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46화 (146/176)

146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2) >

걸어가던 정유현이 협회장의 코앞에서 멈춰 섰을 때.

협회장의 몸이 쩍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허리춤까지 쭉 찢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입처럼 변했다. 톱니 같은 이빨과 함께, 협회장의 등에서 촉수 같은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에서 나타난 협회장은 이미 인간조차 아니었다.

단지 입만이 있는 괴물. 꿈틀거리는 뱀. 전갈의 다리와 코끼리의 상아 같은 것. 새의 날개, 인간의 것처럼 보이는 팔. 하나하나가 극히 위험한 괴물들의 말단이었다. 협회장은 그 수많은 괴물들을 조련사의 능력으로 조율하며 자신과 동화시키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궁극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래서야 이미 인간의 자의식조차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네 말로인가.”

정유현이 무언가 납득한 듯 말했다. 그리고 온갖 괴물의 사지들이 정유현을 먹어치우려고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유현이 손바닥을 활짝 펴 내밀었다. 그러자 진보라색의 거대한 중력 껍질이 나타나 협회장을 보이지 않게 감쌌다.

정유현의 손에 핏줄이 돋아났다. 전력으로 발현된 중력의 구체는 협회장을 그대로 찌부러뜨리더니 한 점으로 수렴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결착이었다. 정유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 용만 치우면 되겠군.”

지수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은 끝났다. 완전한 상태의 아그리올라라고 해도, 이쪽은 각성한 정유현과 지수를 포함한 네 명. 쓰러뜨리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정유현이 험프티 덤프티로 아그리올라의 거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룡이 울부짖으며 몸을 휘젓자 구체는 더 이상 수축하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정유현이 콧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 되나.”

험프티 덤프티는 분명 대단한 기술이었지만, 무엇이든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 있는 무적의 필살기는 아니었다. 아그리올라는 한 번에 치워버릴 수 없었다. 첫째로 몸의 크기가 너무 거대하고, 중력의 구체가 압착하는 힘보다 아그리올라가 버티는 힘이 더 강했다. 하지만 정유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보다도, 상대방의 공격을 지워버리거나 동작을 무너뜨리는 편이 몇 배는 효율적이었다. 사실 전황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그때그때의 판단으로 임기응변을 하는 것이 정유현의 스타일에 더 맞기도 했다.

‘쉬워.’

날아다니는 지수가 생각했다. 분명 지금의 아그리올라는 봉인의 기둥 속에서 죽을 뻔하면서 용왕을 토벌했을 때보다도 훨씬 강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지수는 아그리올라를 쓰러뜨리는 게 너무도 간단하게 느껴졌다. 지수가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었다.

아그리올라가 어떤 식으로 행동해도 지수의 빈틈을 찌를 수 없게,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정유현이 아그리올라의 태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험프티 덤프티로 지워진 공간은 그대로 주변의 물체들을 끌어당긴다. 지수를 올려치려고 하던 흑룡의 발톱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용언마탄이 작렬했다.

“둘이 완전 신났네.”

“끼어들 틈이 없네요….”

옆에서 보고 있는 서민하와 흑마녀가 중얼거렸다. 도와줄 필요도 없다. 옆에서 여유롭게 구경할 수가 있을 정도로, 정유현과 지수는 압도적으로 아그리올라를 뭉개버리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흑룡의 거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적들이 물감으로 돌아가고, 액자에 열쇠의 그림이 나타났다. 지수가 다음 방을 열기 위한 열쇠를 꺼냈다.

열쇠를 쓰기 전에 우선, 한 번 심호흡을 했다.

환상의 회랑. 확실히 지금까지의 S급 던전과는 차원을 하나 달리하는 수준의 난이도였다. 평범한 구성된 원정대였다면 첫 번째 방에서 간단히 몰살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마지막 방까지 다다랐다. 이제 단 한 번의 전투. 단 한 번의 전투만 끝내면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

“마지막이니까 기합 넣고 가죠.”

“그래.”

