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준다는 걸 거절하기엔 (1) >
지수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괴상한 생물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난쟁이처럼 키가 작았고, 팔다리가 붙은 완두콩을 연상시켰다. 완두콩들은 그 몸에 학자 가운을 두른 채 콧수염이 달린 땡글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뭐야 저건?’
눈을 가늘게 뜬 지수가 생물들을 바라보았다. 완두콩들은 몬스터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생김새였다. 애초에 이쪽을 적대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풍경은 도서관이라 해야 할까 열람실이라 해야 할까, 수많은 책들과 종이들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땡글이 안경을 쓴 완두콩 같은 괴생물체들은 넓은 공간 안을 분주히 뛰어다니며 뭔가를 종이에 적어 내리거나 토론하고 있었다.
“모순이 생겨나는 부분이 있다 이 말이야.”
“그런 해석으로는 이 행동이 설명이 안 된다 이 말이야.”
십수 명의 완두콩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과 논쟁하거나, 혼자서 생각에 몰두하거나 무언가를 하나하나 검토해가며 연구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가만히 앉아 보고 있자니 그들이 논의하고 있는 것은 도서관의 책들에 대해서인 것 같았다. 일종의 독서 토론 모임이었다. 지수는 당황스러웠다.
‘여긴 대체….’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보면 그랬다. 자신은 분명히 루드비히의 손에 가슴을 꿰뚫리고, 영혼 상태에서 비몽사몽 어딘가로 흘러가다가 문 비슷한 것이 열려 안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내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였다.
“왕들의 묘소.”
그런 말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지수는 자신의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영혼 상태에서의 기억은 꿈처럼 몽롱한 상태였지만, 그 문구를 본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긴 던전일 텐데. 지수는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의자가 아니라 온갖 장식품들로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는 옥좌였다. 지수는 커다란 위화감을 느꼈다. 이래서야 마치 자신이 던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왕께서 깨어나셨다 이 말이야!”
지수의 생각을 끊은 것은 한 완두콩의 외침이었다. 그가 지수를 보며 소리치자, 다른 완두콩들 또한 지수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수를 향해 다가오기보다 먼저, 소리친 완두콩을 향해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쉬잇, 하고 주의를 주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엄금인 것 같았다. 예의범절이 바른 완두콩들이었다. 그리고 책을 가지고 연구하던 완두콩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손님이나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애로 가득 찬 자세였다.
땡글이 안경을 쓴 완두콩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지수가 입을 열기 전에 자신들 쪽에서 먼저 입을 여는 게 불경한 일이라는 느낌이었다.
눈을 찌푸리던 지수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이곳은 스나크 님의 묘소다 이 말입니다.”
안경 낀 완두콩 중의 하나가 말했다. 지수가 작게 입을 벌렸다. 묘소. 다른 말로 하면 무덤 터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는 경악스러움은 찾아오지 않았다. 자신은 루드비히에게 가슴을 관통당해 죽었다. 그런 실감이 분명히 있었고, 이곳이 자신이 무덤이라고 해도 그렇구나 하는 수긍만이 들었다.
그리고 앉아있는 지수에게 완두콩이 고개를 숙였다.
“존대를 하실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저희는 스나크 님의 일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입니다. 자기 팔다리에 대고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이 말입니다. 막 대해 달라 이 말입니다.”
“그래도 처음 보는 사이에 반말은 좀 불편해서.”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그 이상한 말투는 제발 어떻게 좀 안 됩니까. 하지만 역시 초면인 상대들에게 그런 지적을 하는 건 실례겠다 싶었다. 지수가 모여있는 완두콩들에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바빠 보이던데 하던 일 계속하세요.”
완두콩들은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당장에라도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상태였던 것 같았다. 지수 앞에서 말하고 있던 완두콩 한 명만이 안내역으로 옆에 따라붙었다. 지수와 완두콩이 걸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대체 뭡니까?”
“저희는 뭐든 알아내는 척척박사들이다 이 말입니다.”
완두콩이 말했다. 그 말에 지수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완두콩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끼고 있는 콧수염 달린 땡글이 안경은, 지수가 집행부에서 일할 때 끼고 다니던 그 안경과 유사한 형태였다. 잘 보면 유사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똑같았다. 턱을 매만지던 지수가 완두콩들 옆에 다가섰다.
“뭘 연구하고 있는 거죠?”
“새로운 도구로 쓸 지식을 알아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안내역인 완두콩이 책장에 가서 몇 개의 책을 들고 왔다. 그것은 군데군데 종이가 빠져있고 글자도 제대로 적혀져 있지 않았으며,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암호문으로 쓰여있는 책이었다. 다만 장정의 상태로 보아 아주 소중하게 보관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수가 눈썹을 팍 찡그렸다.
<허다인>, <정유현〉, <오성화>.
완두콩이 가져온 책의 제목들은 전부 지수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완두콩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28페이지에 나와 있는 행동을 보고 어떤 전제와 가설을 세웠는데, 139페이지를 보니 틀렸다는 게 밝혀졌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들이 그들이 연구하는 대상이었다.
즉 이곳은 거대한 독서 토론 모임이었다.
한 사람의 책에 나오는 내용. 등장하는 인물의 행동과 의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너무나 방대한 기반 지식이 필요한 탓에, 온갖 분야에 관한 연구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알아내면 그 알아낸 지식으로 다른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은 진전이 조금 막혀있는 상태다 이 말입니다.”
