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2) >
정신을 차렸을 때 지수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눈을 뜨는 동시에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히 방금까지 일행들과 함께 환상의 회랑을 공략하고 있었고, 마지막 방에서 루드비히가 튀어 나와… 허탈하리만치 간단하게 패배당했다. 그랬다. 자신은 졌다. 그것을 깨달은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멍청하게 방심했어.’
아니. 오히려 방심했다기보다는 너무 경계하느라 생각이 깊어진 탓이었다.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길래 잡아봤더니, 당연하다는 듯 지수의 손등에 새겨진 티켓의 각인을 파기시켰다. 환상의 회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실행 자체가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역시 그것은 진짜 마왕 본체가 맞았다.
빌어먹을 양반, 하고 한바탕 욕설을 내뱉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은 가면 너머로 비치던 눈빛이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도 마음에 걸렸다.
루드비히가 지수의 티켓을 부쉈을 때, 그의 눈동자에서 느껴진 건 방해물을 제거했다는 달성감이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연민이었다. 적을 쓰러뜨리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제 그냥 편히 쉬라고 독려라도 해주는 듯한 동정 어린 시선.
‘뭐 이제 너 끝장이니 고생할 필요 없겠네, 그런 건가?’
심중을 읽어내 보려고 하던 지수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마왕, 그자는 지수가 아는 한 세상에서 제일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패배했고, 환상의 회랑 공략에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다 끝났군 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수에게 있어 패배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중요한 승부처에서 제대로 이겼던 적이 드물었다.
‘드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없는 거 아냐?’
인형사와의 승부에서도 패배했다. 살아남은 건 허다인이 구출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협회장과의 결전에서도 패배했다. 살아남은 건 밴더스내치가 계약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아그리올라와 싸웠을 때도 패배했다. 살아남은 건 서민하가 가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전적이 영 말이 아니었다.
자신은 어느 쪽이냐고 하면 남한테 도움받기보단 남들을 도와주는 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다른 사람들 바짓가랑이만 붙잡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내쉰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나잖아.”
그 말대로 그것은 지수 자신을 그린 그림이었다. 커다란 캔버스에는 지수가 지나온 생애의 풍경들이 그려져 있었다. 학창시절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능력을 각성했을 때, 집행부에 들어갔을 때, 용왕이 되었을 때…. 그 모든 모습들이 하나의 콜라주처럼 각각의 위치에서 작품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이내 지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 환상의 회랑 공략에 실패한 이들은, 그대로 한 장의 그림 안에 갇혀 회랑의 전시품으로서 보관당한다. 분명히 루드비히의 공략집에 쓰여 있었던 사실이었다. 이곳은 바로 그 그림의 감옥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까마득한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답답함이나 초조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가 냉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에 동요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느낌이었다. 단지 평온했다.
그림 안이라 그런 것인가. 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지수의 상태 또한 변화하지 않았다. 원래 그림의 본질이란 변하지 않고 쭉 그대로인 점에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의식이 남아있는 건… 절대중립 덕분인가?’
지수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일렁이는 둥지의 역장이 지수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법칙의 간섭을 차단하는 절대 중립. 그게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그림과 동화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일단은 다행이었다. 사고가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해결법을 모색할 수가 있다. 당장 우선해야 할 것은 이 그림 속 공간에서 탈출하는 것. 하지만 솔직히 뭘 어째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수는 그림을 향해 마법을 쏘아내 보았지만, 액자는 떨어지지도 깨지지도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지수가 생각나는 탈출 방법을 있는 대로 시도해보고 있을 때, 그것은 불현듯이 나타났다. 지수가 휙 고개를 돌아보자 그곳엔 이형적인 형태의 괴물이 서 있었다. 괴물은 하얀 색의 이족보행 장수풍뎅이 외계인 같은 생김새였다.
“뭐, 뭐야!”
“뭐냐고 물었나? 나는 화가 엔드로어.”
외눈박이의 눈동자가 지수를 관찰하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애용하는 재료는 영혼, 선호하는 색채는 비극. 무언가의 말로와 끝, 마지막을 화폭 위에 박제하는 존재. 그렇기에 누군가는 나를 이렇게 부른다, ‘종말을 그리는 자’라고.”
괴물이 기계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지수가 당황해서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나타나니 놀라서 뭐야, 하고 소리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성실한 답변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털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지금 괴물이 한 말.