지수가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기운은 고양감과 긴장의 균형을 잡은 채로 날카롭게 갈무리되어있었다. 어쭙잖게 휴식한다고 시간을 보내면서 이 집중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수가 문손잡이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회랑의 마지막 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수는 곧장 회랑에 걸려있는 그림을 확인했다. 마지막 방에 구현될 적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바로 대응책을 짜야 했다. 그리고 지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환상의 회랑, 마지막 방의 액자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그림과도 달랐다.

액자의 캔버스가 찢어져 있었다.

“…이거 고맙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새까만 모피 망토와 연극의 주인공 같은 깃털 달린 가면. 가면 뒤로 늘어뜨린 은발. 액자를 찢어버리고서 나온 것은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였다.

“그림이 말하고 있잖아.”

서민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림이랑 목숨을 걸고 싸우던 판에 이제 와서 그림이 말을 한다고 놀라는 것은 새삼스러웠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지금까지 환상의 회랑이 그림으로 구현한 존재들은 형상이나 능력만을 따라 할 뿐 단 한 번도 스스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고 있는 마왕이 말했다.

“내 본체는 봉인을 메꾸느라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못해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그릇을 만들어주다니. 이 안에서만 쓸 수 있는 힘이겠지만 이 정도면 감지덕지하지.”

지수는 그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액자를 그대로 찢어버리고 나온 저 존재. 마왕의 몸은 지금 그림으로 구현되어있어도, 그것을 차지하고 있는 정신은 진짜 본체였다. 대체 어떤 원리로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 재버워키랑 계약했을 때도….’

자취방 옥상에서 흑마녀가 만들어준 정령의 호롱불을 사용했을 때의 일. 재버워키가 지수에게 환상으로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만들어내자, 진짜 루드비히가 눈치채고 나타나 환상 자체를 부숴버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재현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완전한 단독성. 마왕 루드비히는 그러한 존재였다.

지수가 경악한 채로 사고를 채찍질하고 있었을 때, 다른 일행들은 이미 전투행위에 들어가고 있었다. 혈석의 반지가 빛나는 것과 함께 수많은 혈검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정유현의 손바닥에서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발현되고, 흑마녀의 뒤에서 신기루처럼 거대한 포대가 나타나고 있었다.

“붉은 여왕.”

“험프티 덤프티….”

“발푸르기스의 밤!”

자신만의 오의를 개발한 서민하. 모든 마녀의 힘을 융합시킨 흑마녀. 초월의 영역에 발을 들인 정유현. 이 환상의 회랑에 들어오고 나서, 한 명 한 명이 평범한 S급 헌터들 따윈 떼거리로 몰려와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런 세 사람의 절기가 일제히 무방비 상태의 마왕을 향해 날아갔고.

“쇼 스타퍼.”

마왕이 속삭인 순간 모든 공격이 전부 멈추었다.

중력의 구체는 발현되는 도중의 껍질 그대로. 마도의 집약체인 포대는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버리고, 날아가고 있던 혈검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허공에 뜬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너무나 여유롭게 서 있었다.

멈춰버린 것은 능력만이 아니었다. 마왕을 공격한 세 사람은 이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해치려는 의도가 없을 뿐, 루드비히가 마음만 먹는다면 호흡조차 정지한 채로 질식사해버릴 것이었다. 지수는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과는 다르다. 일행 모두가 대단히 강해진 채였다.

‘완전히 상대가 안 돼.’

그런데도 아직 이만큼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인가. 말 그대로 차원 하나가 다른 수준이었다. 반쯤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지금이기에 알 수 있다. 눈앞에 서 있는 저 존재가 얼마나 괴물인지.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바라본 루드비히가 말했다.

“흠. 조악한 그림치고는 재현율이 꽤 좋군.”

지수의 눈동자가 흔들렷다. 환상의 회랑이 그림으로 재현한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방금 그가 한 말에 담겨있는 의미는, 꽤 잘 재현해 놓긴 했지만 백 퍼센트는 아니다… 그러한 뜻이었다. 지금의 루드비히는 만전의 상태조차 아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너뿐인 것 같군, 스나크.”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용왕 스나크를 바라보았다.

