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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156화 (156/176)

156화.  < 준다는 걸 거절하기엔 (2) >

“뭐야. 여긴 재밌는 게 요만큼도 없잖아.”

지수가 깨어난 서재 구석의 테이블, 살카르사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살카르사는 상대방과 초면이든 말든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타입이었다. 그는 옆에서 내 묘소엔 용암 괴물이 들끓고 있다느니 저놈 묘소엔 커다란 동굴이 있어서 안에 설인들이 살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이놈들이랑은 싸울 수가 없잖아.”

살카르사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완두콩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봐도 싸움하고는 연관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한숨을 쉬는 모습이 너무 딱해 보여 저라도 상대해드릴까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앞에 앉아있는 아트마레트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둬라. 저거 다 작전이야.”

“작전이요?”

저 붉은 용왕과 만난 지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지만, 무언가 작전을 짠다거나 함정을 판다거나 하는 일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남자 같아 보였다. 바로 그 점이 위험한 거다, 하고 푸른 용왕이 말했다. 정말 짜증나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 번 싸워서 이기면, 졌다고 열을 받아서 자기가 이길 때까지 다시 하자고 끝도 없이 덤비지. 결국 지쳐서 됐으니 그냥 네가 이긴 걸로 치라고 하면, 그런 게 어딨느냐고 제대로 붙으라며 화를 낸다. 적어도 사나흘은 잠도 못 잘걸.”

지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 무슨 공포스러운 존재인가. 옆을 돌아보면 살카르사는 그게 대체 뭐가 이상한 거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만 봐도 방금 아트마레트라가 한 말에 요만큼의 과장도 섞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앉아있으니 뭐 마실 것이라도 내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지수도 이곳에 온 지 얼마 안되었기에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앉아있자 완두콩 하나가 마실 것을 가져왔다. 살카르사가 잔에 담긴 투명하고 맑은 액체를 보며 말했다.

“흠, 이게 뭐냐?”

“찬물이다 이 말입니다.”

고개를 숙인 완두콩이 떠나갔다.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에 온 신경을 쏟느라 손님들 마실 거라고 찬물을 내놓다니. 이제 보니 이 완두콩들은 아주 사회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녀석들이었다. 지수와 닮아있었다.

“난 또 뭐 대단한 건 줄 알았네.”

살카르사가 호쾌하게 찬물을 들이켰다. 화를 낼 줄 알았지만 붉은 용왕은 별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인 것 같았다. 지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내 잔을 비운 살카르사는 앞에 있는 아트마레트라를 삿대질하며 낄낄댔다.

“저번에 저놈은 말이야, 무슨 이게 엄청 귀한 거라면서 잔 하나를 내오더니 내가 그냥 꼴깍꼴깍 마신다고 정색하고 화를 내더라니까. 맛도 그냥 물이랑 다를 것도 없더만.”

그 말에 아트마레트라가 발끈하며 눈을 부라렸다.

“‘빙정의 입맞춤’을 그렇게 마시는 건 창세 이래로 네놈이 처음일 거다. 너한테 그걸 대접해준 내가 미친놈이지!”

"봐 봐, 그거 갖고 아직도 삐져있는 거. 왕이라는 놈이 그릇이 넓어야지 그렇게 속이 좁으면 쓰나. 에잉 쯧쯧."

살카르사의 말에 빙룡왕이 화를 내는 걸 멈추고 정색했다.

‘진짜 화났다 저건.’

지수도 한도를 넘어서서 꼭지가 돌아가면 저런 표정이 될 때가 있었다. 실시간으로 그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이에 껴있는 지수는 기계적으로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 둘은 딱 봐도 서로가 상극인 것 같은데 붙어 다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곳은 새로운 용왕의 묘소가 생겼다길래 집들이 겸 왔다고 쳐도, 굳이 저 둘이 함께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쩌면 저렇게 티격태격해도 사실은 사이가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쩝 입맛을 다신 지수가 입을 열고 질문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두 사람이 지수를 쳐다보았다. 물어볼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보라는 얼굴이었다. 같은 용왕끼리라서인가, 아니면 그냥 성격이 좋은 건가. 두 용왕은 처음 보는 지수에게 우호적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협력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수가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입에 담았다.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내 지수의 질문에 두 용이 동시에 즉답했다.

