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9) >
간다, 라거나 시작하지, 같은 신호 따위는 없었다.
루드비히의 망토가 펄럭이는 것과 함께, 전방위로 이질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정지의 역장. 이번에는 가볍게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전력으로 발동하고 있었다. 지수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역장의 세기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안 통한다고. 그거.”
완전한 대칭형을 딱 맞게 꽂아넣는 이미지. 지수 또한 반대 방향의 역장을 만들어내 정지의 능력을 상쇄시켰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요 만큼도 당황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단지 정말로 지수가 자신의 능력을 상쇄시킬 수 있게 된 것인지 확인해 볼 심산으로 시험 삼아 쏘아 낸 것 같았다.
“확실히 그렇군.”
잠시 눈을 감았던 루드비히가 다시 눈을 치켜떴다. 순간 지수는 심장이 철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공기가 극도로 팽팽해졌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싶은 압박이 느껴졌다. 이것이 이 세상의 누구도. 아마 그 김유성조차 겪어본 적 없었을,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진짜 살의. 지수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영광인데. 드디어 전력을 보여주시는 건가.”
“그럴 필요가 있다면.”
루드비히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적으로 새하얀 빛이 발현되었다. 이내 나타난 건 마치 불법의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까마득히 복잡한 문양의 마법진. 그런 것이 루드비히의 등 뒤에 몇 개나 생겨나 서로 연동되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브로켄의 요괴(Brockengespenst).”
수많은 무지개 색의 마법진들은 마왕의 후광이 되었다.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루드비히는 말했다. 자신은 마도의 극에 이르렀기에 마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그리고 지금 지수는 그 말에 한 치의 허세도 들어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마왕이라는 칭호가 겸손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돌아가는 마법진들 하나하나가 흑마녀의 성채, 발푸르기스의 밤보다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런 것의 설계, 조율, 구현을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한 순간에 이루어냈다.
그리고 한 가지 또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역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기보단, 반쯤 확신하고 있었던 가설이 진짜라고 판명난 것에 불과했다. 얼마나 강대한 마법이든, 기초가 되는 고유한 계통과 발전시켜온 사상의 발자취라는 것은 남아있는 법이다. 주문을 해석하는 것이 특기인 지수에게 그것을 판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수의 거의 모든 마법은 룬 마술의 발동식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고, 완전히 다른 주문을 사용할 때도 룬 마술을 구성할 때의 요령이나 버릇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었다. ‘학파’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한 분야의 성취가 깊고 놓게 쌓이면 쌓일수록 숨기기가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수는 알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맞았다. 흑마녀의 능력을 스나크 사냥으로 재구성해, 자신의 힘으로까지 승화시킨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사용하는 마법. 그 원초가 되는 근간에 대해서.
“역시 당신이 백마녀로군.”
세상에 존재한다는 다섯 색깔의 마녀, 그 마지막 하나. 루드비히의 마법은, 마녀의 마도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마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지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히 흑마녀와 나누었던 약속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마녀의 힘을 결합시키는 것이 흑마녀의 고유 능력이라면, 마녀들의 힘을 다시 분리시키는 것은 백마녀가 가진 능력인 것이 당연하다.
수단은 찾아냈다. 이제 루드비히를 굴복시키든, 나중에 다음 백마녀를 찾아내든, 지수가 스나크 사냥으로 직접 재현해버리든 하면 될 뿐이었다. 어느 쪽의 선택지라고 해도, 일단 루드비히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게 전제지만. 그리고 수많은 마법진들을 등지고 선 루드비히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지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괜찮겠어? 나한테 마법을 향해도.”
그것은 도발이었다. 루드비히는 지금 자신에게 주문을 쏘려고 하고 있었다. 그건 그에게 있어 치명적인 행동이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에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까마득한 대전쟁 시절부터 루드비히가 굳건히 지켜온 철칙이었다. 당연히 그의 정신성에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정한 룰, 꺾을 수 없는 신념. 그런 맹세를 깨버리면 당연히 능력에도 저하가 찾아올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지수를 공격하든, 공격하지 않고 마법이란 수단을 봉인하든. 지수 입장에서는 득이 되는 일이었다.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 이런 선택지를 강요해온 건 언제나 루드비히 쪽이었기에, 지수는 어느 정도 유쾌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상관없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스나크. 너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어?"
