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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145화 (145/176)

145화.  < 나중의 언젠가가 아니라 (1) >

정유현의 몸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달려나가는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장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수준의 힘이 느껴졌다. 이것과 비슷한 기척을 이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엇다. 아그리올라의 둥지에서, 능력을 폭주시킨 정유현이 중력의 특이점을 발현했을 때.

‘설마 그 짓을 또 하려고?’

현기증이 느껴졌다. 뇌리에 그때의 참격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이 쓴 기술의 반동으로 팔다리의 근육이 찢기고 뼈가 비틀리며 피투성이가 되어버렸던 정유현.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두 번 다시 사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유현을 향해 달려갈 여유조차 없었다.

세 번째 방의 그림에서 나타난 것은 협회장이었다. 다만 문제인 것은 협회장보다도, 그 옆에서 나타난 괴물 쪽이었다. 보석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흑룡. 그것은 아그리올라였다. 봉인 속에서 싸웠을 때와는 달랐다. 루드비히에게 빼앗긴 심장을 되찾은, 완전한 상태의 용왕 아그리올라.

<왕님. 집중해야 해.>

만년필이 공명했다. 지수가 입술을 씹었다. 정말 그 말대로였다. 용왕인 지수에게는 용언의 직접적인 간섭이 통하지 않더라도, 나머지 세 사람에겐 충분하고도 남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정유현의 경우엔 아예 내성 자체가 없으니 아그리올라의 용언 한마디에 온몸이 찢겨나갈지도 몰랐다. 지수가 아그리올라 앞에 달려나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선대(先代)를 마주한 지수가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용왕은 용왕끼리 놀자고.”

눈을 돌리자 서민하와 이유라는 키메라를 향해, 정유현은 협회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서로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누가 어느 쪽을 상대할지 순간적으로 정해졌다.

입꼬리를 올린 것과 다르게, 지수의 속은 초조함에 타들어 갔다. 솔직히 말해서 완전한 아그리올라라고 해도 공격을 흘려내거나 피해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공격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틀어막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어떤 식으로 상황을 조립해야 할지부터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른 이들을 지키며 싸운다. 그런 전제 아래에서, 날뛰는 아그리올라는 손댈 엄두가 나지 않는 난제였다. 지수의 눈이 재빠르게 돌아 가며 변수들을 확인했다. 이미 정유현에게 달려가 허튼짓하지 말라고 멱살을 쥘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지수 대신에 정유현에게 한 마디 한 것은 서민하였다.

“죽으면 안 돼.”

담담한 목소리였다. 음성은 내일 약속에 지각하면 안 돼,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가벼웠다. 지수를 제외하고는 아그리올라의 둥지에서 정유현의 자멸을 지켜보았던 유일한 인간. 그게 바로 서민하였다. 그렇기에 지금 정유현이 또 범상치 않은 짓을 저지르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행부에 유라가 들어갔다며. 걘 직장생활 같은 거 해본 적 없을 테니까, 옆에서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해.”

자긴 해본 적이 있다는 듯한 말투에 정유현이 피식 웃었다.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서민하의 표정은 진지했다. 자신의 친구의 든든한 빽을 위해서라도, 정유현은 멀쩡히 돌아가야 한다. 사심이 가득 섞인 진심이었다. 그냥 나는 당신이 다치는 게 싫다고 말하기엔 조금 부끄러웠던 결과이기도 했다. 서민하의 말에 정유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긴 인형사를 혼자 놔뒀다간 큰일이겠지. 여차할 때 힘으로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나 정도밖에 없을 테니.”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정유현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그런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면, 쉽게 죽을 수야 없지.”

이내 아그리올라를 견제하던 지수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달라졌다. 지금 정유현에게서 터져 나오고 있는 소용돌이는, 폭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맹렬히 회전하며 날뛰는 진보라색 기운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었다.

끼이익,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S급의 건너편.’