“못 나가는데?”

“못 나간다.”

완전히 단정하는 목소리였다. ‘모른다’나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가 아니라, 나가지 못한다고 확실히 못을 박아버렸다.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방금의 대답은, 나가려고 하면 자신들이 막을 거라는 어조가 아니었다. 그런 거였다면 일이 쉬웠을 것이다. 어떻게든 전부 쓰러뜨리고 나가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두 용왕은 지수에게 어디까지나 협력적이었다.

“묘소 뜻 모르냐? 여기가 네 무덤이라고. 영혼이 무덤에서 어떻게 나가? 나보다 머리 나쁜 왕은 처음 본다 야.”

“정중한 말을 사용해라, 살카르사.”

깍지를 낀 아트마레트라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능동적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여기 묘소는, 초대가 만든 용왕이라는 술식의 중추다.”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가장 강대하고 가장 위대했던 용. 순백의 진룡왕 루갈반다. 그는 어떤 필요에 의해 후대의 용들을 위한 술식을 만들었지. 자신처럼 반쯤 섭리를 무시할 수 있도록, 격을 갖춘 용의 영혼을 독보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계약 술식.”

지수는 눈을 찌푸렸다. 밴더스내치에게 받았던 용왕의 계승식. 그것이 용족 특유의 능력이나 무언가가 아니라, 어떠한 한 존재가 만들어낸 술식이었다니. 아트마레트라가 말했다.

“당연히 용왕이 되었다고 해서 다음 대의 용왕을 뿅 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힘 따위는 생기지 않아. 계승식을 발동시키는 주체는 용왕이 아니라 바로 이곳, 왕들의 묘소다. 그리고 용왕이 된 영혼은 사후 이곳 묘소에 이끌리게 되지.”

확실히 그러했다. 용왕의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과, 다른 이에게 그런 강대한 힘을 부여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용왕과 계승식이라는 시스템 자체의 메인 서버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이곳 왕들의 묘소.

“물론 끌려오지 않을 방법도 있다. 영혼째로 소멸당하든가, 끌려오는 것보다 먼저 다른 물건에 봉인돼 버리든가. 그래서 몇몇 대의 묘소가 지금도 빈자리로 빠져있지.”

꼭 사라지고 싶다면 영혼째로 소멸하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다만. 용왕쯤 되면 다들 영혼에 해를 입히는 기술 정도야 교양으로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아트마레트라가 소름 끼치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작게 콧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초대가 말하길 때가 되면 묘소의 모든 왕이 해방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라는 게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행동에 살카르사와 아트마레트라는 깜짝 놀라 지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만큼 지금 지수는 경악하고 있었다.

‘초대 용왕은 여왕을 알고 있다.’

확실했다. 그것도 대충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여왕의 침식이 극에 달했을 때 이 던전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사실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갈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마도 자신만이 알고 있을 일이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마왕의 계획으로 인해, 이윽고 바깥의 세상은 여왕의 침식과 함께 영원히 멈춰버릴 테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멈춰버렸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당연히, 왕들의 묘소가 현실에 나타나 해방될 일 또한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지수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걸 알고 있는 존재라면 지수의 말 또한 이해해줄 것이다. 지수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초대를 만나게 해줘요. 지금 당장.”

진지한 목소리였다. 지금은 말 그대로 시간이 없었다. 지수의 표정을 본 아트마레트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생각이다. 애초에 그러려고 여기 찾아온 거니까. 하지만 한 가지, 네가 명심해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푸른 왕의 눈동자가 지수를 쳐다보았다. 여느 때보다 강렬한 예기를 품은 눈동자.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죽기라도 하는 것인가? 침을 꿀꺽 삼킨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트마레트라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한심해 보여도, 때리지 말고 참아야 한다.”

