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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142화 (142/176)

142화.  <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5) >

일 대 일의 결투였던 첫 번째 방과는 달리, 인형사의 그림이 구현된 두 번째 방은 완전히 난장판인 전쟁터였다.

전황은 간단했다. 장기를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쪽은 인형을 제어하고 있는 인형사, 이쪽은 포탑을 만들고 있는 흑마녀. 진영을 뚫고 들어가 왕을 먼저 잡는 쪽의 승리다. 문제는 장기말의 숫자가 차이나도 너무 차이 난다는 것이다.

‘버티는 게 한계. 이쪽에서 치고 나가는 건 넌센스야.’

지수가 달려들고 있는 인형의 군세를 살펴보았다. 단순히 대전쟁 시절 각성자들의 인형이라면, 지수 혼자서라도 무리해서 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하나가 꽤 만만치 않은 수준의 전투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강화되어 있다.

애초에 지수가 해주의 비술로 인형술을 해제할 수 없다는 것만 봐도 변화는 명백했다. 첫 번째 방에서 구현된 적. 여러 가지 최악의 가능성들이 겹쳐 구현된 흉왕은, 성장한 지금의 서민하조차 힘으로 압도하는 수준의 괴물이었다.

그렇다면 구현된 인형사 또한 그만큼의 괴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아니, 두 번째 방이니 오히려 그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비장의 수단 하나나 둘쯤은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가장 바쁘게 싸우고 있는 것은 서민하였다. 서민하는 혼자서 대전쟁이라는 시대의 진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창칼들과 함께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분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혼자서 백이 넘는 인형들의 발을 묶는 건 불가능한 일. 빈틈은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빈틈을 메우고 있는 게 정유현이었다.

“쥐포나 돼라.”

서민하가 놓쳐버린 인형들이 앞으로 달려오자, 정유현의 손바닥에서 연보라색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무형의 역장이 내리꽂히며 인형들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제압한다기보단 딱 움직임을 방해하는 수준에 그치는 위력이었다.

결코 정유현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절약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정유현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의 능력을 사용하며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 정유현이 뒤에 서있기에 서민하는 안심하고서 마음껏 날뛸 수가 있었다.

언제든지 돌발적인 변수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계산하며 여력을 남겨두고 있다. 그 기반이 되는 것은 지수의 해석과는 다른 성질의 통찰력, 전장의 흐름과 분위기를 읽는 눈이었다. 타고난 냉철함. 경험으로 터득된 노련함. 그러한 무기.

서민하와 정유현의 조합은 상당히 절묘했다. 지수와 함께 싸울 때의 서민하가 보디가드라고 한다면, 지금의 서민하는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였다. 정유현은 무대 뒤편에서 세심히 뒷바라지를 해주는 매니저쯤 될 것이다. 아니면 엄마?

‘맡겨도 되겠어.’

벅차 보이긴 해도 단둘이서 저만한 숫자를 상대로 어떻게든 분전을 펼쳐내고 있다. 저 둘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쪽이다.

지수가 식은땀을 흘렸다. 저쪽이 인형들의 군세를 막고 있다면, 지수에게 배정된 적 또한 만만치 않았다. 김유성의 새파란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용사 김유성뿐만이 아니다. 다름 아닌 육영웅 전원이 지수 하나를 마크하고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의 위안이라고 한다면, 육영웅과는 싸워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여왕의 봉인 안에서의 일이었다. 특히 김유성과는 일대일 과외 수준으로 상대법을 지도받았다. 지금도 김유성과 싸운다면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김유성하고만 싸울 때의 이야기다.

"큭!"

미처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백묵의 거대한 철검이 바람을 찢어내며 날아왔다. 지수는 방금 장전된 용언마탄을 앞쪽으로 쏘아냈다. 콰앙! 두 기술이 충돌한 뒤 폭음과 폭풍이 잦아들자, 연기 속에서 검을 쥔 김유성이 튀어나왔다

인형은 개뿔이 김유성은 정말로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이쪽은 현상해석으로 상대가 무슨 수를 둘지 미리 알고 있지만, 김유성은 심안을 이용해 계속해서 최고의 패만을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김유성을 다른 육영웅이 커버해주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댁은 반칙이야!”