“종말을 그리는 자라고…?”
지수는 루드비히의 수기에 적혀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환상의 회랑, 보스는 종말을 그리는 자.’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지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 환상의 회랑의 주인이자 보스 몬스터였다. 지수의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엔드로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네가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 이미 끝나 그림 안에 박제된 자가 어째서 아직 움직이는가.”
그 질문으로, 지수는 상황을 파악했다. 티켓을 잃은 도전자를 그림 안에 박제시킨다. 그것이 눈앞의 괴물이 환상의 회랑의 보스 몬스터로서 가지고 있는 능력인 듯했다. 그런데 지수가 절대중립으로 그림 안의 공간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신경이 쓰여서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던 것일 테고.
이내 엔드로어가 고민에 빠져있는 지수에게 말했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좋다. 너는 나의 미학에 어긋난다.”
그러니 지우도록 하지. 엔드로어가 팔을 들었다. 이렇게 된 거 싸워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동료들은 지금 그림 안에 봉인되어있는 채 일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지수 혼자뿐. 눈앞의 괴물은 환상의 회랑의 보스 몬스터일 테니, 이놈 하나만 처리하면 전부 오케이였다. 지수가 현상해석을 발동했다.
그리고 지수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난 순간, 엔드로어의 눈동자 또한 황금색으로 빛났다.
“뭐?”
기분 탓 같은 것이 아니었다. 현상해석으로 읽어낸 최적의 행동을 엔드로어 또한 똑같이 읽어냈다. 지수가 정령무장을 끌어내자, 엔드로어의 팔에도 정령무장이 발현되었다.
이내 지수가 용언마탄을 발사하자, 엔드로어의 정령무장에서도 똑같은 용언마탄이 발사되었다.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환각이나 속임수 따위가 아니다. 어쭙잖은 흉내조차 아니었다. 실제의 위력 또한 용언마탄과 완전히 똑같았다.
"무슨...."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능력을 따라하는 능력인 건가?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용언마탄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했다. 사람이 아가미로 호흡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이것은 단순히 기술을 따라 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경악해서 입을 벌리고 있는 지수에게, 엔드로어가 담담히 해설했다.
“저것은 너의 그림이다.”
엔드로어의 손가락 끝에는 지수 자신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액자에는 지금까지 지수가 걸어온 행적들이 비치고 있었다. 능력을 얻었을 때의 일도, 용왕이 되었을 때의 일도, 필살기를 만들었을 때의 일도. 그것은 하나의 연대기였다. 엔드로어의 손 위에 파사의 마력이 발현되었다.
“그리고 그림은 화가의 것. 네가 깨달아온 모든 성취도,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도. 나는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네가 너인 이상 네 그림의 주인인 나를 이길 수는 없다.”
상황을 이해한 지수는 낭패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제대로 모든 그림들을 쓰러뜨리고 보스 몬스터에게 다다랐다면, 이렇게 지수의 능력을 모조리 도둑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에 갇혀버린 지금, 엔드로어는 지수를 비롯한 도전자들의 능력을 전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의 눈은 정말로 대단하군. 현실을 쪼개어 보는 마안인가? 이것이 있다면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
지수의 시야를 얻은 엔드로어가 감탄하며 말했다.
상대 또한 현상해석을 사용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으로 길을 개척해온 지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같은 능력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라면 능력의 사용에 익숙한 이쪽이 유리하다. 지수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엔드로어의 뒤에서 새빨간 피의 검들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서민하의 혈검이었다. 그랬다. 서민하와 정유현, 흑마녀 또한 지금은 그림이 된 채였다. 그게 의미하는 건, 눈앞의 괴물이 지수의 능력은 물론 그 세 사람의 힘까지 자기 손발처럼 쓸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혈검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지수는 현상해석으로 날아오는 검들의 궤도를 읽고 피했지만, 엔드로어 또한 현상해석을 사용해 지수가 취할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또 색달랐다. 날아다니는 지수가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화가면 그림이나 그리지 왜 이딴 능력이 있는 건데!”
“나의 숙원. 최고의 걸작을 그리기 위해서다.”