“내가 마법으로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는 건, 맹세 같은 게 아니라 단순한 부탁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
말하는 가면 속의 눈동자가 작은 우수에 젖었다.
“전대 백마녀가 남겼던 말이지. ‘마법을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는 데에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타당하다 생각했고, 쓰지 않아도 할 일은 해낼 수 있었으니까 굳이 쓰지 않았다.”
이렇든 저렇든 딱히 상관없다면 부탁을 들어준다. 그게 사람 사이의 존중이라는 것이지. 작게 숨을 내뱉은 루드비히가 고개를 올려 지수를 노려보았다. 이미 그 눈동자에 망설임은 없었다. 등 뒤의 마법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회전했다.
“유일한 예외가 되어서 좋겠군.”
위험하다.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미 주문은 작렬해있었다. 찌익! 살갗이 찢어지며 거칠게 핏물이 튀었다. 찢어질 듯한 고통. 크게 뒤로 젖혀진 지수의 오른팔은 넝마가 되어있었다. 일격에 뼈가 어긋났고 근육이 너덜너덜해졌다. 살짝만 옆에 맞았어도 치명상이었을 것이다.
‘뭐야.’
지금까지처럼 일방적으로 느긋하게 제압한 뒤 천천히 설명해주는 공격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적을 배제하기 위한 공격.
‘말도 안 돼….’
지수가 멍하니 덜렁대는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고통 이전에 현실감이 없었다. 대응하기는커녕 반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떤 형태의 주문이었는지조차 제대로 잡아낼 수 없었다. 연상된 것은 김유성의 심검. 하지만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기술이었다. 지수는 깨달은 사실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발동 시간이 없어…?”
지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방금 루드비히가 쓴 건 지수의 룬 마술처럼 주문 구성이 극도로 빠른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라면 어떻게든 해석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포착한 순간 해석해낼 수 있다. 하지만 방금 루드비히가 쏘아낸 주문은, 주문을 구성하는 것부터 주문의 실제 발동까지 단 한 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엄청나게 빠른 것이 아니라 애초에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작과 끝이 완전한 동시였다.
“우선은 그 검이군. 용사의 능력은 경계해야겠지.”
마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검 형태의 밴더스내치가 날아가 박살 났다. 갓난아기 손가락을 꺾는 것처럼 손쉽게. 이것으로 검을 잃은 지수는 김유성의 절단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았다. 지수는 입을 벌린 채 마왕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스나크 네가 충고해준 거잖나.”
“뭐라고….”
“이래 봬도 해석사인데, 너무 많이 보여줬다고 했나. 확실히 그 말대로다. 그러니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생략한 것뿐이다. 상당히 귀찮지만, 네 눈에 익게 만드는 것보다야 낫겠지.”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드비히는 멀쩡한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눈이 좋다길래 그냥 휘두르는 과정을 생략하고 검을 내리쳤다. 그런 헛소리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냥 생략했다니. 그건 정말로 마법 자체를 지배하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뭘 놀라는 거냐. 나는 마왕이다.”
모든 마법은 나에게 복종하는 신하.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거다. 루드비히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거대한 충격이 발현했다. 이번엔 지수의 왼팔이 피투성이가 되며 뒤로 젖혀졌다. 팔째로 뜯어져 뽑혀나가지 않은 건 용왕의 막강한 내구력 덕택이었다. 지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만약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였다. 주문의 궤도와 목표 지점을 알 수 있다 가정해도, 이 정도 속도로 날아오는 주문이라면 미리 읽어내지 못하는 이상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루드비히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전달되는 것보다 무형의 주문이 지수의 몸에 작렬하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었다.
‘...꺾이면 안돼.’
그렇다면 온 신경을 더욱더 날카롭게 갈고닦을 뿐이다. 한순간 앞의 미래마저 읽어내도록. 지수가 눈을 번득였다.
‘불꽃.’