지수는 급하게 부재증명을 사용해 허상이 되었다. 휘둘러진 김유성의 검은 아무것도 베어내지 못하고 지수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지수가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 지수는 몸에 둥지의 영역을 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김유성의 검은 허상마저 베어내 지수의 목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절대중립을 못 배웠으면 백 퍼센트 죽었다.’

지수는 환상의 회랑에 들어오기 전, 네버랜드에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낸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육영웅 전부를 상대하는 상황에서 용사는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존재였다. 검 하나로 모든 공격을 베어내고 모든 방어를 잘라버리는데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

지수가 뒤쪽으로 날아가자 용사의 시선이 번뜩였다. 그리고 허공에서 무형의 강렬한 참격이 발현됐다. 용사의 심검.

이 기술 또한 말도 안 된다 따지고 싶기는 매한가지였다. 공격을 하겠다 마음먹은 순간과 공격이 작렬하는 것이 그야말로 동시였다. 준비 동작이나 시전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라도 엿본다면 모를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궤도고 방향이고 뭐고 읽어낼 수가 없는 기술이었다.

“근데 그걸 딱 엿봐버리고.”

웃은 지수가 자신을 향해 덮쳐온 심검을 정확히 막아냈다.

현상해석으로 미리 읽어낸다면, 대응할 수 없을 터인 심검의 속도에도 대응할 수 있었다. 지수는 정말로 자신의 능력의 범용성에 감사했다. 저 사기적인 용사의 기술들 중 하나라도 대응할 수 없는 게 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김유성한테 당하고 끝이다.’

이내 김유성과 다른 방향에서 흑기사의 기운이 덮쳐왔다. 이제 와서는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범위 안 모든 주문의 발동을 틀어막아버리는 흑기사의 적막이었다.

마법사인 지수에게는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 주문을 발동할 수 없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적막의 파훼법은 이미 찾아낸 지 오래였다. 지금의 지수는 눈을 감고도 풀어낼 수 있는 정도였다. 아주 잠깐, 운동화의 묶인 매듭을 푸는 정도의 수고만 들여도 해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잠깐이 치명적이었다. 여섯 명의 영웅들에게 총공격을 당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저 아까웠다. 게다가 전략적으로 지수를 방해하기 위해 이때다 할 순간에 계속해서 발동해대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잠깐. 계속해서 발동한다고?’

그리고 지수는 위화감을 느꼈다. 우진은 분명 적막을 한 번 발동할 때마다 상당한 마력을 소모해야 할 것이다. 적막은 발동하는 순간 주변의 모든 마법사들을 빙다리 핫바지로 만들 수 있는 필살기. 발동하자마자 해제되는 것에 개의치 않고서 몇 번이나 가볍게 쓸 수 있을 만한 기술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지수의 추측 같은 게 아니라, 이미 이전의 전투들로 검증이 끝난 사실이었다. 우진이 적막을 발동할수 있는 건 잘해봐야 세 번이나 네 번. 온 힘을 다 쏟아낸다고 해도 다섯 번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우진의 인형은.

‘기억나는 것만 해도 열 번이 넘어.’

이건 이상했다.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수는 곧바로 상황에 대한분석에 들어갔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단순히 인형들이 강화되어 우진의 역량 또한 올라간 것이다. 이것이라면 큰 문제가 안 된다.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그리고 두 번째 가능성은 흑기사가 무당이나 성녀로부터 무언가의 보조를 받아, 적막을 발동하는 데에 쓴 마력을 회복했다는 것. 이것 또한 문제가 없었다. 적막은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지수를 잠깐 방해하자고 그만한 마력을 펑펑 낭비해준다면 이쪽 입장에서는 환영해줄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낮지.’

지수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육영웅의 맹공을 피해내고 있는 지수는 바로 지금도 전장의 모든 변수와 상황들을 해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가 파악하는 한, 성녀나 무당으로부터 흑기사에게 전달된 힘의 흐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수가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가장 확률이 높은 가설이었다. 지금 인형사의 힘으로 인형이 되어있는 존재들은, 지니고 있는 마력이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 즉 마력이 무한이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지수가 웃기지 말라는 듯 입가를 비틀었다. 육영웅이 처음부터 사양 않고 특급 기술들을 퍼붓는 것에서, 단순히 마녀의 포탑이 완성되기 전에 싸움을 끝내려고 그러는 것이리라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형들은 애초에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차피 큰 기술을 써봤자 마력이 소모되지 않으니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필살기들만 쏴 재낄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저쪽에서 제풀에 지쳐줄 거라는 계산이 멋지게 틀어져버렸다. 지수가 뒤쪽의 흑마녀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직 멀었어요!”

