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7) >
“…한 번 재정비하고 다시 들어오는 게 낫지 않겠나.”
회복의 룬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고 있던 지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말한 것은 정유현이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단지 위험할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가자,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정유현은 생애를 실전 속에서 살아온 인간. 두 번째 방까지 파죽지세로 돌파한 지금, 이 흐름이 끊기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제안하는 것이다. 한 번 물러나는 게 어떻냐고. 방금 지수는 김유성의 검에 목이 싹둑 잘려나갈 뻔했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의 승리였다. 그건 결국 쓰러뜨리는 순서를 잘못 지켜 김유성의 지뢰를 밟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밖에 나가서 다시 준비를 하고 돌아오면, 이미 쓰러뜨린 그림 속 서민하와 그림 속 이유라를 다시 쓰러뜨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 훨씬 간단하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정유현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의미가 없어요.”
정유현의 제안에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전투속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있다면 모를까, 나갔다 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은 사람은 없다. 지수는 방금 분명히 죽을 뻔했지만 결국 그것뿐, 김유성의 검은 지수에게 닿지 못했다. 몸 상태는 잔상처 몇 개를 빼면 쌩쌩한 편이었다. 굳이 나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나갔다 들어왔을 때, 그림에서 재현되는 적이 이전과 똑같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환상의 회랑은 쓰러뜨렸던 적수를 최악의 형태로 재현하는 던전. 일종의 패자부활전이었다. 어차피 지수의 경험은 한정돼있으니 첫 번째 방에서 똑같이 서민하가 나타난다고 해도, 다음번에는 흉왕보다 더욱 치명적인 형태로 구현될지 몰랐다.
사실 지수는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이곳 환상의 회랑이 방 하나를 클리어할 때마다 나갔다 들어오는 것으로 최적해를 찾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루드비히가 수기에 공략법을 정립할 수 없다고 못 박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비장의 무기나 마찬가지였던 앨리스의 페이지도 써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나갔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담담히 말하자, 정유현은 눈썹을 찌푸린 채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박사. 방금 우리가 몇 초만 늦었어도 넌 죽었을 거다.”
“네, 감사해요. 솔직히 반쯤 죽었다 생각했는데.”
지수가 고개를 꾸벅였다. 정유현이 순식간에 이쪽의 의도를 파악해, 인형사를 일 초라도 빨리 쓰러뜨리는 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지수는 김유성의 검에 사지가 찢겨나갔을 것이었다. 정유현에게는 분명 전황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조하는 플레이메이커의 자질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그리고 정유현이 지수에게 말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어딘가 화나 있는 것처럼 들렸다. 지수가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잠깐 꾹 미간을 누르고 있던 정유현이 입을 열었다.
“박사, 너는 죽을 뻔했어.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지만 그건 계산된 게 아니라 큰 도박에서 이겼을 뿐이야. 일이 꼬였다면 정말로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나타날 적은 이보다 더 강하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나?”
“아뇨.”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야 그렇겠죠.”
지수가 작게 콧숨을 쉬었다. 그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뭐 목숨 하나 걸지 않고 게임 감각으로 이곳에 들어왔을 것 같은가. 방구석의 평화주의자였던 자신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어버렸는지는 몰라도,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에 뛰어드는 것은 이미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야! 내 말은…!”
“발목을 잡을까 봐 무섭다는 거잖아?”
서민하가 옆에서 끼어들자 정유현이 흠칫했다.
“우리 대신 미역 씨만 네 명 있었으면 이런 곳쯤이야 낙승이었을 텐데.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미역 씨가 죽을 뻔했다. 운 좋게 구해내긴 했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잃는 게 무섭다. 자기 때문에 미역 씨가 죽는 건 절대로 싫다.”
맞지? 서민하가 조용한 눈동자로 정유현을 바라보았다. 놀라운 건, 그 말에 정유현이 정말로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지수는 이해가 안 돼서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천하의 정유현이 겁을 먹고 있다는 건가?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이쪽이 죽는 게 걱정돼서? 이건 이상했다.
