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8) >
눈치채면 모든 전제가 무너져있었다. 사실 마왕은 여왕의 봉인 따위 고쳐놓지도 않았다. 지금도 여왕은 잠에서 뒤척이는 채 침식을 계속해가는 상태이며, 이 세상은 멸망으로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사실들이 뒷전이 될 만큼, 루드비히가 밝힌 계획은 충격적이었다.
“세상을 멈출 거다.”
모두가 다가올 미래에 불안해할 필요 없이 평온 속에서 있을 수 있도록. 책을 들고 있는 루드비히가 읊조렸다.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루드비히란 남자가 어딘가 어긋나있는 건 알았지만 이건 완전히 미친 수준이었다. 온 세상을 영원히 멈춰버리겠다는 건 즉, 조금 특이한 방법으로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마왕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마치 그것만이 구원이라는 듯이.
“...가능할 리가 없어.”
창백해진 지수가 말했다. 루드비히가 무지막지한 힘을 지닌 존재란 건 알고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지금의 지수보다도 한 계단 위에 서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세계 자체를 멈춰버린다는 건 개인이 가능한 행위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불가능하다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가능하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지수의 말에 가볍게 반박했다.
“이 거대한 결계 자체가 그걸 가능케하기 위한 구조물이지. 스나크 네가 네버랜드를 생각보다 빨리 무너뜨려버린 탓에, 여왕을 다시 봉인하는 건 어렵게 됐다만…. 불완전한 영원의 보옥이라도 내 능력의 그릇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지.”
결계의 중심까지 뚜벅뚜벅 걸어간 루드비히가, 은은히 빛나고 있는 보석을 만졌다. 지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것을 본 적이 있었다.
촌장이 앨리스에게 소원을 빌어 숨겨놓았던, 네버랜드의 핵이었다. 루드비히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너도 초월자가 됐으니 알고 있겠지만, 그 심상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면 위력의 문제는 무의미하다.”
지수는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해봤자 뭐라고 대답해줄 만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루드비히는 지금,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내뱉은 지수의 말에 하나하나 설명하며 논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루드비히가 말을 이었다.
“세상을 멈추는 데에 필요한 건 크게 세 가지다. 이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 그 능력을 머금을 중심이 될 촉매와, 능력을 온 세상에 내리쬐어 줄 증폭장치.”
그것은 진지한 반박이라기보다는, 기이한 현상을 신기해하는 어린아이에게 차근차근 원리를 설명해주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애 취급 당하는 것에 짜증을 낼 상황이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왕이 진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세 가지 전부 준비가 되셨다고.”
“이미 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나?”
지수가 눈을 찌푸렸다. 각오.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생각을 양보하지 않는 빌어먹을 똥고집이라는 점. 이것은 이미 확인이 끝났다. 능력을 담을 촉매라는 것도, 네버랜드의 핵을 중심으로 구축된 이 결계 자체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마지막의 증폭장치라는 건 모르겠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 만화경.”
지수의 생각을 읽은 건지, 루드비히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빛나며 촤르륵 넘어갔다. 다음 순간 지수의 모든 공격을 반사했던 그 빛의 막이 또 다른 형태로 선보여지고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능력을 난반사시키는 만화경이었다.
“이걸로 이 세계의 책갈피가 완성된다.”
지수는 오싹함을 느끼며 꿀꺽 침을 삼켰다.
세상을 멈춰버릴 거라는 루드비히의 계획. 그것은 이미 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방해해야 한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늦어도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세상이라는 정밀한 기계의 작동 정지 스위치가 지수의 눈앞에 놓여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세계를 멈출 수 있었다.
지수가 꽉 주먹을 쥐고서 루드비히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게… 여왕한테 잡아먹히기 전에 당신 손으로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말이랑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다르지. 세상을 영원히 멈춘다고 해도,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영원은 아니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외부에서의 도움이 찾아올 수도 있다. 나중의 언젠가는 예측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몰라.”