모든 걸 정지시키는 마왕의 파동에 영향받지 않은 것은, 지수가 마왕의 힘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수는 몸에 둥지를 두르고 있었다. 절대 중립. 그것은 오로지 외부의 비틀림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에만 집중한 능력이기 때문에, 상대 힘의 크기와 상관없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움직임이 다소 정체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지수가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왕의 능력에는 이전에도 어느 정도 저항해본 적이 있었다. 절대 중립을 얻은 지금은 어떻게 한 번 싸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그림으로 재현된 상태일 텐데도, 이전 보다 훨씬 흉악한 힘이었다.

“이렇게까지 강할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나?”

가면 속의 눈동자가 지수를 바라보았다. 정곡을 찔린 지수가 움찔했다. 심상해석 같은 것을 사용한 게 아니었다. 단지 그러한 의문이 지수의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을 뿐이었다. 루드비히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멸망을 유예하려면 해야할 일이 산더미만큼 있었다. 유지시킬 것도 많았고. 그래서 내 힘을 여러 곳에 분산해놨었지. 하지만 이제 필요 없게 되었으니까. 되찾아왔을 뿐이다.”

지수가 흠칫 눈썹을 떨었다. 이를테면 네버랜드와 같은 곳들. 마왕이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안배들은, 지수의 손에 박살 나 그 기능을 정지당했다. 그러니 더 이상 그곳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고 있었던 힘을 묶어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루드비히는 이전보다 강해진 것 같은 게 아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을 되찾았을 뿐. 이전엔 단지 다른 데에 신경을 쓰느라 지수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지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멈춰 서 있는 동료들은 단지 움직임을 봉인당했을 뿐 따로 상처를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싸움을 강제로 멈춰버리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평화주의자라는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다웠다. 그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지수가 입술을 깨물며 루드비히에게 물었다.

“왜 앞을 막아서는 거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S급 던전을 공략하는 건 당신한테도 좋은 일일 텐데. 당신이 순순히 쓰러지기만 하면 환상의 회랑은 끝이야.”

지수의 말은 정론이었다. 공략법이 적혀있는 수기까지 남겨가면서 S급 던전들을 클리어하라고 재촉한 루드비히다. 보스 몬스터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해도, 그런 그가 환상의 회랑을 클리어하지 못하게 이런 곳에서 지수를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그런 건 어찌 되든 상관없는 시점이다.”

“뭐?”

“여왕의 봉인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야 S급 던전도 청소할 필요가 있지. 세상이 난장판이 되는 건 나도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하지만 용사와 스나크 네가 거하게 일을 저질러버린 탓에, 그런 차선책은 선택할 수조차 없게 됐어.”

루드비히가 천천히 지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유현도 서민하도 흑마녀도, 자신을 묶고 있는 힘에 저항하려 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루드비히가 지수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너다. 발뺌할 생각 마라. 여왕의 봉인을 박살 내고, 여왕과 싸움이라도 한판 벌이려는 생각이겠지?”

당연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김유성은 자신을 버리고 지수에게 의지를 맡겼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온 세상의 S급 헌터들을 모아 던전들을 공략해왔다. 전부 다, 여왕을 쓰러뜨려 세상이 통째로 먹혀버리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루드비히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수에게 눈짓했다.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한 태도였다. 지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루드비히가 말했다.

“뭐 하고 있지? 악수하자는 거다.”

지수는 심상해석을 시도했지만 루드비히의 심중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비슷한 능력의 사용자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악수라니. 싸우지 말자는 뜻인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지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루드비히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지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설마 정말로 악수해올 줄이야. 이제 보니 순진하군."

루드비히가 마력으로 간섭한 것은 지수의 손등에 박혀있는 문양이었다. 환상의 회랑의 티켓. 지수는 맨 처음 안내인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티켓이 손상되는 순간, 즉시 모든 입장객은 손님의 자격을 잃고 회랑에 전시된 그림이 되어버린다. 지수가 고개를 들자, 루드비히가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스나크? 내가 이 던전의 성질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고.”

지수의 손등에 있는 티켓이 일그러지며 사그라들었다. 그것은 곧, 던전의 공략에 실패했다는 걸 의미하는 모습이었다. 루드비히가 멍하니 입을 벌린 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 스나크, 그림 속에서 좋은 꿈 꾸길.”

환상의 회랑이 패배한 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