응? 지수가 잘못 들은 것 같아 눈썹을 찌푸렸다. 옆을 보니 살카르사가 정말 중요한 충고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아트마레트라는 따라오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빙룡왕 아트마레트라가 안내해준 것은 누군가의 묘소였다.

들어온 묘소의 풍경을 보니, 살카르사가 지수의 묘소를 보고 어이없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곳은 메마른 나무들 위에 보랏빛 하늘이 펼쳐진 고원이었다. 던전 안에서 보았던 마왕 마르카브의 성과도 비슷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암흑, 파멸, 통곡 뭐 그런 세상 모든 불길한 단어들을 다 가져다 놓아도 어울릴 것 같았다. 묘소 전체에 자욱한 피 안개에는 숨만 쉬어도 몸이 녹슬 것 같은 사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이 초대의 묘소라면, 그는 분명 두려울 만치 사악하고 포악한 용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자 살카르사가 말했다.

"여기 초대 놈 묘소 아닌데?”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은 정말로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시점이었다. 당장 초대를 만나서 대책을 논의하든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든 해야 했다. 다른 곳에 들러서 느긋이 잡담이나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자 아트마레트라가 저편을 삿대질하며 말했다.

“저기 있군.”

그가 가리킨 곳에 있는 건 두 명의 인영이었다. 그곳에서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한 명의 여자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청년을 발로 퍽퍽 차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본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쪽은 지수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여자는 다름 아닌 밴더스내치였다. 그녀는 화딱지가 나서 못 참겠다는 얼굴로, 땅바닥에 뒹구는 새하얀 청년을 연이어 밟고 때리고 하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렇게 땅바닥을 구르며 맞고 있는데도 새하얀 청년의 몸과 머리카락엔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밴더스내치가 소리쳤다.

“용왕! 아니라고! 아그리올라! 아니라고!”

“하나도 안 아픈데. 아그리올라 맞잖아요~”

그것은 정말로 미묘한 광경이었다. 밴더스내치는 정말로 온 힘을 담아 밟고 차고 하고 있는데, 땅바닥에 누워있는 새하얀 청년은 아파하긴커녕 아예 충격 자체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에 더 열을 받아 밴더스내치는 더욱더 강한 힘으로 남자를 걷어차고, 남자는 또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그러한 악순환이었다. 아트마레트마가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되니까, 아무리 짜증나도 때리면 안 된다는 거다.”

아트마레트마의 주먹이 꽉 쥐여진 채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저것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듯했다. 완전히 질렸다는 살카르사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이른바 어그로꾼이라 할 수 있었다.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저런 것이 초대 용왕이라니. 이미지랑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내 걷어차여 땅바닥을 구르는 청년이 말했다.

“제가 멋진 이명을 두 개 생각해봤는데. 아그리올라는 사룡왕이랑 마룡왕 중에 뭐가 좋아요? 역시 사룡왕이 더 멋있죠?”

“용왕이고 뭐고, 그런 이름 버린 지 오래라…!”

“알았어요. 사룡왕이 더 좋다는 거죠?”

하얀 청년은 아예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밴더스내치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조금만 더 있으면 혈압이 올라 죽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청년을 퍽퍽 차던 밴더스내치가 드디어 이쪽을 눈치챘다. 대충 삼십 번쯤 더 걷어찬 뒤의 일이었다. 밴더스내치는 구원이라도 받은 얼굴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왕님!”

지수를 향해 달려온 밴더스내치가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뒹굴거리는 새하얀 청년을 가리켰다. 저것 좀 어떻게 해달라는 표정이었다. 뒹굴대는 새하얀 청년은 상처도 흠집도 없었다. 미간을 꾹 누른 아트마레트라가 말했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지만, 저게 우리들의 원초.”

하늘색의 마력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아트마레트라가 손을 뻗는 것과 함께, 땅바닥에서 거대한 얼음기둥이 솟아났다. 얼음기둥이라기보단 빙하라고 하는 게 옳았다. 그것은 용언의 권능까지 가미된 절대적인 동결의 힘이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누워있던 새하얀 청년은, 얼음을 사르르 가루로 만들며 안에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초대 용왕, 진룡왕 루갈반다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은발의 청년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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