루드비히는 계단에 앉아있는 채로 말을 이어갔다.
“스스로 불가능한 일은 깔끔히 포기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구원을 맡긴다. 용사가 한 일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어.”
그리고 일어선 루드비히가 지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 이 세상이 멈출 페이지를 정하는 건, 나보다도 너에게 어울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세계를 지키려고 노력한 존재는 스나크 너와 용사 정도니까. 그러니 네가 해석해서 네가 결정해라. 멈춰서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순간이 언제인지.”
루드비히의 목소리에는 친애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세상을 위해 분투한 자에게 바치는 경의와 존중이었다. 루드비히는 이미 지수를 적으로도 무엇으로도 보고 있지 않았다. 김유성도 지수도, 여왕에게 세상이 멸망당하는 게 싫다. 그 대전제 아래에서 조금 다른 의견을 냈을 뿐인 동지일 뿐이었다.
단지 두 사람은 틀린 방법을 택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여왕에 대해서 제대로 모를 테니까. 그러한 연민. 그 말에 사그라들고 있던 지수의 전의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색깔의 마력이 뒤섞이며 일렁였다.
“...취급 하지마.”
“뭐?”
지수가 화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한 순간 마음이 동한 자신 같은 얼간이는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루드비히는 하필이면 용사 김유성을 자신과 동류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번뜩인 지수가 루드비히의 손을 거칠게 쳐내었다.
“같은 취급 하지 말라고.”
김유성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와중에도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기지 못 하는 걸 알고서도 끝까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루드비히의 온화한 시선은 오히려 모욕이었다.
지수를 바라보는 루드비히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착각하고 있었어.”
분명히 마왕은 최강의 적이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이쪽을 진심으로 죽이려 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아그리올라와 싸울 때보다도, 협회장과 싸울 때보다도 긴장을 놓고서 싸우는 면이 있었다. 마치 대련을 하는 것처럼.
“아무리 지금은 다툰다 해도 나중의 언젠가, 봉인에서 여왕이 완전히 풀려나버린 끝에서는 같이 싸워줄 거라고. 어쩔 수 없으니 힘을 보태주겠다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옆에 서줄 거라고. 마음 한 켠에서는 그런 낙관을 가지고 있었어.”
반드시 박살내야 할 적이라는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고방식이 닮아있기 때문인지, 경탄해 마지않는 작가이기 때문인지. 어떻게 해도 루드비히를 완전히 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나중의 언젠가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정정당당하게 마왕을 쓰러뜨렸을 때는. 넘어진 루드비히에게 손을 내밀며 내가 이겻으니 내 말대로 하는 거다 하고 웃으며 악수하는.
그런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얼빠진 생각도 없었다. 언젠가는 너무 늦다. 지금 루드비히가 이 세상에서 빼앗으려는 것이 바로 그 나중의 언젠가였다. 지수의 둥지가 격렬히 일그러졌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이제 알았어. 나는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돼.”
눈동자에 차오른 건 순수한 적의였다. 지수는 이제 와서야 자신과 루드비히,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를 품었다. 그것은 아마도 처음으로,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와 용왕 스나크가 완전한 적으로서 마주한 순간이었다.
“나는 스나크 네가 영리하다는 걸 안다. 이해력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왜 내 의견에 찬동해주지 않는 거지?”
지수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바로 이것이다. 자신 쪽이 더 강한데도 말로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루드비히의 이러한 면모는 지수의 가치관과도 합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싸움을 그만두고 대화를 시도하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타협이 불가능한 지점이라는 게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왕을 쓰러뜨리려는 자와, 무슨 일이라도 여왕에게의 패배를 전제해놓고 행동하는 자. 합의점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서로는 서로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고, 가능한 것은 오직 상대방의 배제 뿐이었다.
