 무시하고 심장을 꺼내서, 몸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제약을 무시하고 심장을 뛰게 만든 거고.”
무시를 두 번 했어. 무시무시하지? 루갈반다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의 손바닥에서는 새빨간 심장이 쿵광쿵광 뛰고 있었다. 다들 산전수전 다 겪은 용왕들이라 그런가, 그 끔찍한 거 당장 집어넣어요! 같은 정상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지수는 단지 대단한 능력이라고만 생각했다.
‘대충 들어도 활용도가 어마무시한데.’
어마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사기적인 수준이었다. 다른 용왕들과 격이 하나 다른 위치에 있다는 말이 한 번에 이해될 정도였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빙룡왕이 얼마나 거대한 얼음을 만들든 폭룡왕이 얼마나 격렬한 용암을 뿜어내든 요만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걷어차이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아 한 것도 저 능력인가?’
손상과 충격 그 자체를 무시한 것일 터였다. 무시할 수 있는 한도나 횟수가 얼마나 되는 건지는 몰라도, 무적이라고 말하기에 손색이 없는 능력이었다. 게다가 지수의 절대중립과는 달리 공격 면에 있어서도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내 소개는 끝났고. 이제 형의 정체가 뭔지 좀 알려줄래? 인간이 용왕이 됐다는 것도 그렇고, 용왕이 다른 존재를 왕으로 섬기는 것도 그렇고. 형을 보고 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해가 안 돼. 내 술식으로 무슨 짓을 한 거야?”
루갈반다는 추궁한다기보단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지수는 잠깐 생각해봤지만 밝히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턱을 매만진 지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의 다 지수가 아닌 밴더스내치 시점의 이야기였다. 설명하려면 대전쟁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용왕 아그리올라가 김유성에게 토벌당한 것. 이내 그녀가 자신의 영혼을 둥지에 봉인한 뒤, 부활하기 위해 인격과 기억이 담긴 사념체를 내보낸 것. 그런데 정작 영혼만이 남은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
그런 마음에 들지 않는 아그리올라와 싸우고 있던 인간이, 기상천외한 능력으로 봉인 속 자신의 영혼에 접촉한 것.
“그래서. 계약해 영혼째로 융합한 다음, 네가 다음 용왕이 됐다고? 쟤는 부활시키러 온 자기 자아를 죽여 버리고?”
“대충 그런 이야기죠.”
“미쳐도 아주 거나하게 미쳤군.”
아트마레트라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긴 아그리올라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영혼을 부활시키러 왔더니 그 영혼이 적이랑 결탁해 자기 자신을 죽여버린 꼴이니. 살카르사는‘그치, 마음에 안들면 죽여버려야지.’ 하고 밴더스내치의 등을 팡팡 치고 있었다.
“이해는 됐는데 믿기는 어렵네.”
그리고 루갈반다는 웃는 얼굴인 채로 말했다.
“계승식은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제일 잘 알아. 용의 영혼이 달라붙어서 인간인 형을 용왕으로 만들었다니. 그런 식으로는 실행 자체는 가능해도 바로 오류가 생길걸. 잠깐만 생각해도 도중에 터질 문제를 수십 개는 떠올릴 수 있어.”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또한 마법사로서 술식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수준이었기에 루갈반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인터페이스와 용의 인터페이스는 애초에 맞물려 호환이 되지 않는다. 억지로 조건을 만족시킨들 술식이 제대로 작동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건 아마 제 능력 덕분일걸요.”
해석 능력. 마법서의 고대어를 번역해 한국어로 다시 쓰는 것처럼, 지수는 불가해한 것을 해석해서 자기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용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수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을지언정, 만들어진 용언은 그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용들의 영혼을 위해서 만들어진 용왕의 능력들을 지수는 나름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도 기본적인 능력 빼고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해석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루갈반다는 지수에게 깊은 흥미를 보였다.
“그러면 형, 내 마음도 읽을 수 있어?”
그야 못 할 것 없었다. 끄덕인 지수는 심상해석을 발동했다.
“...어?"
그리고 지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루갈반다의 감정은 지금까지 지수가 포착한 어떤 심상보다도 기형적이었다. 마음도 감정도 반쯤 죽어있었다. 이런 것은 본 적이 없다. 단순히 냉정하거나 차분한 것이 아니었다. 뜨거워지지도 차가워지지도 않게, 감정 자체가 미지근한 상태에서 억지로 고정되어있었다.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반응을 보니 진짜인 모양이네.”
“이게 무슨…. 대체 왜?”
지수가 경악해서 물었다. 루갈반다는 지금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자아 자체를 쇠사슬로 칭칭 감아 억누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증오도 미움도 없었다. 아무리 굴욕을 당해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고, 친구나 가족이 죽는다 한들 아무런 감상도 일지 않는 상태. 그런 식으로 인격이 봉인되어있다.
남에게 당한 것이라면 몰라도, 루갈반다는 지금도 스스로 제약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지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트마레트라와 살카르사는 둘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루갈반다가 얼빠진 웃음을 지었다.
