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7) >
‘식은땀을 흘리는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체크 메이트. 필살이라고 생각했던 수가, 오히려 자신의 말을 넘어뜨리는 결과로 되돌아왔다. 지수가 이를 갈았다.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루드비히의 정령 또한, 재버워키와 같은 ‘이야기의 정령’. 수많은 형태로 변화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 쯤은 당연히 예상해야 했다.
‘모든 공격을 반사하는 건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용언마탄의 몇 배에 달하는 위력의 주포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낸 것을 보면, 단순한 힘으로는 저 거울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완전히 사기잖아, 하는 불평은 내뱉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영역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저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뤄, 지수의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튕겨낼 수 있도록 거울들을 전개하고 배치한 것은 순수한 루드비히의 역량이었다. 강한 능력에 의존하거나, 싸우는 방법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냥 괴물이야.’
백전연마라는 표현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마왕이 지수의 손에 쓰러진 장면 자체가 머릿속에 상상되지 않았다.
지수가 다음에 어떻게 할지 궁리하고 있을 때, 루드비히는 그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부리는 여유나 방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루드비히는 아예 지금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어보였다.
반격의 준비도, 지수의 행동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긴장도 없다. 말 그대로 몸에 힘을 뺀 채 나른하게 서있는 상태였다. 그것에 기분이 상한 지수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얕보는 건가?”
“얕보지 않는다. 오히려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지금의 너는, 아마 여왕을 제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일 거다. 역대 용왕 중에서도 1, 2위를 다투겠지. 내가 너만 했을 시절을 생각하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야.”
하지만. 루드비히가 뚜벅뚜벅 구둣발로 걸어왔다.
“나와 싸워서 이긴다느니 진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애초에 의미가 없어. 확률을 따지기 이전에 전제부터가 틀려있다.”
“무슨 뜻이야.”
“애초에 나는 이 세상의 누구하고도 싸워본 적이 없어. 가볍게 주의를 주거나, 위험한 짓을 저지르려는 자를 멈추거나. 필요한 것이 있기에 가져왔을 뿐이지. 대답해 봐라, 스나크. 너는 내가 왜 마왕이라고 자처하는 지 알고 있나?”
지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마왕이라는 이명을 자처하는 이유. 떠올린 것은 S급 던전 안에서 만났던 마왕 마르카브였다. 그 흡혈귀처럼. 마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건, 모든 악마들의 왕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지수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란 뜻이겠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마법사. 마법의 왕이기에 마왕인가….”
“그래. 모든 마도에 통달한 자, 그렇기에 마왕. 따라서 나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마법의 싸움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너를 상대로, 단 한 번의 주문도 발동하지 않았어.”
정지의 역장은 마법 같은 게 아닌 그의 능력이었고, 앨리스의 거울은 주문이 아니라 순수한 정령의 힘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지수는 얼어붙었다. 해봐야 반. 지금 마왕은 자기 실력의 해봐야 반만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루드비히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실력의 반은커녕 정말 제대로 싸우고 있지조차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하나의 엄정한 선언이었다. 평화주의자. 나는 싸우지 않는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마왕의 싸움이라 정의한다면, 나는 결코 마법으로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지수는 오싹함마저 느꼈다. 설마 루드비히는 지수와의 싸움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왔던 행적 전부에 있어서….
“마법으로 누군가를 공격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건가.”
“만약 그렇게 했다면 아그리올라 따위야 목줄로 묶어두고 애완동물 삼아 끌고 다닐 수 있었겠지. 어쩌면 너라도.”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농담조였지만, 과장된 일을 말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마왕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에 마법을 쓰지 않는 건 신념, 혹은 약속의 문제일 뿐. 마왕이 마음 먹었다면 그런 일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만한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수는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돌파구를 찾아낸 듯한 느낌이었다. ‘마왕은 이쪽을 마법으로 공격할 수 없다’. 이 정보는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실마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의 어렴풋한 예감이었지만, 그게 분명 마왕을 몰아붙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사용하게 해주지, 마법.”
일단 초월자의 영역에 이르렀다면, 그 능력을 이루는 근간은 마력 같은 게 아닌 심상과 정신성. 그렇기에 자신이 굳게 다짐한 신념이나 각오에서 등을 돌리는 순간, 형태를 이루었던 능력에 균열이 생겨 그 힘은 반감되거나 사라진다.
