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6) >
여왕을 봉인하고 있는 결계 속. 루드비히의 가면 속 눈동자가 흔들렸다. 있을 수 없는 광경이 앞에 필쳐지고 있었다.
“스나크…. 네가 어떻게.”
“왜, 영문을 모르겠어?”
지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바깥과 단절되어있어야 할 여왕의 봉인 안에 외부인이 들어왔다. 그것도 나타난 건 자신의 손으로 환상의 회랑의 그림 속에 묻어버린 지수였다. 루드비히라고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그런가. 용사가 또 내게 엿을 먹인 거군.”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눈썹을 찌푸렸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근처에 있는 성검과, 지수가 발하고 있는 투기를 슬쩍 바라보기만 하고서 단숨에 정답을 내뱉었다. 그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변수들을 전부 고려하고 하나하나 소거해나가 이른 결론이었다.
‘하긴, 저쪽도 상황 해석에는 도가 터 있겠지.’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한 것은 루드비히가 곧바로 정답을 맞혀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정 무서운 것은 벌써 마음의 정리를 끝낸 듯 어깨를 으쓱이는 담담함이었다.
김유성이 무슨 방법을 썼는지, 지수에게 어떤 말을 전해줬는지. 구체적인 정황까지 완전하게 파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지수에게 추궁하지도 않았다. 스나크가 나타난 것은 죽은 김유성이 꾸며둔 책략이다. 지금 루드비히에게 필요한 정보는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좋다고 봉인을 부수러 온 건가?”
루드비히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것은 타고난 냉정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당황하고 있어봤자 득이 없으니 그만두었다는 느낌이었다. 바로 저것이었다. 철저히 합리라는 틀 위에서 움직이는 듯한 저 기계적인 태도가, 언제나 지수를 거북하게 했다. 그를 앞에 두고 있으면 왠지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위축돼선 안 된다.
루드비히가 망토를 휙 젖히자, 예의 그 은색 기운이 루드비히의 몸을 중심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쇼 스타퍼. 능력이고 몸의 움직임이고 힘의 흐름이고 워고,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역장이었다. 지금의 지수라면 둥지를 펼치기만 해도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지만, 굳이 발동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지는 시키지 못해도 정체는 시킬 수 있다는 거지.’
절대중립으로 마왕의 역장을 무효화한들, 그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지수의 움직임이 금떠진다. 루드비히 수준의 적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그 잠깐의 지연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수에겐 그런 페널티를 감수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보팔 소드.”
지수의 그림자에서 룬이 각인된 네 개의 마검이 튀어나왔다. 용린의 만년필, 밴더스내치를 칼자루 삼아 쥔 지수가 네 자루의 검을 하나의 장검으로 만들었다. 용사의 황금색 투기가 천천히 흘러가 지수의 몸뚱이만 한 커다란 검을 감쌌다.
금색 광기에 감싸여있는 대검에서 스파크가 튀겼다.
“마법검 밴더스내치.”
그것은 김유성이 휘두르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용사의 검의 재현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김유성이 휘둘렀던 검로가 하나하나 눈앞에 떠올랐다. 지수가 빛나는 대검을 깔끔하게 옆으로 휘둘렀다.
뻗어오는 마왕의 능력은 지수 주변을 장악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잘려나갔다. 얼기설기 재현한 것이라고 해도 지수가 이해해 건네받은 힘은 진짜였다. 용사의 검. 공격 면에 있어서는 이 이상 가는 기술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인상적이군.”
지수가 마왕이 발산한 정지의 역장을 멋지게 갈라내자, 루드비히는 칭찬해주겠다는 듯 작게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정말 스나크 네가 용사를 계승하기라도 한 건가? 내가 아는 한 용사에게 그런 기능은 포함되어있지 않을 텐데.”
“자랑하는 능력이 파훼당하니까 긴장되나?”
“우문이군, 스나크. 단지 용사의 능력 따위로 긴장까지 해야 했다면 나 혼자서 대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리 없지.”
그리고 지수가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서 말했다.
