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4) >
따뜻한 물 속에 잠겨있는 듯한 몽롱함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그곳은 다 낡아빠진 영화관이었다. 주변의 좌석에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타다다닥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영사기에는 재버워키 시네마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앉아있는 지수가 눈을 끔뻑이며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에 상영되고 있는 것은 학교의 영상이었다. 시끌벅적한 교실. 아이들끼리 모여서 떠들고 있는 가운데, 교복을 입고 있는 한 청년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곳에 비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과거였다.
요령이 좋아 공부도 적당히 해냈고, 반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같이 놀자는 권유를 거절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수와 정말로 친하게 지내려 하는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들 또한 같이 있으면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책이나 읽을 테니 상관 말았으면 좋겠다.
지수가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참 못돼먹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지수의 본심인 것은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었으니까. 절친이라고 부를 만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진 지금도, 지수는 오히려 편안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앞자리의 친구가 중얼거렸다.
<와, 너는 진짜 느긋하게 산다.>
돌아본 친구는 시험에 대비해 밤새 문제집을 푸느라 퀭한 얼굴이었다. 며칠 있으면 중간고사인데 이런 때에도 책이나 읽고 있는 지수가 조금쯤 못마땅한 듯 햇다. 어떻게 생각하면 조롱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지수는 아무런 불쾌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 말대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수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느긋하게 살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 대는 것뿐. 한 마디로 빈둥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내 삶은 빈둥대며 책이나 읽다 죽는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방의 벽지에 박혀있는 못처럼, 그런 생각을 언제나 마음 한켠에 품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그런 면모는 더더욱 강해졌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좋아하는 책들을 읽었고, 지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게 지수의 바람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참견받고 싶지 않다.>
이내 암전된 화면 위에 그런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돌아가던 필름이 덜컥 멈추었다. 이것이 이 영화의 결론이었다. 지수가 바라는 삶, 지수가 바라는 소망. 그렇기에 절대중립이라는 능력이 발현되었다. 지수는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스크린을 향해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라는 인간의 본질이었다.
“...정말 그러냐? 정말로 저게 전부야?”
깜짝 놀란 지수가 휙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을 터인 옆자리에 김유성이 앉아있었다. 그는 버릇없이 앞자리의 좌석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서 손바닥에 턱을 괴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는 김유성이 말을 이었다.
“눈 똑똑히 뜨고 다시 잘 봐보라고.”
멈춰있던 필름이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보이는 것은 각성한 뒤 지수의 모습이었다. 오성화를 만나고, 정유현을 만나고, 서민하를 만났다. 여러 사건에 휘말리고, 결코 느긋하게 빈둥거린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흑마녀를 만나고, 허다인을 만나고, 김유성을 만났다. 용왕이 된 뒤부터 지금까지는, 잘도 이렇게 열심히 달려왔구나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워왔다. 책만 읽고 있었던 삶이 책에서나 나올 법한 경험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수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야 나는 그냥 쉬고 싶은데, 해야 할 일이 쏟아지니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수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뭐가 됐든지 나를 좀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런 마음의 목소리가 지수의 가슴 한켠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런 지수의 반응에 김유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한 것이 안쓰럽다는 듯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김유성이 영사기에 손을 뻗었다. 그가 영사기를 만지자 덜컥거리는 필름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냥 보지 말고 해석을 해봐. 네 특기 아니냐?”
스크린에 다시 영상이 비춰지자, 김유성이 지수를 향해 말했다. 눈썹을 찌푸린 지수가 해석 능력을 발동했다. 사실 의미없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선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굳이 해석 따위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지수의 심정을 읽은 듯, 팔짱을 낀 김유성이 말했다.
"너는 자길 타협시키는 데에 능숙한 놈이야. 책만 읽는 범생이였던 놈이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싸우면서도 정신이 안 나간 것만 봐도 견적이 나오지. 그냥 일반인이 너랑 똑같은 상황에 처했으면 멘탈이 나가도 열 번은 나갔을 거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김유성은 지수가 마치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지수는 자신이 적어도 자기 자신의 기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솔직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유성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진짜로, 그냥 영원히 쉬고나 싶다고?”
지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유성이 이쪽을 보며 웃었다.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돼. 다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제야 지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지수의 눈동자가 경악에 흔들렸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따뜻한 물 속에 잠겨있는 듯한 몽롱함. 그것은 앉아있는 좌석이 핏물로 흠뻑 젖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이 많은 피가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 눈으로 따라가보았다. 뚝뚝 떨어지는 피는, 다름 아닌 자신의 가슴팍으로부터 흐르고 있었다.
지수가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김유성을 노려보았다. 어깨를 으쓱인 김유성은 영화관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가는…, 이걸 좀… ”
“뭘 그렇게 당황해? 네가 원하는 게 그거잖아.”
사실 맞는 말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누구에게도 참견받을 일 없이 영원히 혼자틀어박혀 쉴 수 있다. 김유성의 말에, 지수의 깊은 내면에서 웃기지 말라는 반발이 올라왔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수는 그 반응에 신기함을 품었다. 생각해 보면 의문이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죽기 싫어하지?
그 의문을 타고서, 지수는 자신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스크린에 책을 읽고 있는 지수가 보였다. 지수는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원체 독서를 좋아했지만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텐데.
‘그것 말고는 없었으니까….’