“앞으로 2분이면 돼요!”

흑마녀의 손에서 수많은 색들의 마력이 엮여갔다. 적마녀의 증폭과 청마녀의 정련, 황마녀의 구축. 그리고 흑마녀가 가진 마도. 이동 포대 ‘발푸르기스의 밤’은 그 모든 마술의 총체라 할 수 있었다. 완성되면 인형의 군단들을 정면에서 박살 내며 치고 나갈 수가 있다. 하지만 2분, 2분이라니.

앞으로 십 초를 버티는 데에도 온갖 묘기를 다 부려야 할 판이다. 이 분이라고 하면 즉 백이십 초다. 십 초의 전쟁을 열두 번이나 연속으로 치러내야 할 시간. 공격을 피하는 데에 도가 튼 지수도 그것은 무리였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

“...쓸 수밖에 없나?”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그렇기에 환상의 회랑의 마지막 방에 도달할 때까지 가능한 한 온존해두고 싶었으나, 쓰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끼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비장의 수단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오른팔을 들었다.

“재버워키!”

지수가 소리치자 재버워키의 형태가 변화했다. 지수의 오른손에 휘감겨있던 정령무장은 해제되고, 재버워키는 어떤 형태도 아닌 활자의 괴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수가 품에서 꺼낸 물건은, 하나의 찢어진 동화책의 단면 같은 것이었다.

재버워키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네버랜드의 주인이었던 정령 앨리스. 그녀는 정령이면서도 계약자 없이 단독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법칙 자체를 고쳐 쓸 수 있는 네버랜드 안이기에 가능한 편법일 뿐. 그와 별개로 계약으로 묶여있는 주인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 계약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마왕.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정령 앨리스는 말하자면 마왕의 작품이었다. 그의 손으로 수많은 아티팩트와 술식들을 박아넣은 최종병기. 그 결과 앨리스는 정령 이상의 존재, 네버랜드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네버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법칙들 중의 하나.

<처음으로 동굴의 끝에 도달해 요정을 찾아낸 사람들에게는, 그 보상으로 요정이 소원을 하나씩 들어준다.>

요정과 만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은 동화책 속의 이야기다. 하지만 네버랜드는 애초에 동화 속 나라였다. 동화책 속의 이야기라는 말은 네버랜드에서는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네버랜드를 지킬 힘을 달라’는 소원을 빈 것으로, 이유라는 일시적으로 정령 앨리스와 융합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직후 지수가 직접 네버랜드를 무너뜨려버린 고로, 네버랜드의 요정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한 지수는 어떻게든 활용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을 앨리스에게 빌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수의 손에 들린 페이지였다.

단 한 번만 허락된 물거품 같은 환상. 지수의 손에서 찢어진 페이지가 빛이 되어 사그라들었다. 새까만 활자의 집합체였던 재버워키는 이내 다른 형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페이지 넘기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촤르륵,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변화는 곧장 일어났다. 지수를 향해 날아드는 철검을 무언가가 튕겨냈다. 그것은 장화를 신고 있는 고양이였다. 땅에 내려선 고양이가 지수를 지키는 듯이 감싸며 사브르를 흔들었다. 계란이 깔깔 웃어댔다. 이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쪽들이 전설의 영웅이라고 하면….”

땅에서는 바게트와 쿠키가 쑥쑥 솟아나고, 하늘에서 트럼프 카드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내 그들 모두가 팔다리를 뻗어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화의 숨결이 천천히 퍼져나간다. 오늘 하루 한정의 단막극이 개막하고 있었다. 지수가 육영웅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이쪽은 동화 속 괴물들이거든.”

살아있는 쿠키와 트럼프들이 달라붙는다. 어차피 일회용으로 흉내내 빌려온 힘. 재버워키의 재현이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 무너져버릴 것이다. 시간벌이 이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벌이만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2분, 반드시 버틴다.

만년필을 든 지수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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