“용사의 능력 같은 게 아니라 나한테, 용왕 스나크한테 긴장했냐고 묻고 있는 거야.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지금의 나라면 당신이 전력을 다한다 한들 제대로 싸워볼 수 있어.”
“그건 오만이군.”
그리고 루드비히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그의 몸은 지수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새까만 망토가 펄럭이고, 장갑을 낀 손이 지수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훅 밀려나는 느낌을 받았을 때, 지수는 이미 결계의 외벽에 처박혀있었다.
“무슨…!”
충격에 신음을 흘리는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스나크 사냥의 영역 안쪽으로 들어온 순간. 루드비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간파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정지 능력을 이용해서, 일종의 의사적인 초가속을 행한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실행하긴커녕 떠올리지도 못할 복잡한 활용이었다.
거의 순간이동에 가까운 속도였다. 하지만 순간이동과 달리, 마력의 전조를 읽어내거나 주문의 성립을 방해하는 것으로 카운터를 칠 수가 없었다. 저것은 순수한 가속이었다.
“스나크. 풋내기 용왕인 네가 나와 제대로 싸워보고 싶다면, 지금까지 모은 동료들이라도 다 데리고 왔어야지.”
능력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저것은 오랜 세월 동안 힘의 사용과 가감에 익숙해져, 완전히 숙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묘기 수준의 테크닉이었다. 각성하고서 거의 폭주 기관차 수준으로 성장한 지수와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수는 침을 삼켰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상대보다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지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터인 루드비히의 기술들에,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다. 그 사실 자체가 일종의 희열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든 지수 주변에 보라색 껍질이 조각나 떨어졌다.
“다 데리고 왔거든? 동료들.”
험프티 덤프티. 고도로 압축된 중력 능력은 그 자체로 강력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수는 정유현처럼 껍질을 일점에 수렴시켜 소멸시키는 등의 정밀한 조작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단순한 압착과 전개 정도야 손쉬웠다.
그리고 다음에 발현한 것은 서민하의 능력.
붉은 여왕. 지수의 발아래에서 새빨간 마력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지수의 피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혈무구(龍血武具). 구현된 건 하나하나가 자그마치 용왕의 피로 이루어져 있는 절품이었다.
그것은 서민하가 발현시킨 것처럼 창이나 검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지수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쪽을 일제히 겨누고 있는 건, 붉은빛을 띠고 있는 자그마한 포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수의 등 뒤에서 무언가의 뼈대가 조립되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연금술이었다.
흑마도의 도달점이자 극치. 결전병기 발푸르기스의 밤. 우아함을 중요시하는 흑마녀가 만들어낸 발푸르기스의 밤은 이동하는 성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지수의 경우에는 달랐다. 지수가 중요시하는 것은 오직 위력, 또 위력이었다.
전함의 형태를 한 발푸르기스의 밤이 나타났다. 그 본체에, 붉은 여왕으로 구현시킨 선혈의 용왕포(龍王砲)들이 날아가 장착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전함에 탈 선원들이었다. 지수가 손을 치켜들자 재버워키의 활자가 폭풍처럼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지수가 눈을 감았다. 생각해내라.
“페이지 넘기기.”
너는 설계도를 본 적이 있다. 그 마력의 회로 또한 해석 능력으로 꿰뚫어 보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베껴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저 정확하게 기억해내면 될 뿐이다. 집중하는 지수의 손 위에서 빛나는 페이지가 생겨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재버워키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낄낄낄낄,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유령들이 몰려온다. 팔다리가 달린 채 걸어 움직이는 빵과 쿠키들. 창과 칼로 무장한 트럼프 병사들. 장화 신은 고양이와 애꾸눈의 후크 선장. 그들은 지수가 원하는 대로, 발푸르기스의 밤의 각 자리에 가서 조타를 잡았다.
붉은 여왕으로 만들어진 각 포대에는 험프티 덤프티의 질량탄이 장전된 채였다. 지수가 휘두르고 있던 힘이 개인 규모였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전함 규모였다. 지수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수준의 파괴행위를 일순간에 행할 수가 있다.
“와일드 헌트의 밤.”