피에 절어있는 지수가 흐릿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웬만한 일들은 적당히 해낼 수 있어도, 이거다 하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낼 수 없었다. 내가 해낸 일이라고 가슴을 펴고 자랑할 수 있는 성과도 없었다. 무아지경이 된 채 온 정성을 들이며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일도. 절대로 포기하기 싫고,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이루고 싶은 고집과 소원도.
자신은 한 마디로 말해서 텅 비어있는 인간이었다.
뭐든 적당히 때우며 빈둥대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채색이었다. 자신은 삶이라는 물감으로 아직껏 어떤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 붓을 움직여야할지도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렇기에 지수는 책과 이야기에 빠져 살았다.
<너는 진짜 느긋하게 산다.>
친구는 독서하는 지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수는 누구보다 초조해하고 있었다. 수많은 지식들을 접해보고, 온갖 인물들의 이야기를 탐독하면서,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 내 삶은 빈둥대다 죽는다면 그걸로 만족이야.
“그게 아니잖아.”
김유성이 말했다. 지수가 언젠가 생각했었던 말이 정면에서 부정되었다.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새파란 눈동자는, 마음 깊숙한 곳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 절로 몸이 위축되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김유성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자기가 텅 빈 인간이라서, 이대로 끝나버릴 거라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으니까.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삶도 나쁘지 않아. 그렇게 타협하고 있었던 거잖아.”
누구에게도 참견받고 싶지 않다. 혼자 틀어박혀서 책이나 읽고 싶다. 그것은 지수가 가진 심상의 표면일 뿐, 엄밀한 본질이라고 할 순 없었다. 여왕의 봉인 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 김유성이 지수를 보고 읽어낸 본질은 좀 더 다른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녀석에게 모든 걸 걸어도 되겠다 생각했다.
“나는….”
지수가 원했던 것은 방에 틀어박힌 채로 누구의 참견도 받지 않고 책들에 파묻혀 사는 삶이었다. 의문은 그것에서 한층 더 깊숙이 들어갔다. 무엇을 원했는가가 아니라 왜 원했는가. 어째서 책과 이야기에 빠져드는 삶을 바라고 있었던 것인가.
지수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과 마주보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본질은 그것이었다. 누군가의 경험을 자신의 일처럼 추체험한다. 그것이 지수의 목적이었다. 참견받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있었던 이유는 남들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것은 질투처럼 적극적인 것이라기엔 좀 더 약하고, 한심한 감정이었다. 선망. 자신 또한 무언가를 가지고 싶었으니까. 천직이니 숙원이니 삶의 의미니 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반짝이는 무언가를 자신도 느껴보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참견받고 싶지 않다.>
영화가 끝난 뒤 암전된 화면에 아까와 같은 문구가 나타났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간 김유성은, 검을 휘둘러 영화의 화면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두동강이 나서 잘려나간 문구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이내 스크린에는 검은 색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그것이 지수가 품고 있는 바람의 본질이었다.
즉 동경. 다른 이의 반짝임을 자신 또한 느껴보고 싶기에.
<그러니까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
책의 내용을 적어내린 서술자든, 소설 속 가상의 등장인물이든, 옆에서 걷고 있는 빛나는 누군가든. 그들의 이야기에 이입해서, 좀 더 공감하고 알고 싶었다. 그것이 지수가 품고 있는 소망의 본질이었다. 상처난 영혼에 딱지가 지기 시작한다. 환상으로 덮여있던 영화관이 사라지며, 주변의 풍경이 현실로 돌아왔다.
지수 앞에 서있는 김유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자아 찾기 여행은 즐거웠냐?”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 확실히 자각한 지수의 영혼은, 이전보다 더 빈틈없는 상태가 되어 단단히 존재를 굳히고 있었다. 지수는 김유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이 용사라는 양반은 정신과 의사에도 소질이 있어보였다.
“네. 전부 알았어요.”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내면만이 아니었다. 이 심상이 능력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도, 자신의 힘이 있다면 마왕과 제대로 싸워볼 수 있을 거라고 했던 김유성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았다. 지수의 둥지가 영역이 되어 펼쳐지기 시작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딱 지수의 영역, 지수의 방의 크기 만큼.
“…아낌없이 주는 나무시네요.”
지수가 쓸쓸한 시선으로 김유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조금쯤 불안정해져 있었다. 슬슬 한계인 듯 했다.
“당연히 올인해야지. 너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니까.”
김유성은 의미심장한 지수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고 웃었다. 지수는 조용히 자신 안에 있었던 김유성의 기록을 떠올렸다. 재현된 눈앞의 김유성이 자신을 하나의 유언장이라 표현한 이유를 알았다. 김유성의 목적은 지수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었다.
펼쳐진 영역에 김유성의 몸이 들어온 순간, 해석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지수는 김유성을 보다 깊이 이해했다. 해석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한다면 재현할 수 있다.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
지금 용왕의 둥지는 온전히 지수의 것으로 완성되었다. 그것이 초월의 영역에 이른 지수가 얻은, 반쪽짜리가 아닌 진정한 기술. 다른 사람이 품고 있는 반짝임을 자신 또한 느끼고 싶다. 그런 심상이 지수의 능력에 투영되어 발현한 힘. 해석해서 이해가 끝난 능력을 자신 또한 사용하는 것.
김유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지수의 손이 천천히 들리자, 그곳에는 용사의 황금색 투기가 머금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