김유성이 언제나 올곧게 직진하지 않고 어디선가 타협해 방향을 꺾어버렸다면, 모든 걸 베어가르는 용사의 검은 더 이상 모든 걸 베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과 똑같은 일이다.
마왕이 상대방을 마법으로 공격하지 않는 것이 그냥 지금 잠깐 기분 전환 삼아 그러는 것이 아니라, 훨씬 예전부터 지켜왔던 자기 자신의 철칙이라면. 그것을 깨뜨리게 만드는 것으로 마왕은 자신의 정신성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지수가 양손으로 황금의 검을 잡았다.
피의 분출이 지수 주변에서 조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보라색 마력이 흩날리는 것과 함께, 지수의 몸에서 중력의 속박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전개된 수많은 룬의 문자들은, 지수의 이야기를 노래하듯 글자로 이루어진 시의 날개가 되었다.
루드비히가 미래에 움직일 궤도를 예측한다. 또한, 모든 힘을 가속에. 김유성을 상대해본 자신이기에 알 수 있었다. 용사의 검 앞에서는 상대방이 어떤 준비를 하고 방어벽을 세우든 의미가 없었다. 그저 지수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에 다다랐을 때, 단숨에 쇄도해 루드비히의 몸을 양단한다.
“조율은 맡긴다, 밴더스내치.”
<왕에게 만세를.>
지수가 잡고 있는 검의 보석이 빛났다. 지금 지수가 들고 있는 황금의 검은, 용의 영혼이 깃든 마법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수가 온 힘을 다해 엑셀을 밟는다면, 핸들을 쥐고서 폭주하지 않게 능력들을 한 데 묶는 것이 그녀의 몫이었다.
‘이제는 마법사가 아니라 마검사군.’
지수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수준의 혼종이었다.
그리고 모든 능력이 폭발했다. 지수의 신형은 비치지도 않을 속도로 터져나가며 황금의 검을 올려치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또다시 초가속을 쓴다고 해도 놓치지 않는다. 다음 순간에 루드비히가 다다를 위치. 확실하게 해석했다. 모든 것을 베어내는 용사의 검은 설령 마왕이라고 해도 양단할 수 있다.
다음 순간루드비히의 어깨죽지를 이 검이 찢어내는 것은 확정된 사실이다. 아마 루드비히 또한 상황을 읽어내고 있겠지. 그렇기에 마법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어?”
그리고 폭풍을 머금은 지수의 검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갈라냈다. 검을 휘두른 지수가 입을 벌렸다. 이럴 리가 없었다. 바로 이 타이밍, 지수의 검을 피하려던 루드비히가 이 지점에 다다를 것은 필연이었다. 동작에 페인트를 넣어 속였다,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지수는 현실을 전부 해석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당연하다는 듯이 운명을 피해냈다.
“너는 의미가 없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건가.”
그리고 바로 앞에서, 루드비히의 구둣발이 지수의 검을 밟아 땅바닥에 꽂아넣었다. 지수가 창백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해석해서 예측한 타이밍이 빗나갔냐고?”
루드비히는 지수의 의문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야 그는 지수가 해석 능력을 각성한 원초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수와 같은 시야에서 상황을 관조하고 있으니, 이쪽의 심중을 읽어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간단히 정답을 말해주었다.
“한 순간 전 시점에서 나 자신을 ‘멈췄다’. 그 결과 박자가 어긋났지. 아무래도 그것까진 읽어낼 수 없었던 모양이군.”
지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지수를 상대함에 있어서, 루드비히는 완벽하게 능숙했다. 마치 해석 능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그리올라도, 용사의 능력도, 아직 열리지 않았던 S급 던전조차.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모든 파훼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에서 지수만이 예외가 될 리는 없었다.
루드비히는 용왕 스나크의 공략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곧바로 반격해서 지수를 끝장낼 수도 있었을 텐데, 루드비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어른스럽게 지수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다시 봉인의 중심 쪽으로 걸어갔을 뿐이었다. 지수는 자신이 싸우고 있지 않다는 루드비히의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것은 말장난이나 여유의 표현 같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를 당해내고 있는 것은 저쪽이 더 강해서라고 생각했다. 상당한 실력차가 있으니까, 웬만한 방법으로는 당해내지 못하는 거라고.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다. 루드비히의 힘이 지수와 비슷한 정도였다고 해도 아마 지수는 루드비히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통찰….’
말 그대로 이건 싸움도 뭣도 아니었다. 저쪽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일방적인 공략일 뿐이었다.