용사와 마왕은 숙적이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만 한다. 그런 상식을 여기까지 와서야 겨우 깨달았다.
“짐승 같은 야만성…. 용사에게 나쁜 것만 배웠군.”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유감스러움을 표했다. 지수는 지금 모든 잡생각을 그만두고, 온전히 루드비히를 박살내는 것만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싸움에 있어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당연한 일을 지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한숨을 쉰 루드비히가 검은 망토를 젖혔다.
“가만히 있어라. 이제 모두 그렇게 될 테니.”
또다시 이질적인 기운이 쏟아져왔다. 모든 것을 멈추는 마왕의 역장. 지수는 절대중립을 이용해서 그것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루드비히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산소 봄베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바닷속에 잠수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세계 전체를 멈춰버리면, 지수라고 해도 절대중립을 끝없이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순간이라도 절대중립이 해제되는 순간, 그걸로 끝이었다. 정지한 공간에서 새로운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는다. 절대중립이란 보호막이 걷히면, 지수는 그대로 멈춰 재발동은 영원히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눈동자를 크게 떴다. 이상한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절대중립을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마검을 휘둘러 마왕의 능력을 베어낼 생각도 없어보였다. 절대중립이 없다면 마왕의 역장 안에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도.
‘어째서지.’
자멸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에 루드비히는 사소한 의문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 스타퍼를 회수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화를 씩씩 내며 골칫거리가 된 용왕이 멈춰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역장이 지수를 감싼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지수의 주변에 톱니바퀴 같은 형태의 마력이 돌아가며, 마왕의 역장과는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한 순간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냈다. 원리는 해주의 비술과 같았다. 어떠한 구조의 외곽을 알아내, 그것과 정 반대의 요철을 지닌 구조를 맞부딪치는 것으로 그 기능을 상쇄, 정지시킨다.
“…너무 많이 썼다고, 그 기술.”
지수는 입꼬리를 올리지 않은 채 정색했다.
“이래봬도 해석사란 말이야.”
지수는 마왕의 역장 안에서 맨몸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집중만 제대로 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스나크 사냥. 마왕 루드비히의 ‘정지’를 사냥한 용왕 스나크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정지를 정지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루드비히는 눈썹을 찌푸렸다. 쇼 스타퍼를 완전하게 해석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수치와 외부 구조만을 반 억지로 읽어내, 그것에 하나하나 끼워맞춰 엉망진창인 항체 역장을 만들어낸 것 뿐이다.
수학 문제로 비유하자면 제대로 된 풀이를 써서 정답을 이끌어낸 게 아니라, 문제의 본질은 하나도 모른 채 노가다로 들이박아 오류가 없는 알맞은 숫자를 하나 찾아낸 것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 거 아니라고 코웃음치기엔, 지금 지수가 내딛은 한 걸음은 너무나 대단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이 아닌 마왕의 기준에서도 그러했다. 루드비히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처음 겪는 종류의 위기감이었다.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어쩌면 조만간의 일일지도 모른다. 용왕 스나크의 어금니는 이윽고 자신의 목에 닿는다.
“나랑은 싸우지 않는다고 했나?”
돌처럼 굳은 루드비히에게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지수는 자신을 정지시키려는 역장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가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을 정지시켜 박제로 보존하려는 마왕의 계획에 있어 지수의 존재가 치명적인 변수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루드비히에게 있어서도 스나크는 숙적.
“이제 당신도 나를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됐군.”
“스나크….”
지수의 말대로였다. 이미 그만하라고 가볍게 주의를 줄 단계는 지나버렸다. 용왕 스나크는 마왕의 진정한 적이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루드비히의 계획을 근본적으로 박살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요컨대 너무나 위험하다.
도발해오는 지수의 말에 루드비히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적의가 마왕에게서 흘러나왔다. 지수가 마력을 가다듬었다. 용왕과 마왕의 싸움, 제 2회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혈투.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죽이려고 하는, 진짜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