단지 능력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영역을 새로 구축하는 단계. 각성자로서는 김유성과 지수만이 발을 들이고 있던 그 경지를, 지금 정유현이 문틈으로 엿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너무나 놀라운 현상이었던 탓에, 단 한 순간이었지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그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용왕의 언령. 그 특성상, 아그리올라가 내뿜는 단 한 번의 숨결조차 지수에겐 별거 아니어도 다른 이들에게는 대응이 불가능한 일격이 된다. 그것을 알기에 지수 쪽에서 아그리올라의 모든 언령을 일일이 요격해 해체하고 있었지만, 지금 하나의 용언이 사그라들지 않은 채 정유현 쪽으로 날아갔다.

시간을 멈추고 싶은 위기감이 지수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고. 이내 협회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정유현은, 조용히 주먹을 쥐는 것으로 날아드는 용언의 저주를 소멸시켜버렸다.

“어?”

그걸 본 지수의 얼굴이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찼다.

말도 안 된다. 불가능하다. 정유현이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먼저 지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러한 의문들이었다. 어떻게 계산을 해봐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순수한 용왕이 내뱉는 언령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하나의 율법이었다. 인간의 체계로는 반박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닌 상위언어. 따로 용언을 파훼하기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대응 자체가 불가능한 반칙 기술이었다. 막말로 죽으라는 용왕의 용언에 노출되면 그냥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가볍게 코웃음 치며 용언을 막아낼 수가 있는 것인가. 지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정유현에게서 용언에 저항할 수 있는 요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그리올라가 다시 한번 용언을 주창했다. 이번에도 정유현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용언을 소멸시켰다.

‘말도 안돼.’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분명히 포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현상해석으로 지켜보았다. 정유현은 용언에 저항하거나 버텨낸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용언이 발동되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기 전에, 언령의 마력 자체를 통째로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중력의 특이점. 정유현의 능력을 극도로 압축해 한 점에 집중시키는 것으로, 자그마한 블랙홀을 만들어내는 기술. 정유현이 한 것은 그것의 응용이었다. 달걀의 껍데기처럼 자신의 능력을 전개해 대상을 감싸, 한계까지 압축시킨 뒤 그대로 소멸시킨다.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든 가능한 기술이었다.

“험프티 덤프티.”

정유현의 손 위에서 진보라색의 구체가 순식간에 축소하더니, 허공의 한 점으로 수렴해 쏙 사라졌다. 완벽하게 기술을 다루고 있다. 바로 그것이 이상한 점이었다. 압축된 끝의 한 순간 발현되는 건 다른 것이 아니라 미세한 블랙홀이었다.

그런 걸 몸 가까이에 만들어내는 건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다. 단지 능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평범한 방식으로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이미 해답은 알고 있었다. 경우의 수는 한 가지뿐이다. 세상 모든 것을 베어내는 김유성의 검처럼, 바깥의 참견을 거절하는 지수의 둥지처럼. 정유현 또한 능력에 자신의 심상을 투영해, 법칙을 비틀어버리는 영역까지 다다른 것이다.

‘초월.’

말 그대로 ‘한 꺼풀 벗었다.’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것은 이미 해석이 끝났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 한순간에 그만한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냐 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원래부터 실력은 충분했는데…뭔가가 막혀있었던 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수의 추론은 정답이었다.

사실 정유현은 이미 각성자로서 한계에 가깝게 단련되어있었다. 그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자질의 탓도 있고, 능력을 한계 이상까지 폭주시킨 뒤 몇 번이나 죽음에서 돌아온 경험 덕분이기도 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 부족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자신에 대한 확신. 확고한 형태로 굳어진 정신성.

누구보다 냉철하고 망설임 없는 정유현에게 그런 요소가 부족하다는 건 이상하게 여겨질 일이지만, 사실 정유현은 상당히 불안정하고 인간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유현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인간인지에 대해서 탐구하고 규명하는 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화상 또한 흐릿하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길 원하는지, 어떤 바람을 지니고 있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많은 현장에 나가 하나라도 더 많은 실적을 내야만 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 건 그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미쳐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정유현은 누구보다 단순명쾌한 인간처럼 보이면서도, 그 안에 누구보다 많은 모순이 양립하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을 혐오했다. 끔찍한 참극을 봐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냉정히 잘라내면서도, 눈앞의 불합리를 내버려둘 수 없다고 분노하는 자신이 있었다.