직감에 가까운 번뜩임이었다. 해석해서 읽어냈다고 하기엔 논리적 사고를 전개할 시간이 없었다. 찰나의 반의반으로 쪼개 얻어낸 인식. 이미 발동된 주문이 지수에게 작렬하기까지의 제로에 가까운 시간. 그 간격에서 지수는 희미한 실타래를 잡았다. 방어 주문을 만들어낼 시간은 없다. 오행의 이치. 지수는 수속성을 부여한 마나를 반사적으로 몸에 휘감았다.
“그게 마법인 이상, 내가 속성을 바꾸라 하면 바꾸고.”
주문이 지수의 몸에 도달하는 그 찰나.
분명히 불꽃의 성질을 띠고 있었던 무형의 주문은, 번개의 성질로 바뀌어 지수의 몸에 직격했다. 지수가 몸에 머금은 마력은 오히려 증폭제가 되어버렸다. 이번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살갗이 타는 냄새가 퍼졌다. 쓰러진 지수는 순수한 경악에 잠겨있었다. 이미 발동한 마법의 구조를 날아가는 도중에 바꿔버린다. 그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보이지 말라고 하면 보이지 않게 되고.”
쉴 틈도 없이 다음 주문이 날아왔다. 그 형태는 육안으로 감지할 수 없었다. 빛을 굴절시키는 주문으로 보호한 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였다. 맞으면서 버티다 보면 둥지의 자동해석을 이용해 대응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라면 그전에 지수가 죽어버릴 것이다.
지수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 회복의 룬을 발동했다.
“배신하라고 하면 배신해야 하는 거다.”
루드비히가 손을 내뻗었다. 이내 지수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던 회복의 룬은 지수의 제어를 벗어나, 마음대로 빛의 검으로 그 성질을 바꾸었다. 지수를 회복시켜야 했던 룬은 반대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지수의 가슴을 꿰뚫었다. 지수가 입에서 컥 피를 토했다. 같은 마법사와 싸우는 건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일 뿐이었다.
이것이 마왕. 요만큼도 봐줄 생각이 없는 루드비히의 진심.
지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은 자신이 마법을 쓰지 않고서 상대와 맞서는 것 따위, 싸움이라 하기도 뭐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짜 적의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은 단순한 여흥. 지수는 그게 반쯤 말장난이라 생각했지만, 아닌 게 아니라 마왕은 정말 손발을 묶고서 싸우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피 묻은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지수는 조금이라도 더 루드비히를 파헤쳐 해석하려고 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저 마법진들이, 계산기 같은 건가…?’
저것이 주문의 초고도 연산을 대신해주고 있다. 그러니 저것을 파훼하면…. 일단은 버텨야 한다. 지수의 몸에서 연보라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험프티 덤프티. 중력의 막은 달걀의 껍데기처럼 지수의 몸 주변을 감쌌다. 웬만한 힘으로는 이 방패를 깨어낼 수 없을 것이다. 루드비히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신기한 힘이군. 하지만….”
루드비히가 가볍게 똑똑 노크하자, 중력의 구체에 쩍 금이 가더니 과자처럼 조각이 나서 파괴되었다. 웬만한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방패였지만, 루드비히는 웬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있는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게 스나크 네가 원한 거였나?”
지수는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잡으려 애썼다. 루드비히는 지수의 앞에 쓰러져있는 지수를 내려다볼 뿐, 확실한 마무리를 짓지 않았다. 이미 승부는 뒤집을 수 없는 상태였다. 루드비히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회복시켜주지.”
“뭐…?”
지수가 몽롱한 와중 들린 목소리의 내용을 의심했다.
“한마디만 해라, 이제 그만 쉬겠다고.”
루드비히의 손 위에 회복의 마력이 일렁였다. 마왕은 회복 마법조차 압도적이었다. 그 손에서는 죽기 직전의 사람이라도 몇 초 만에 쌩쌩한 상태로 돌려놓을 법한 힘이 느껴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수가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이제 그만 쉬는 것이었다. 그 말만 하면 바로 회복시켜 주겠다니.
