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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148화 (148/176)

148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3) >

그림이 찢어지며 바깥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면 새하얀 석재로 되어있는 거대한 홀이었다. 이곳은 아마, 환상의 회랑의 보스 룸 일 것이다. 네 번째 방까지 무사히 그림들을 격퇴했다면 도달했을 공간. 엔드로우가 눈을 번뜩였다.

“…너는 뭐냐.”

외눈박이의 눈동자가 김유성을 경계하며 응시했다.

애초에, 엔드로우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그림은 물리적 간섭을 일절 받지 않았다.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릴 만한 폭발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림에는 흠집 하나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림의 봉인은 절대적이다. 어떤 의미로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쉘터이기도 했다. 그런데 돌연 나타난 저 남자는 그것을 간단히 베어버렸다. 요컨대 위험천만한 존재였다.

“나? 용사.”

김유성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엔드로우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김유성을 추궁했다.

“뭘 했지. 내 예술에 폭력은 통용되지 않을 텐데.”

“아, 그게 궁금하셨어? 간단하지. 용사의 검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의 칼날이거든.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김유성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에 쥔 검을 휙휙 휘둘렀다. 도발하는 태도에 엔드로우의 눈동자가 분노로 물들었다.

두 놈 모두가 문제였다. 모든 것이 끝나 멈춰있어야 할 자신의 그림 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인 마법사도 그렇고, 어떤 간섭도 통하지 않아야 할 자신의 그림을 마음대로 잘라내버린 남자도 그렇고.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지워주마.”

엔드로우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지수가 눈동자를 굴렸다. 엔드로우 주변의 공중에 떠 있는 캔버스들은 서민하와 정유현, 흑마녀의 그림이었다. 저것을 노려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김유성이 뛰쳐나갔다. 김유성은 이미 무엇을 하는 것이 정답인지 알고 있었다. 용사의 검이 그림들을 베어 갈랐다.

그림이 두쪽으로 갈라지자, 그림 안의 아공간 또한 무너졌다. 왜곡이 일어나며 세 사람이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읏차!”

지수가 떨어지는 이들을 다치지 않게 마법으로 받아냈다. 세 사람 모두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가? 지수가 현상해석으로 상태를 읽어냈다. 다행히 세 사람의 맥박이나 호흡은 모두 정상이었다. 단순히 의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뿐인 것 같았다.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저기….”

“됐어, 상황 설명 안 해도 돼 . 그럴 시간 없으니까.”

그 말에 지수가 놀랐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김유성은 실제의 김유성이 아니었다. 여왕의 봉인 속에서, 그가 지수에게 새겨넣었던 김유성이라는 존재의 기록. 그것을 사용해 잠깐이나마 재현하고 있는 물거품일 뿐이었다. 감광되고 있는 필름이나 마찬가지고, 단순한 세이브 데이터 같은 것이었다.

번쩍 빛났다 사라지는 섬광처럼, 재현되는 것도 순간뿐. 그리고 눈앞의 김유성은 마치 그걸 전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도, 조금 있으면 풀어헤쳐질 존재라는 것도. 뭐라고 할 말을 잃은 지수에게 김유성이 턱짓했다.

“일단 저놈을 박살 내면 되는 거지.”

세 사람을 바닥에 눕힌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몬스터인 저 괴물만 처치하면 환상의 회랑은 클리어된다. 하지만 저것은 최후의 세 던전 중 하나를 지키는 관문이다.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공중에 뜬 엔드로우가 지수와 김유성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박살 낸다고? 농담이라 흘려듣기엔 너무 오만하군. 이 회랑이 무엇을 위해 지어졌는지 알기나 하는 건가?”

지수 일행의 그림을 찢어버린 이상, 엔드로어는 더 이상 이쪽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놈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아닌 듯했다. 엔드로어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수많은 그림들의 액자가 나타났다.

“741. 내가 세상을 끝내기 위해 수집한 힘의 개수다.”

지수가 현상해석을 사용했다. 스킬 콜렉터. 엔드로어의 힘은 이를테면 그러한 종류의 능력이었다. 능력으로 만든 상대방의 그림을 이용해 그 능력과 성취를 자신 또한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아마 이 환상의 회랑이라는 구조물의 도움 또한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김유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 바보냐? 지 힘의 원천을 내 앞에 갖다 놔주네.”