지수는 용왕이 된 자신이라면 마왕이 상대라도 어떻게든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루드비히가 지수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힘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김유성은 자신의 능력이 있으면 마왕과도 제대로 붙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건 루드비히가 김유성을 공략할 수 있을 만큼의 힘만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지수는 처음으로 알았다.
자신은 이 남자에게 이길 수 없다.
싸움은 끝났다. 어쩌면 시작하지도 않았던 싸움이었다. 고개를 떨군 지수가 걸어가는 루드비히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그런 힘이 있으면서….”
지금이라면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 존재인지. 그가 숨겨둔 힘을 전부 꺼내든 채로 기천의 마법들을 사용한다면, 아마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강한데…. 왜 여왕을 쓰러뜨리려고 들지 않지? 당신은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려 드는 겁쟁이야.”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가 지금이라도 여왕과 싸운다고 말한다면, 지수는 온 힘을 다해 루드비히에게 협력할 용의가 있었다. 지수 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루드비히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달관한 듯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루드비히는, 지수의 그 말에 처음으로 반응했다.
“시도해보지 않았다고?”
이쪽을 돌아본 가면 속의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감정이 타올랐다. 심상해석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보는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분노였다.
“스나크 너는. 내 이 힘의 근원이 뭐라고 생각하지?”
단순한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수의 스나크 사냥 같은 초월의 영역에 이른 기술. 루드비히가 사용하는 저 정지의 역장이 발현된 근원, 루드비히의 정신성. 그 정체를 묻는 질문이었다. 지수가 대답하지 않자 루드비히가 말했다.
“피할 수 없는 멸망이 있다. 삶이라는 이야기에서 얼마나 큰 행복을 움켜잡았다고 해도,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반드시 끝은 찾아오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의 결말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어. 세상 자체를 먹어치워버리는 존재. 여왕은 살아있는 종말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그것은 시도해보지도 않고 포기한 겁쟁이가 아니라, 여왕에게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도전해온 자의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끝에 꺾여버린 자의 눈빛이기도 했다.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울려퍼졌다. 지수 앞으로 걸어온 마왕은 자신의 가면을 지수의 코앞까지 들이댄 채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이 마음이 태어났다.”
"......."
“무섭다. 손에 넣은 이 행복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제발 부탁이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모든 걸 끝내버리지 말라고. 가능하다면 무릎을 꿇고서 빌고 싶을 정도로, 누구보다 절박하게 소망했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싶다. 도망칠 수 없는 끝 따위는 없었으면 좋겠다. 쭉 이대로였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발현한 것이 정지의 능력. 바로 다음 장에 손에 넣은 행복을 놓치게 된다면, 차라리 페이지를 더 이상 넘기지 않고 멈추겠다는 심상. 그것은 여왕이 마왕에게 찍은 패배의 낙인이었다. 루드비히는 여왕과 싸우지 않는 게 아니었다.
“내 능력은, 나의 절망이다.”
애초에 여왕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태어난 힘. 그렇기에 여왕과 맞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지수는 빠져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수의 해석 능력으로도 미처 다 해석할 수 없었던 이 결계. 이것이 여왕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면. 단순히 안에 있는 것을 가두는 기능이라면, 얼마나 고도의 것이라한들 지수가 파악할 수 없을 리 없다. 그렇다면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던 전제가 뒤집히기 시작한다.
이것이 애초에 봉인을 위한 결계가 아니라면? 김유성은 루드비히를 속였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루드비히 또한 김유성을 속이고 있었던 거라면.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리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설마.”
“이제 알았나 보군, 의미가 없다는 뜻을.”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더 이상 싸울 필요는 없다. 스나크, 너는 이미 충분히 힘냈어.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라. 너의 세상이다. 친구들과 즐겁게 놀면서, 웃는 얼굴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라. 그리고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순간에 이렇게 읊조리는 거다.”
누구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힘낸 너라면, 책갈피를 꽂아넣을 페이지를 고를 자격이 있다. 마왕이 조용하게 말했다.
“시간이여 멈춰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지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이미 그냥 정신병이라고 부르기도 뭐했다. 여왕은 쓰러뜨릴 수 없다. 여왕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세상은 멸망한다. 그런 모순에 고뇌하던 루드비히가, 김유성의 소실로 구석에 몰린 끝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답.
“그래, 나는….”
이야기의 마지막이 배드 엔딩으로 정해져있다면, 영원히 페이지를 넘기지 않겠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선언했다.
세상을 멈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