“알아주면 좋겠군. 나는 너를 죽이고 싶지가 않아, 스나크. 네가 내 계획의 유일한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다. 네가 방해하지 않겠다 말만 한다면 너를 죽이지 않겠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어쩌려고….”
지수가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루드비히가 지수의 등을 감싸들었다. 검은 망토가 나풀거리며 가면 속 눈동자가 말했다.
“상관없다. 내가 믿을 수 있다 판단했으니까.”
그 결과 속는다면 그건 단지 내가 미숙한 것일 뿐. 지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온갖 의심과 꿍꿍이속으로 들어차 있는 의뭉스러운 남자라는 인식이 모두 날아가 버릴 정도로, 올곧은 눈동자였다. 약속한다면 믿어주겠다. 오직 그뿐이었다.
“스나크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으니, 직접 말로 해서 내뱉는다면 의심하지 않는다. 그 즉시 곧바로 치료해주지.”
지수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 한마디에 자신을 죽이려 한 적을 살려주겠다고 하는 루드비히가 바보 같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완벽하게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수의 퇴로를 차단했다. 바보 같은 것은 그 한마디를 내뱉지 못해, 사실상 자살을 택하려고 하는 자신이었다. 지수가 말했다.
“난 인간 아니고…. 용왕인데?”
피식 뱉은 지수의 농담에 마왕의 눈동자가 가라앉은 순간.
체내에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분출시켜, 마왕을 뿌리치고 날아갔다. 손에 잡힌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결계의 중앙에 꽂혀있던, 용사의 성검. 용사의 투기와 세상 무엇보다도 상성이 좋은, 김유성 그 자체와 같은 무구였다. 이것이라면 준비과정 없이도 김유성의 능력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모든 것을 갈라버리는 용사의 검. 마왕의 목을 베어낸다면 이것으로 자신의 승리였다.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내서, 망설임 없이 내리친다. 그리고 베어낸 마왕의 몸은 허상이 되어 사라졌다. 지수의 등 뒤에서 나타난 마왕이 한숨을 쉬었다.
“유감이군, 스나크.”
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뚝뚝 흘러 떨어지는 핏방울. 그 손은 지수의 가슴에 파고들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회생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지수의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가는 게 느껴졌다. 빛나는 용왕의 혼이 허공을 유영한다. 그것을 애도하기라도 하는 듯이, 루드비히가 묵례했다.
같은 뜻을 품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마왕의 이레귤러는 용사와 함께 최대의 적이 되어, 지금 죽어서 사그라졌다.
“그리고, 이제 세계는 멈춘다.”
고개를 든 루드비히가 영원의 보옥을 향해 걸어갔다.
***
이내 지수의 영혼이 어딘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김유성은 말했다. 용사는 죽어도 부활할 수 있지만, 자신은 너무 잘난 탓에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다고. 또 지금은 영혼째로 존재 자체가 소멸한 탓에 더 이상 부활할 수 없었다.
죽은 용사의 혼은 여신의 인도를 받아 어딘가의 교회에서 부활한다. 그런 용사의 능력 또한, 지수는 어느 정도 재현하고 있었다. 단지 죽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는 힘이기에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 있다고 해도, 진짜 용사가 아닌 지수의 혼을 인도해줄 등대가 있을 리 없었다.
‘최악이야.’
애매하게 능력이 재현된 탓에 환생도 부활도 불가능할지 몰랐다. 어쩌면 이 상태로 영원히 세상을 표류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무언가가 끌어당기듯 천천히 영혼이 유영했다. 지수의 영혼은 작은 안도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천국인지 뭐시기가 부르고 있는 건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잠깐일지도 모르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영혼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그런 관념이 옅어져 있었다. 거의 무감각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리고 흘러가던 지수 앞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어딘가로 끌려가듯 흐르고 있던 영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 문이 바로 지수의 영혼을 끌어당긴 목적지였다. 영혼 상태에서도 지수의 해석 능력은 건재했다. 문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이름은 지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왕들의 묘소>
지수가 도착한 것을 알았는지, 문은 저절로 끼이익 열렸다. 모든 왕이 돌아가게 될 심연이 용왕 스나크의 혼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