완두콩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의 생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만 뺑뺑이를 돌리며 연구한다 해서 몰랐던 걸 알게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완두콩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궁리하고 궁리하다 보면 알아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확신이라기보단 사실을 말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이자 긍지라는 듯이. 완두콩이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모든 짝수의 집합을 알고 있다면, 그걸 2로 나누는 것으로 모든 홀수의 집합을 알아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충분하고 적절한 과정을 거친다면, 하나의 지식으로부터 온 세상의 만상을 통달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저 책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다 이 말입니다. 완두콩이 에헴 기침하며 호언장담을 했다. 잘 모르겠는 책을 제대로 이해해야 해서 먼저 세상 전부를 이해할 것이라니 너무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지수의 마음속에서는 어딘가 깊게 수긍하고 있는 부분 또한 있었다.
기존의 것들에서 결론을 이끌어내 새로운 형태로 정립시키는 것. 창조가 아닌 조합과 변형. 그것이 지수의 방식이었다.
지수는 사고가 아닌 직관으로 깨달았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지수와 닮아있었다. 아니, 완두콩 같은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근간이 지수와 같은 곳에서 시작하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 완두콩들의 정체를 철저히 추궁해야 한다. 지수가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 했을 때, 커다란 문이 열렸다.
“새로운 왕이 동시에 둘이나 입주해왔다더니 진짜였나.”
“뭐야 이거,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도서관? 묘소가 도서관이야? 거 참 용왕이란 놈이 어지간히 범생이인 모양이구만.”
"살카르사, 여긴 네 안방이 아니다. 다른 왕을 존중해라.”
척척박사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떠들면서 나타난 것은 두 명의 남자였다. 머리색도 풍기는 분위기도 제각각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엄청난 미남이라는 것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남자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아니, 이상하잖아. 아까 구경하고 온 걔는 대충 봐도 꽤 센 것 같더만 자긴 왕이 아니라는 소리를 하는 별종이고. 요즘 애들은 다 이래? 나 때는 이렇게 얌전하지 않았는데.”
“그랬지. 그 탓에 나한테 물어뜯겨 왕위를 계승당했고.”
“야! 그거 다 상성 때문이거든? 속성 빼고 힘 싸움 들어가면 너는 잽도 안 돼! 한 번 진룡전쟁 다시 해봐 여기서?”
“그만둬라. 남의 집에서 시체를 치우게 하는 건 민폐야.”
그 말에 붉은 머리칼의 남자의 몸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단순히 살짝 힘을 끌어올렸을 뿐인데도 여기까지 얼굴이 뜨거울 정도의 열기였다. 입꼬리를 올린 붉은 남자의 표정은 반쯤 꼭지가 돌아있었다. 그가 빠득 이를 갈면서 말했다.
“하, 아트마레트마. 누구 시체가 구르게 될지 확인해볼까?”
“…아무것도 모르는군. 살카르사 넌 그게 문제야. 누가 네 집에서 싸우려 들면 일단 화가 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푸른 남자의 말에 붉은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 있는 완두콩들을 확인한 남자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명백한 모멸이 담긴 표정이었다.
“저딴 범생이가 화를 내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저게 용왕이냐 도서관 주인이지? 내가 살다 살다 묘소가 이런 꼴인 한심이는 처음 본다. 존중을 받고 싶으면 일단 힘이 있어야지.”
그 말에 푸른 머리칼의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네가 바보라는 거다. 내가 시체를 치우게 될 거라 말한 건, 우리 둘 양쪽 모두의 시체를 말하는 거였어.”
붉은 남자가 눈을 끔뻑였다.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너는 남의 역량을 읽는 것 따위엔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녀석이니. 꾸욱 미간을 누른 푸른 남자는 좀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다시 말해주었다.
“저 녀석은 혼자서 우리 둘을 죽일 수 있다. 이미 단순한 용왕 수준을 넘어섰어. 어쩌면 초대에 버금갈 정도로.”
푸른 남자의 말을 들은 붉은 남자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지수를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푸른 머리칼의 남자는 천천히 걸어와, 지수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제스처였다. 아까부터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던 지수는 일단 내민 남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묘소에 온 걸 환영한다, 스나크. 막내라고 해서 좀 귀여운 녀석을 기대했다만, 껍질을 까보니 완전히 괴물이군.”
푸른 머리의 남자가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수가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너희들은 뭐 하는 양반들이세요 하는 시선이었다. 방금까지의 대화로 대강 감을 잡고 있긴 했지만. 이내 가슴에 손을 올린 푸른 남자가 말했다.
“5대 용왕. 빙룡왕 아트마레트라.”
역시나. 나타난 두 남자의 정체는 전대 용왕이었다. 아그리올라 이전의 용왕들. 그리고 빙룡왕이 팔꿈치로 붉은 남자를 툭 치자, 쯧 혀를 찬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4대 용왕, 폭룡왕 살카르사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빙룡왕은 지수 혼자서 자신 둘을 쓰러뜨릴 수 있다 말했지만, 그건 지수 또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각오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만큼 그들에게선 얕볼 수 없는 수준의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수가 긴장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수는 알 수 있었다.
빙룡왕이니 폭룡왕이니. 묘소에 잠들어있는 역대 용왕들의 영혼. 이 자들 하나하나가 마지막 심연들 중 하나, ‘왕들의 묘소’라는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자신을 적대하는 게 아니라 우호의 악수를 내밀고 있다. 마치 동류이고 동지인 것처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시 말해.
‘이곳은 내 보스 룸이고….’
그리고.
죽어서 인도된 자신의 혼은, 보스 몬스터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