일 처리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올바른 방식이라 생각하면서도 잘못된 방식이라 괴로워했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혐오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앞뒤가 맞지 않는 감상에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단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도 ‘집행부의 늑대’라는 기능은 문제없이 작동했으니까. 일 처리에 차질이 없다면 굳이 오류를 헤집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에 너무 깊게 빠져있다가, 여차할 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다 서민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다 박사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조금씩 어긋나고 있던 톱니바퀴는 점점 더 큰 균열을 만들어냈고, 눈치챘을 때 정유현은 이미 자신의 모순에 잡아먹혀 있었다. 파국은 예정된 것이었다. 자신의 가장 커다란 실패. 그림 속에서 나타난 흉왕을 마주했을 때, 더 이상 내면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지수에게 격려받았을 때, 정유현은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똑바로 마주보았다. ‘하는 편이 좋은 일’이나 ‘해야만 하는 일’ 아닌, 순수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한 번 직시하자, 해답은 간단하게 도출됐다.

“박사 너는 책임감 있는 인간이다. 누군가를 위해 진지하게 화낼 수 있고, 싫어하는 일을 묵묵히 해낼 수 있어. 이상할 정도로…. 아마 너 같은 사람을 호인이라 하는 거겠지.”

한 번 어긋났던 톱니바퀴는 제대로 된 자리로 돌아왔다. 척척박사가 오류를 고쳐주었기 때문에. 정유현이 한 발짝 내딛자, 진보라색의 구체가 키메라를 감싸기 시작했다. 서민하와 흑마녀가 놀랐다. 손바닥을 쫙 편 정유현이 천천히 주먹을 쥐기 시작했다. 괴물을 감싼 중력의 껍질이 수축해간다.

“하지만 너는 약해.”

키메라는 어떻게 저항해보려 했지만,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줄어드는 구체는 압착 프레스기처럼 거대한 괴물을 찌부러뜨리기 시작했다. 꾸륵, 꾸륵, 뿌드득. 구체 안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하나의 점이 된 구체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결착의 소리는 오싹할 만큼 고요했다.

“쓸데없는 걱정만 많고, 냉정한 척하지만 물러터졌지.”

그것을 정신적인 약함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냉소적인 표현이었지만, 저 앞으로 걸어가기로 결심한 지수에게 있어 치명적인 약점인 것은 사실이었다. 정유현이 앞으로 걸어갔다.

“해야 할 일이니까 해야만 한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해도,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해. 분명 계속 고민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크고 작은 무언가를 내려놓게 되겠지. 그렇게 내려놓은 건 미련이니 실수니 하는 이름으로 뒤에서 네 발목을 잡아당길지도 몰라.”

험프티 덤프티. 적의 공격을 감싸 깨끗이 없애버리는 중력의 구체가 비눗방울처럼 뽕뿅 솟아났다. 아그리올라가 발동한 용언들은 허무하게 세상에서 지워져 버리고, 낮게 깔린 정유현의 목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게 신경 쓰여서 뒤를 돌아볼 일 없도록, 내가 깨끗이 쓸어 담지. 급히 서두르느라 실수로 떨어뜨린 게 있다면 내가 멈춰서 주워주지. 박사 네가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내가 대신 포기하겠어. 너는 그저 앞만 보고서 걸어갈 수 있도록.”

그것이 정유현이 찾아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다. 자신의 희망. 그 어깨에 짊어지기엔 너무 많은 것들을 메고서, 해야만 하는 일이 라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길에 방해되는 것들을 전부 치워주고 싶다. 그런 심상이 발현된 능력이 바로 험프티 덤프티였다.

“내가… 네 청소부가 되겠다.”

정유현의 걸음이 협회장의 앞에서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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