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50화 (150/176)

150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5) >

지수의 손에 황금빛의 투기가 발현했다. 그 모습을 본 김유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제대로 심상을 발현하지 못한 걸 깨달았을 땐 어떻게 돼버리는 건가 싶었지만, 지수는 김유성이 준비해둔 대로 확실하게 용사의 능력을 손에 넣었다.

“큰일 날 뻔했잖아. 자식, 애를 먹이고 말이야.”

김유성이 넌덕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김유성을 보고 지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까지의 전부가 김유성이 죽기 전에 짜놓은 각본대로였다. 언뜻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터무니없는 용의주도함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수가 두렵다 느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 사람은…의심할 여지 없는 용사야.’

여왕의 봉인 속에 떨어져 버린 지수를 만났을 때, 김유성은 이미 모든 계획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령 재버워키의 능력. 지수가 이윽고 다다를 영역. 그것들 전부를 통찰하고서 생각했다. 자신의 존재를 안에 새기고, 정령을 이용해 나중에 재현시키도록 하면 용사의 능력을 넘겨줄 수 있겠다고.

하지만 그런 방법을 떠올리는 것과, 실제로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모든 계획의 전제는 자살이다. 일단 자기 자신이 소멸해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지수가 압도당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정답을 선택한 끝에 승리가 있다면, 자신의 목숨조차 계산의 한 요소로써 이용한다.

그것이 올바른 정답이라면, 무엇을 잃게 된다고 해도 망설임 하나 없이 실행하는 광기. 절대 꺾이지 않는 각오와 의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신념을 관철할 정신성이 있기에, ‘모든 것을 베는 검’ 같은 말도 안 되는 능력이 발현된 것이다.

지수는 대강 감을 잡았다. 초월자의 영역. 자신의 심상, 정신성을 능력에 투영해, 스스로의 내면뿐만이 아니라 세상 바깥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지. 일단 이 영역에 이르고 나면.

‘똥고집이 셀수록 능력에 빈틈이 없고 강해져.’

사실 지수가 알고 있는 초월자라고 해봐야 정유현에 김유성, 그리고 루드비히가 끝이었다. 애초에 어느 정도 기형적인 정신성을 가진 인간들만이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한 정보들에서 마왕이 이 세상 제일가는 똥고집일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지수는 눈을 감고 지금까지 걸어온 행적을 생각했다.

처음 각성했던 해석 능력. 집행부의 현장에서 얻게 된 파사의 마력. 서민하를 추적하며 깨우친 명경지수. 허다인에게 가르침받은 영역과 내림, 그 모든 것을 결합하며 완성된 해주의 비술. 해석 능력과 해주의 비술이 하나가 돼 발현된 현상해석. 용사의 기록을 받아들이고 심안을 구현한 심상해석.

협회장과의 결전, 밴더스내치와 계약하는 것으로 얻은 용왕의 둥지. 여왕의 봉인 속에서 대전쟁의 아그리올라를 토벌하고서 부여받은 스나크의 이름. 걸맞은 격을 얻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둥지에, 지수의 심상을 투영시킨 절대중립.

그 모든 것들이. 이제까지 지수가 얻어온 모든 성취들이 지금 한곳에 이어졌다. 만류귀종. 지수는 어렴풋이 확신했다. 이 기술이야말로 자신에게 있어 하나의 도달점이라고.

둥지가 전개된다. 그것은 이를테면 지수의 세계였다.

어떤 학자가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는, 예컨대 도깨비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삼라만상의 원인과 결과를 꿰뚫어 보고 자신의 뜻대로 흐르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이 자그마한 방 한 칸의 영역 안에서는, 지수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용왕 스나크가 이 둥지의 주인이었다.

“스나크 사냥.”

지수가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활자로 분해되어 흩어졌다. 그다음은 책을 넘기듯이 그 글자들을 읽어내려가며 해석할 뿐이었다. 한 번 해석해서 이해했다면, 자신의 문체로 정리해 다시 써내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닥에 누워있는 일행들의 힘 또한 어느 정도 읽어내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지수가 그들과 인연을 맺어, 그들이라는 인간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지수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해석한 능력들을 재현시켰다.

지수가 원래 가지고 있던 푸른색의 마력에 더해, 새하얀 파사의 마력, 어두운 녹색인 용왕의 마력, 정유현의 진보라색 힘과 서민하가 가진 새빨간 마력. 용사의 황금색 투기까지. 아예 그냥 마력으로 색칠공부를 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이내 회랑의 구조물에 걸터앉은 김유성이 입을 열었다.