김유성의 몸에서 마력이 터져 나왔다. 섬뜩함을 느낀 엔드로어가 흠칫했다. 눈을 깜빡인 순간 김유성은 이미 엔드로어의 코앞에 있었다. 격렬하게 검을 내리친다. 엔드로어는 황급히 자신 앞에 그림의 액자들을 펼쳤다.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엔드로어의 그림은 어떤 힘으로도 손상시킬 수 없다. 즉 무적의 방패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갑작스레 공격당했을 때, 반사적으로 그림을 움직여 막아내는 것은 엔드로어에게 있어 당연한 버릇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베어내는 용사의 검 앞에서 그 버릇은 치명적이었다. 김유성은 액자째로 그림들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폭풍 같은 칼날의 난무. 김유성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림들이 잘려나갔다. 엔드로어가 오랜 세월 수집한 절세의 능력들이, 너무나 간단히 증발해 사라져간다. 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서 뭘 도와줄 필요도 없이 압도적이었다.

“너 싸움 되게 못하는구만?”

그리고 빈틈을 찾아낸 김유성이 그대로 엔드로어의 어깻죽지를 찢어냈다. 그것은 정교한 검술이라기보다는 흡사 맹수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지수가 생각했다.

‘능력의 상성관계가 너무 명확해.’

엔드로어가 다른 존재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그림을 곁에 소환해야 한다. 그림은 어떤 공격에도 간섭받지 않기에 보통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김유성은 그 그림을 검으로 잘라내 버릴 수가 있었다. 엔드로어가 땅으로 추락했다.

“칠백 어쩌구 다 끝났냐?”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제압했다. 역시 용사는 말도 안 됐다. 김유성이 가볍게 팔을 털자, 엔드로어가 서럽게 절규했다.

“…대체 뭐냐.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뭐?”

“그렇게나 나를 방해하고 싶더냐? 나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희대의 역작을! 그걸 위해서 세상을 끝내야 한다는 것뿐인데, 왜 이해해주지 않지!”

목소리엔 이 상황이 너무나 부조리하다는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의 마지막 모습을 주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는 최고의 작품을 그려야 한다는 사명에 비하면, 세상이 멸망하는 것 따위는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나의 작품활동을 방해하는가. 지수는 그 광기에 소름을 느꼈다.

그리고 김유성은 하찮다는 듯 콧숨을 내쉬었다.

“뭐라는 거야 괴물 새끼가.”

휙 휘둘러진 검이 엔드로어의 목을 잘라냈다. 지수와 달리 김유성에겐 일말의 고민도 사색도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판단한다면 망설임 없이 실행하고, 그것에 대해서 미련도 무엇도 품지 않는다. 진정으로 용사에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잃은 던전이 정지하기 시작했다.

쿠르릉대는 소리와 함께, 구조물 안쪽에서 돌아가고 있던 톱니바퀴들이 멈추었다. 이제 보상을 챙기고 다른 일행들과 함께 나가기만 하면 됐다. 곧 있으면 기록으로 재현한 김유성 또한 사라질 것이다. 자신의 손을 바라본 김유성이 말했다.

“네 정령 되게 구리다. 벌써 간당간당하네.”

재버워키가 존재의 기록을 재현하는 것이 끝나는 순간, 눈앞의 김유성은 소멸해버릴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김유성의 얼굴은 태연했다.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이런 식으로 불러내고선, 할 일이 다 끝났다고 다시 사라지라고 하다니. 그래도 김유성 씨가 없었으면….”

“뭔 소리야?”

그리고 김유성이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로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지수가 눈을 끔뻑이자, 김유성이 금발을 손으로 벅벅 긁적이며 말했다.

“할 일이 다 끝나긴 뭘 끝나? 아직 시작도 안 했구만. 전부 다 지금 이때만을 위해서 준비해왔던 거라고.”

지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김유성이 한 말은 흘려넘길 수 없었다. 지수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그건 마치.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는 듯 김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네가 네 정령으로 나를 재현할 수 있게, 일부러 내 기록을 네 안에 집어넣은 거다. 마왕이 여왕의 봉인을 새로 짜고 있을 때, 좀 더 성장한 뒤의 너랑 다시 만날 필요가 있었으니까. 상태를 보니 앞으로 십 분쯤 버틸까 말까 하겠군. 그 정도면 충분해.”

지수가 너무 갑작스레 밀려든 정보들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김유성이 한 말은 다시 말해 그것이었다. 봉인 속에서 처음 지수와 만난 순간부터 재버워키의 능력으로 무엇이 가능한지 파악한 뒤, 지수가 이런 형태로 김유성의 기록을 재현해낼 것을 예견하고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걸 다 어떻게 알고서….”

지수의 경악 섞인 의문에 김유성은 자신의 눈을 툭툭 두드렸다. 모든 정답을 꿰뚫어 보는 용사의 심안. 저것이 있다면 지수에게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알아내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김유성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뭐, 지금의 나는 유언장 같은 거니까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대충 지금 뭐가 고민인지도 견적이 나온다. 마왕이랑 싸워야 할 텐데 싸울 수단이 너무 부족하다 이거지?”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확실히 절망했다. 슬슬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루드비히의 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지수를 제외한 전원은 아예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지수는 단지 티켓을 툭 터치당한 것뿐이었지만, 제대로 싸웠다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백 번을 싸워서 한두 번 이긴다면 기적일 것이다. 이런저런 뒷공작들에 힘을 분산시키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모든 역량을 온전히 사용하기 시작한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그것은 어떻게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 상황 또한 김유성은 예견하고 있었던 건가.