평소대로의 정유현이라면, 설령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신적인 압박감조차 좋은 의미의 긴장으로 바꾸어서, 언제나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남자. 그것이 집행부의 늑대였다. 지금의 정유현은 뭐라고 할까,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 흉왕 때문인가.’
구원받지 못한 서민하. 완전히 이지를 잃어버린 괴물이 된 흡혈귀. 그것은 정유현에게 있어 자신 때문에 일어나버린 비극의 결말이었다. 그런 것을 눈앞에서 봐버렸으니, 괜찮아졌다 말은 해도 아직 정신적인 충격은 다 가시지 않았겠지.
지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유현이 흔들리는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유현의 정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건, 방금 정말로 죽을 뻔한 지수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째서 이렇게 됐는가. 지수가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이유는 말하자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수 말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적어도 정유현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저 아이를 이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누구지.
정유현이 자신 안에 그런 물음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 때. 아그리올라의 둥지에서, 피투성이가 되어있던 정유현을 살려내기 위해 지수가 맺은 계약.
“사실은.”
그 결과 지수는 용왕이 되었다. 지금은 그 어깨에 세계의 존망을 짊어지고 있는 영웅이다.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박사를 강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방금 박사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정유현의 입술이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사실은, 박사 네가 아니어도 됐을 거다.”
고개를 푹 숙인 정유현이 조용히 말했다.
“너와는 다른, 좀 더 싸우길 좋아하는 인간이 있었을 거야.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이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녀석이. 그런데 어디서부터인가 뭔가가 어긋났다. 한가롭게 평범한 삶을 보내야 했을 터인 박사 너를, 누군가가 전장에 밀어 넣었어. 이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
정유현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날카로운 어조의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자신을 자책하는 말이었다. 그때 자신이 바보같이 자멸해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지수가 무리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용왕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짊어지고서 싸워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깊은 죄책감이었다. 지수가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아니에요.”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흑마녀였다. 찰랑거리는 흑발 사이에,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형형색색의 브릿지가 엿보였다.
“...베아트릭스.”
흑마녀의 말에 정유현이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게 대체 무엇인가. 영문을 모르겠는 건 서민하와 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금 흑마녀가 한 말에 대해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흑마녀는 곧바로 의문의 해답을 알려주었다.
“그게 제가 흑마녀로서 가진 진명이에요.”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녀의 진명. 그것은 용이 가지고 있는 이름과도 일맥상통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상대방의 언령과 마법적 계약의 열쇠를 틀어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크게 신뢰하는 친구가 아니면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자취방의 도어록 비밀번호 같은 것이었다.
“잠깐만요. 뭘 그렇게 간단히….”
지수가 한마디 하려고 하자 흑마녀가 제지했다.
“알려줄 수 있어요. 악용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으니까. 척척박사 님은 지금까지의 행적들로 그걸 증명했어요.”
눈을 감은 흑마녀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죠. 육영웅 같은 양지의 인간들과 음지의 마녀들은 말 그대로 앙숙지간. 원래대로라면 서로 싸우면 싸웠지 공동전선을 펼칠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정유현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얼굴로 흑마녀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지수가 용궁 길드를 창설하면서 온 세상의 S급 헌터들을 반강제로 싹 다 긁어모았으니. 이내 옆에서 듣고 있던 서민하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이 사람은 틀리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무슨."
“방금, 사실은 미역 씨가 아니어도 됐을 거라고 했잖아.”
흑마녀는 그 말에 반론한 것이다. 마녀들과 영웅들을 한자리에 모아, 양측에서의 지지를 얻어냈다. 용왕의 이름을 부여받고 여왕의 봉인 속에 들어가 용사의 의지를 계승했다. 세상의 모든 S급 헌터들을 이끌며 이곳까지 원정대를 끌고 왔다. 그 모든 일들은, 지수가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자신의 진명을 알려줘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뢰가 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사람이라고.