“누구나 다 자기 삶에 있어선 주인공이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단역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너는 그것과 반대로, 자기 삶에서 자신만이 아무 역할도 없다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어떨 때는 모험소설의 선장이 되어. 어떨 때는 괴기소설의 탐정이 되어. 주역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 자신의 삶에서는 등을 돌린 채 온통 다른 이야기들만 읽어내렸다.

“그 끝에 발현된 그 능력은, 이를테면 ‘주인공이 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게 된다’.”

남의 각본에 적혀있는 내용을 빼앗아, 마음대로 자기 배역의 분량 위에 적어버린다. 하지 못할 행동을 해내고, 있을 수 없는 일을 일으킨다. 김유성이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너만이, 여왕 토벌을 달성할 수 있어.”

그것이 용사의 진의였다. 물론, 김유성 자신이라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야 여왕의 봉인에 묶여있었지만, 끝까지 여왕을 죽이기 위해 발버둥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용사의 심안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것은 각오나 의지 같은 것과는 무관한 ‘진실’이었다.

정답을 속삭여주는 용사의 눈은 오히려 절망처럼 느껴졌다. 일부러 여왕이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걸어둔 저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렇다 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김유성은 봉인 속에 갇힌 채로 수천수만 번 정답을 검토했다. 만약 풀이에 조금이라도 오류가 있다면, 여왕을 찌를 수 있는 틈이 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왕은 쓰러뜨릴 수 없었다. 단순한 힘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라는 틀 안에 있는 존재라면 구조적으로 여왕을 넘어설 수가 없게 되어있었다. 마왕이 체념한 것도 당연했다. 여왕에게 대항하겠다 외치는 것은, 이를테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살이었다.

그런 김유성 앞에, 지수라는 변수가 떨어져 내려왔다.

푸른 눈동자에 비친 건,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 눈앞의 비실비실해 보이는 녀석이 정말로 여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없을지 따위는 김유성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바로 그 ‘모른다’는 점이, 김유성에게 있어 얼마나 커다란 구원이었는지.

지수는 자신을 보자마자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계획을 실행한 김유성을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김유성은 한 번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다. 김유성이 김유성으로 존재하는 이상, 여왕에 맞서겠다고 결심한 이상, 죽음은 이미 예전부터 결정되어있던 것이기에. 쭈욱 체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김유성에게 지수가 가져다준 것은 바로.

“네가 내 죽음에 의미를 주었다.”

그게 얼마나 기뻤는지 네가 알 수나 있겠냐. 피식 웃는 것과 함께,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김유성의 자세가 살짝 무너졌다. 한쪽 다리가 밑으로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 쳐다보면, 김유성의 몸 이곳저곳이 필름처럼 풀어져 가고 있었다.

지금의 김유성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단순한 유언장. 지수 안에 박혀있던 존재의 기록을 재현하고 있을 뿐인 물거품이었다. 당연히 길게 유지되지 못했다. 붕대를 연상시키는 필름은, 김유성의 몸 곳곳에서 튀어나오며 활자로 흩어져갔다.

“당신은….”

“야, 그런 표정 좀 하지 마라. 그리고 아직 안 끝났거든.”

한쪽 다리가 필름으로 풀려가고 있었지만, 김유성은 자신의 검을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났다. 분명 눈앞의 김유성은 진짜가 아니었지만, 그것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수는 달려나가 부축하려고 했지만, 김유성은 손바닥을 내밀어 지수를 제지했다. 김유성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직 수지가 조금 안 맞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지수의 표정에, 점점 불안정해져 가는 김유성이 천천히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빚을 지면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라….”

김유성의 목소리는 오히려 사죄에 가까웠다. 반쯤 일부러 자신의 죽음을 짊어지게 했다. 세상을 구하는 역할을 억지로 떠넘겨버렸다. 눈앞의 비실비실한 녀석이, 이미 충분한 짐을 어깨에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렇게 한 것이었다.

“마지막 두 심연은, 여왕이 풀려나기 시작해야 열린다.”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유성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환상의 회랑을 클리어하는 것으로, 이제 S급 던전은 두 곳만이 남았다. 그 최후의 두 던전의 게이트는 여왕의 침식이 이 이상으로 더욱 깊게 진행되어야 활성화된다는 뜻이었다.

김유성이 대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가. 루드비히의 공략집을 본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마지막 두 개의 던전만이 남았고 그것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답을 꿰뚫어 보는 그 능력으로 까마득한 시간 동안 봉인 속에서 여왕에 대해 생각했겠지.