엔드로어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는 지수의 병렬사고를 마음껏 활용하며 서민하의 검들을 조종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리는 그림들은 무언가가 맞이하는 ‘끝’. 그런 내게 주어진 최대의 소재는, 세계 그 자체의 끝이다. 하지만 세상이 끝나는 풍경을 보고 그림으로 그리기 위해선, 세상이 끝나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내 살아생전 보기는 힘들겠지.”
그리고 엔드로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생각한 것이다. 나 스스로 세상을 끝낼 힘을 손에 넣자고. 그걸 위해 만든 것이, 이곳 환상의 회랑.”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 괴물은 세상이 끝나는 날의 풍경화를 그리고 싶으니 세상을 끝내버려야겠다,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신병의 수준이 지수가 아는 누군가와 비슷했다. 매드 티 파티의 예술가. 이 괴물이 바깥으로 나갔다면 예술가는 이레귤러로 각성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수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루드비히의 수기. 그곳에는 뭐라고 쓰여있었지?
‘클리어하기 위해선 자신의 한계를 돌파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러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엔드로어가 그린 그림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지수가 걸어온 행적’이니, 싸우는 도중에 한 단계 성장한다면 아무리 놈이라고 해도 따라 할 수 없다. 지수가 혀를 찼다. 말이 쉽지, 상대를 어떻게 이기냐는 질문에 ‘더 세지세요’ 라는 대답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점에서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극적인 성장을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종말을 그리는 자의 능력의 빈틈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바깥에서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 자신의 모든 능력은 저쪽 또한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신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아닌 것’을 찾아내야 했다. 완전히 모순이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그렇게 지수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뇌리에 번뜩임이 스쳤다.
있었다. 자신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아닌 것.
발상은 떠올랐다. 하지만 실제로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실행해보기 전엔 확신할 수 없었다. 실패했다간 그대로 끝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엔드로어가 손바닥을 내뻗었다.
“험프티 덤프티.”
정유현의 능력. 커다란 중력의 구체가 지수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지수는 곧바로 떠올린 방법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압사한 뒤 소멸이었다.
“영혼시.”
지수가 눈을 감았다. 자신의 영혼의 형태가 세밀하게 보였다. 뇌리에 떠올리는 것은 명확한 하나의 이미지였다.
영혼에 꽂혀 있는 검들을 빼낸다.
그것은 일종의 세이브 데이터였다. 누군가가 지수의 혼에 강제로 박아넣은, 어떤 존재의 근간이 되는 기록. 그것을 바깥으로 빼내 하나의 형태로 만든다면, 이 상황을 타파할 가능성이 생긴다. 지수의 손에 황금색의 빛이 일렁였다. 지수 주변을 감싼 중력의 구체가 점점 작아지며 공간을 먹어치웠다.
죽기 직전의 상황임에도 지수는 오직 내면에 집중했다. 기억을 더듬는다. 자신의 힘을 한 장의 페이지로 제련해냈던 앨리스. 그때 엿보았던 공정을, 그대로 해석해서 재현한다. 지수의 영혼에서 뽑아낸 검들은 하나의 페이지가 된다.
그리고 완전히 줄어든 중력의 구체가 지수의 몸을 찌부러뜨리려 할 때, 안쪽에서 빛나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페이지 넘기기.”
이내 수많은 활자로 분해된 재버워키의 몸은, 누군가의 존재를 재현할 그릇이 되어 형태를 이뤄갔다. 푸른 안광과 빛나는 금발. 그것은 이 시대 가장 유명한 영웅의 모습이었다. 휘둘러진 검과 함께, 결코 베일 리 없는 중력의 역장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격렬한 검풍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땅에 내려선 남자는 뚜둑, 하고 목을 풀었다. 중력의 구체를 베어내 버리자 사각에서 수십 자루의 혈검들이 날아왔지만, 남자가 눈을 한 번 부라리는 것으로 혈검들이 모조리 부서져 버렸다. 용사의 심검. 말도 안 된다고 욕하던 게 잠깐 전 같은데, 아군으로 두면 이렇게나 든든한 기술이었다.
“뭔데 이건?”
지수의 그림을 본 남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기분 나쁘다는 듯 검을 크게 휘두르자, 액자와 함께 그림이 싹둑 잘려나가며 아공간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지수의 그림이 찢어진 것으로, 엔드로우의 눈동자에서 현상해석의 안광 또한 사라졌다. 밖으로 탈출한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파훼였다.
“...역시 사기야.”
바야흐로 용사의 재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