“나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
그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런 굴욕은 절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원래대로였다면 당장에라도 묘소 따위 부숴버리고 싸우러 나갔을 거야. 이렇게 비굴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을 바에야 죽는 게 낫다면서.”
웃고 있는 루갈반다와 지수의 눈이 마주쳤다. 루갈반다는 이미 지수가 얼마나 강한지, 그렇게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지수 또한 여왕을 알고 있다. 그런 확신을 담아 루갈반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형? 루갈반다가 동지를 바라보듯이 지수를 보았다. 그 순간 지수는 왕들의 묘소라는 던전의 정체를 깨달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곳은 던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던전은 여왕이 삼켜서 먹어치운 온갖 세계들의 기록이었다. 이미 완전히 소화되어 여왕의 일부인 채로 재구성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이 여왕에게 삼켜졌다는 것조차 모른다.
하지만 지금 루갈반다를 보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가 여왕에게 잡아먹혀 멸망당했다는 것을. 도출된 결론은 하나였다. 진룡왕 루갈반다는, 여왕에게 잡아먹히는 걸 전제로 해서 복수의 발판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그걸 위해 만들어진 계승식이니까.”
지수는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래의 뱃속에서 살아남아 있었다는 남자의 이야기. 루갈반다가 한 것은 이른바 그것과 같은 일이었다. 스스로 여왕의 뱃속에 들어가, 소화되지 않도록 자신의 셀터를 만드는 것. 그 상태로 여왕을 죽일 계획을 진행시킨다. 자신의 인격조차 억눌러가면서.
“필요한 건 하나뿐이었어. 섭리의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영혼을 만드는 것. 그만큼은 무거워야 윤회에 끌려가지 않고 묘소에 안착할 수가 있으니까.”
세계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한 강대한 영혼.
다른 인간이나 몬스터들의 훅 불면 날아갈 듯한 희미한 영혼을 그만한 영역으로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자신과 같은 용종의 혼. 그걸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용왕의 계승식이라는 영혼 증폭 술식이었다.
말로 하면 간단한 메커니즘이었다. 계승식을 거듭할수록 죽은 용왕의 혼이 이끌려 묘소에 영혼들이 쌓이고, 왕들의 묘소에 충분할 만큼의 전력이 모였을 때. 역대 용왕이 전부 해방되며 여왕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한 계획이었다.
그 계획을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실현시키는 데에, 대체 얼마나 커다란 천재성과 광기가 필요할지 지수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계획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면 마왕이 바깥세상을 멈춰버릴 테니까. 더 이상은 용왕의 영혼을 묘소에 회수할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정말 바깥이 멈췄어.”
고개를 돌려 저편을 바라본 루갈반다가 말했다. 그는 모종의 방법으로 외부의 상태를 느낄 수가 있는 듯했다. 지수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벌써 멈춰버렸다고? 하지만 루갈반다의 얼굴에서 낭패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인격을 잠가 두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루갈반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멈추지 않았어도 어차피 똑같았을 테니까. 더 이상의 용왕은 없어. 형이 최후의 용왕이야.”
지수가 놀라자 루갈반다가 뭘 놀라냐는 듯 웃었다.
“원래 용왕이 죽으면 자동적으로 가장 적합한 영혼에 계승식이 발동하게 돼 있는데, 형이 죽었을 때는 발동하지 않았거든. 이제 아마 새로운 용왕은 태어나지 못할 거야.”
그 말에 지수가 입술을 닫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용왕의 계승이 끊긴 것은 자신이라는 버그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상한 방법으로 용왕이 된 탓에, 죽고 나서야 계승식이 오류를 일으킨 것이다. 루갈반다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형. 나는 오히려 얼싸 안아주고 싶은 기분인데. 이제야 계획을 시작할 수 있어.”
그리고 심상해석에 비치는 루갈반다의 감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자아를 묶고 있던 녹슨 쇠사슬이 하나둘 끊어지기 시작한다. 죽어있던 감정에 생기가 돌아오며 요동쳤다. 고개를 들었을 때 루갈반다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근엄한 왕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감.
“진룡왕….”
분위기가 변한 루갈반다를 보고, 아트마레트라가 멍하니 읊조렸다. 살카르사와 밴더스내치 또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대로라면 존재할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규격외의 용왕. 그러니까 이렇게 이름 붙이지. 환룡왕 스나크.”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선 루갈반다가 말했다.
“그리고 모든 왕에게 명령한다. 지금 여기에 집결해라.”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순간, 어딘가에서 거대한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폭음이 울려 퍼졌다. 보라색의 밤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형형색색의 용들이었다. 날개를 펼치며 착지한 용들이 숨결을 흘렀다. 아트마레트마와 살카르사, 밴더스내치, 그리고 루갈반다 또한 용의 형상이 되어 포효했다.
지금, 밴더스내치의 묘소에 역대 용왕 전원이 강림했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온 세상의 폭력을 전부 다 합쳐도 저 용들 앞에서는 빛이 바래 보일 정도로.
“때가 왔다.”
수십 쌍의 날개를 지닌 새하얀 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