“미역 씨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어.”
그리고 그제야 지수는 정유현의 심정을 깨달았다.
용왕의 힘 따위, 떠맡기 싫은 것을 짊어져 버렸다. 왜 나여야 하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죽어가는 정유현을 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지수가 이런 생각을 감추고 있는 채, 책임감 같은 것 때문에 싸우고 있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이 죄처럼 여겨졌다.
설마 그 정도로 몰려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히 자신 또한 그런 식의 고뇌를 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마음의 정리가 끝난 문제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큼큼 헛기침을 한 지수는, 생각나는 소설의 한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바보는 행복하다. 세상이 이처럼 위험천만하다는 걸 모르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지만 나는 온 세상의 저주를 다 삼킬지라도 바보인 채 죽지는 않겠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놀고 있으면 편하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놈한테 내 운명을 맡기기보단, 괴로워하며 고생한다 해도 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겠다. 자신이 노력한 결과라면 실패해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런 뜻의 문장이었다.
그렇기에 지수는 자신의 힘에 감사했다. 남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싸울 수 있으니까. 지수가 뚜벅뚜벅 걸어가 액자 안에 그려진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정유현의 의견 한 번을 물어보지도 않고, 다음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지는 와중, 지수가 정유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과거로 백 번을 돌아가도 백 번 똑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제가 그러고 싶어서 마음대로 한 거니까. 왜 살렸냐고 멱살이라도 잡으면 몰라, 부담 가질 필요는 요만큼도 없다고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유현이 얼굴을 들었다. 박사는. 지수는 이전부터 이러했다. 자신이 얼마나 버둥대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너무나 간단하게 해결해버린다. 정유현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컨디션은 이미 완벽하게 돌아와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 정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도 마음대로 하지. 내가 너를 위해서 죽는다고 해서, 네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요만큼도 없어.”
“아니 그건 무슨….”
지수가 뭘 또 거기까지 나가냐는 듯 질려 했지만, 정유현은 상쾌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서민하와 흑마녀 또한 뭐라 말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여차하면 지수를 살리는 쪽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마음의 정리를 끝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방에 들어가 초상화를 쳐다보았을 때.
“그런가.”
여기서 나오는 거군. 정유현이 감탄했다.
먼저 생각한 것은 과거였다. 집행부 안에서 협회장을 견제하던 때의 일. 어중간했다. 자신은 너무나 어중간했다. 눈치채고 있었다면 협회장이 무언가를 꾸미기 전에 쳐부숴야 했다. 경계하고 있었다면 협회장이 그 무슨 일을 벌인다고 해도 정면에서 박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정유현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신중해야 한다며 숨만 죽이고 있다가 결국 상관도 없는 남의 힘을 빌려서 사건을 해결한 한심이일 뿐이었다. 분명히 협회장은 자신을 두고 생애의 적수라고 표현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확실하게 결착을 짓지 못했다. 제대로 끝맺지 못 했다. 그런 실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협회장의 초상화였다.
물감의 늪 속에서 형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자의 등 뒤에서 함께 떠오른 건 두 마리의 거대한 괴물이었다.
정유현에게 방해받지 않고, 지수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그대로 실험과 계획을 착착 진행해, 최강의 키메라와 완전한 용왕마저 손에 넣은 조련사. 어중간함도 무엇도 없다. 최악. 가능한 모든 흉행을 끝내고 완성된 협회장이 그곳에 있었다.
동료들이 달려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수는 포효하는 흑룡 앞으로, 흑마녀와 서민하는 거대한 키메라 앞으로. 그리고 정유현은 천천히, 자신의 적수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우울하다고 삽질하는 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진심으로 반성했다. 아무리 자신이 한심해서 죽을 것 같다고 해도, 한창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와중 차질을 일으켜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걱정은 없다. 자신의 속에 휘몰아치고 있던 방황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도 전부.
“너를 쳐부수는 걸로…끝맺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
정유현의 몸 주변에 연보라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