진짜 문제는, 그게 사실이라면 지수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던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선 봉인에서 해방된 여왕이 침식을 더욱 진행해야 하는데, 그 여왕은 루드비히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봉인으로 잠가 두고 있다.

완전히 선수를 빼앗겨버렸다. 루드비히가 바라는 대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점이 찾아와 여왕이 풀려나고 모든 게 멸망할 때까지 손가락 빨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지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지은 김유성이 말했다.

“너 혹시 게임 같은 거 해봤냐?”

“네? 적당한 만큼은….”

“RPG 게임들이 있잖냐. 용사니 마왕이니 하는 애들이 나오는 거. 거기서 보면 마왕은 세상을 정복하겠답시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오는데, 용사는 전쟁을 지휘하고 그러는 게 아니야. 단신으로 마왕이 있는 성에 쳐들어간단 말이야.”

용사의 특권 같은 거란 말이지. 마왕이랑 운명적인 인연 같은 게 있어서, 다짜고짜 일대일 맞짱을 신청할 수가 있어. 김유성의 목소리는 이미 속삭이는 것처럼 작아져 있었지만, 지수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새겨듣고 있었다. 지금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용사 김유성의 유언과도 같았다.

“그 특권, 너한테 주마.”

김유성이 지수를 향해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여왕의 봉인 속에서 김유성이 생각했던 계획. 지수가 가장 필요할 때에 자신 용사의 기록을 재현시켜 위기를 타파하게 만드는 것도, 지수가 곧 눈뜰 능력을 이용해 용사의 힘을 전달해주는 것도. 전부 한 가지를 위한 밑 준비일 뿐이었고, 용사가 소멸하기 전 떠올린 계획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지금 루드비히는 여왕의 봉인 속에 있었다. 봉인의 중심이자 말뚝이었던 김유성을 잃은 것으로 불안정해진 봉인을 봉합하기 위해, 일단 봉인의 결계를 완전히 닫아놓았을 것이다. 그것은 온 세상을 다뒤져보지 않는 이상, 외부에서 그 좌표를 찾아내 뚫고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지수를 바깥으로 내보낸 뒤, 김유성은 흘러넘치는 여왕의 파편들을 청소하기 위해 루드비히와 함께 싸웠을 것이다.

다시 없을 마왕과 용사의 공동전선이다. 흩어져가는 용사의 힘을 있는 힘껏 끌어모아,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릴 때까지 검을 휘둘렀겠지. 그리고 마왕에게 마지막 가는 길 선물이니 봉인의 주줏돌에나 쓰라며, 자신의 성검을 맡겼을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던 대로, 마왕을 속여넘길 수 있는 정답을 연기하면서. 마왕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겠지. 이제 존재 자체가 소멸될 놈에게 더 이상 꿍꿍이가 있을 리 없다.

“바보 같은 놈, 끝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김유성은 유쾌하다는 듯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지수가 김유성의 손을 잡자, 그의 몸에서 존재의 필름이 터져 나오며 하나의 길이 되기 시작했다. 용사가 평생 휘둘러왔던 성검과, 용사 김유성이 존재했다는 기록. 그 둘만큼 강한 연결로 이어져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그리고 실마리가 있다면 찾아낼 수 있다. 그 어떤 통로도 존재하지 않는 밀폐된 봉인 속에서, 마왕은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지수는 어딘가의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기다란 필름이 선녀 옷처럼 지수의 등 뒤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김유성의 모습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물거품은 결국 사라지고 재버워키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물거품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게 아니었다.

“스나크…?”

고개를 돌리면 봉인 속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술식이 돌아가고 있는 결계의 중앙, 위령비처럼 꽂혀있는 성검 앞에 루드비히가 앉아 있었다. 이것이 용사 김유성이 죽기 직전 떠올려낸 계획. 자기 자신이, 마왕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나침반이 되는 것. 그가 죽으며 이루어낸 자그마한 기적이었다.

“분명 그림 속에 갇혀있어야 할 텐데…. 뭐지?”

가면 속 눈동자에선 순수한 당황이 비치고 있었다. 자신의 계산이 완벽하게 틀어져 버렸을 때의 눈빛. 저 표정을 만들어낸 것이 자신이 아닌 것이 조금쯤 분하고, 아주 많이 고마웠다. 뭐냐고 묻는 루드비히의 말에 지수가 조용히 대답했다.

“용사 대행, 용왕 스나크.”

지수의 몸에서 황금색 투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나크 사냥. 펼쳐진 둥지가 모든 것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전에 없을 싸움에 나서는 데에 있어서 부족함은 없다.

“한판 붙으러 왔다, 마왕 자식아.”

지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것은 처음으로 내뱉는,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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