와일드 헌트(Wild hunt). 지나가는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폭풍의 밤 망령의 무리들의 왁자지껄한 행진. 그것은 동료들의 모든 기술을 결합해 만들어낸 지수의 결전병기였다. 마포의 전함을 본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경탄에 잠겼다.
“스나크, 너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군. 저번에 만나고서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여기까지 힘을 쌓아 올렸는지.”
“항복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다만…상찬의 말을 아끼지 않을 수도 없겠지.”
그만큼 지수가 보여준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만한 기간에 혼자서 여기까지 다다른 것은, 어떤 종류의 경이로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감탄만이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위기감은 비치지 않았다. 적어도 용언마탄 수십 개 분의 화력이 느껴질 텐데, 그것을 일거에 받아낸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루드비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체크 메이트는 아니라고 해도…체크. 하고 한 번 호기롭게 외칠 정도의 맹공은 된다. 가슴을 펴고 자랑해도 좋아.”
지수가 입술을 이죽였다. 괜찮은 맹공이라느니, 자랑해도 좋다느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유가 오히려 좋았다. 루드비히는 지금 완전히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수의 승리조건은 루드비히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다.
‘자존심 챙기느라 한판 붙자고 말하기는 했지만….’
딱히 지금 결판을 낼 필요는 없을 것도 같거든. 지수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기고 도망칠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였다.
이쪽은 마지막 두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여왕의 침식을 더 진행시킬 필요가 있을 뿐이다. 즉 굳이 루드비히를 쓰러뜨릴 필요 없이, 여왕을 봉인하고 있는 이 결계를 깨기만 하면 목적 달성이었다. 전함의 붉은 주포들이 끼이익 돌아갔다.
“전 포대 조준.”
스나크 사냥은 영역 안의 모든 것을 자동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은 루드비히가 여왕을 봉인하고 있는 이 결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술식들이 복잡하게 겹쳐있는 탓에 해석하기 어려웠지만, 깔끔하게 해제하는 게 아니라 힘으로 때려 부수는 거라면 구조의 약한 부분들만을 찾아내도 충분했다. 이미 그 해석 작업은 끝나있었다.
병렬사고를 통해 동시에 명령을 내린다. 유령과 괴물들이 조종하고 있는 수십 개의 포대가, 지수가 알아낸 결계의 맹점들을 정확히 겨누었다. 모든 지점에 일제히 마탄을 포격한다면, 확실하게 마왕이 친 이 결계를 무너뜨려버릴 수가 있다.
“지금 깨달아봤자 늦었어. 수읽기에서 당신이 졌다고.”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움직이자, 지수가 입꼬리를 올렸다.
중력탄. 용언마탄. 이미 모든 포탄들은 장전되어, 지정된 목표에 사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수는 망설임 없이 발사를 명령했고, 와일드 헌트의 밤에서 수십 개의 막대한 마력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말 그대로 결전병기였다.
위화감을 느낀 건 그 순간의 일이었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히 지수가 생각하고 있던 대로라면, 섣불리 봉인을 부수려는 건 그만둬라! 멸망까지 남아 있는 소중한 시간들을 전부 다 날려버릴 셈이냐? 하고 설교 비슷한 절규가 날아오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냉정하게 터져나가는 포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읽기에서 진 것은 어느 쪽이지?
가면 뒤의 차가운 눈동자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그것은 한없이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루드비히의 손에는 어느새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그가 조용히 언령을 읊조리자, 페이지가 촤르륵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가 입을 벌렸다. 루드비히의 정령 또한, 똑같은 이야기의 정령.
“페이지 넘기기. 거울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빛나는 막이 생성됐다. 지수의 포대에서 전방위로 발사된 모든 포탄이, 거울에 부딪힌 뒤 그대로 반사되어 전함으로 돌아왔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폭풍이 휘날리고, 눈을 떴을 때 지수의 와일드 헌트의 밤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전함이 허무히 침몰한다.
그 광경을 바라본 루드비히가 한숨을 쉬었다.
“이게 네가 말하는 ‘제대로 싸워본다.’라는 건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조롱이 아닌 지루함이었다. 루드비히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