“뭐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 그만두고. 결론은 이거다. 내 힘이 있으면 마왕이랑도 제대로 싸워볼 수 있어.”

확실히 그러했다. 마왕의 능력권 안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지수의 절대 중립이 ‘갑옷’이라면, 모든 것을 베어낼 수 있는 용사의 힘은 ‘검’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어차피 김유성은 조금 있으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런 지수의 표정을 읽은 김유성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잠깐 있어 봐. 너 아직 희망의 힘 못 쓰냐?”

“희망의 힘이 뭔데요?”

지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희망의 힘이라니, 그건 또 무슨 어린애들 보는 만화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이었다. 지수는 몇 번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자신이 그런 걸 사용할 수 있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김유성이 지수에게 말했다.

“아니. 내가 임시로 붙인 이름이긴 한데. 그거 말이야. 법칙 쌩까고 자기 소망대로 능력 강화되는 거. 초필살기라고 해야 하나, 한계돌파 비슷한… 너 설마 아직 감도 못 잡았냐?”

김유성이 이건 계산 밖이라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들으니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심상을 능력에 투영하는 단계.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섰는지를 묻는 것 같았다. 그거야 이전에 도달했다. 지수가 자신의 몸에 둥지를 두르자, 주변에 절대중립의 역장이 발현했다.

“이거예요. 이건 그 검으로도 못 벨걸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을 베어내는 용사의 검도, 지수의 절대 중립 안에서는 그 법칙을 잃고 단순히 엄청나게 날카로운 검으로 변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긴 하지만. 그리고 지수의 절대 중립을 뜯어보듯 찬찬히 살핀 김유성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잘못 되어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요.”

“반쪽짜리군. 대단하긴 한데, 이러면 계획이 틀어져.”

지수 앞에 선 김유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기하다는 듯 검으로 지수를 툭툭 쳤다. 싹둑싹둑 베이지 않고 검이 튕겨 나오는 것이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검으로 툭툭 두드리는 것만으로 팔이 피투성이가 되겠지만, 지수는 용왕이 되어 강화된 신체 덕에 잔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지수가 김유성에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반쪽짜리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일단 첫째로 네 능력이 온전히 안 섞였다.”

그 말에는 어딘가 납득되는 점이 있었다. 절대 중립은 지수가 품고 있는 용왕의 둥지를 전개해서 발현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정작 지수의 주력인 해석 능력과는 연관이 없었다. 중력을 다루는 정유현의 험프티 덤프티, 검을 사용하는 김유성의 절대적인 절단과 비교하면 어딘가 동떨어진 면이 있었다.

“발현된 심상도 진짜 본질이 아니야. 네가 바라는 소망은 좀 다른 거거든. 애초에 이건 그걸 알아채고 세운 계획이고.”

아니란 소리 하지 마라, 나는 다 보이니까. 김유성이 뭐라 반박하려는 지수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바로 계획을 진행시키려 했지만, 이렇게 되면 시간이 맞을지 몰랐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김유성이 말했다.

“이렇게 되면 좀 과격한 방법이 필요한데…. 이 정령의 힘까지 빌리면 어떻게 아슬아슬하게 가능한가.”

“네?”

“그거 잠깐 풀어봐.”

김유성의 말에 지수가 절대 중립을 해제했다.

그리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다짜고짜 김유성의 검이 휘둘러졌다. 모든 걸 베어내는 용사의 검. 그것이 지수의 가슴팍을 가로질렀다. 김유성이 진정으로 베어낸 것은 지수의 몸이 아니라 영혼이었다. 영혼에 칼집이 새겨져 피가 흐른다. 지수는 존재의 근간이 흔들리는 감각을 느꼈다.

“지금, 무슨….”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신성의 근간인 영혼에 베인 상처가 났다. 지수가 강대한 용왕의 혼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미 죽어버렸을 것이다. 무엇이든 베어내는 용사의 검이라는 게 이런 짓까지 가능할지는 몰랐다. 검을 든 김유성이 숨을 헐떡대며 무릎 꿇고 있는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용사님의 과외시간 2교시다. 지금 당장 자기가 뭐 하는 놈인지 깨닫고 영혼을 확실히 못 굳히면, 너 진짜 죽어.”

해석사라며, 죽을힘을 다해서 너 자신을 해석해보라고. 그런 김유성의 목소리와 함께, 지수의 시야가 새까맣게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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