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3) >
지수는 눈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명의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아니, 한쪽은 한 명이라고 해야 할지 한 마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흉포한 모습이었다. 등에서 뻗어있는 날개는 또 하나의 팔처럼 변형되어 주변을 마구 긁어대고 있었다. 자신조차 파괴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은, ‘흉왕’.
폭주하는 악마. 그건 괴물의 인자를 이식당한 실험체 같은 것이 아니라, 백 퍼센트 완벽한 괴물로 거듭난 서민하였다.
단순히 구할 때를 놓쳐 괴물로 폭주하게 되어버린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격리하러 온 집행부를 먹어치우고, 사천왕과 협회장을 먹어치우고. 시체로 산을 쌓을 만큼의 포식과 성장을 거듭하고 거듭한 결과 태어난 것이 바로 저것이었다.
‘만약의 이야기…라는 건가.’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라서 굳어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침착한 사고를 할 수 있을 만큼 냉정해졌다. 하지만 정유현은 아직까지도 마음의 정리를 끝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흉왕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정유현답지 않게 동요하는 중이었다.
‘죄책감인가?’
자신이 협회장을 충분히 견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몬스터를 이용한 실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결정적인 때를 위해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집행부의 늑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민하의 인생이 쓰레기통의 제일 밑바닥까지 처박힌 것은 그러한 이유다. 적어도 정유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현실에서는 지수가 끼어들어 어떻게 서민하를 구해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끔찍하게 일이 흘러갔을 것이다.
눈 돌리고 싶어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가능성. 흉왕이라는 존재는 그 사실을 정유현의 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괜찮아요?”
지수가 안색이 창백해진 정유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수 또한 괴물이 된 서민하에 대한 공격은 조금 꺼려졌지만, 정유현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정신적으로 구석에 몰려있었다. 어떻게 봐도 전투에 참여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괜찮… 아니. 박사 네 앞에서 거짓말해봤자 별수 없나.”
지수가 심상해석으로 정유현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읽어낸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정유현은 지금, 흉왕의 손에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절망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게 현실의 지수와 서민하에게 폐가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아서일 뿐이었다. 이것은 중증이었다.
“걱정 마. 나 혼자서 끝낼 테니까.”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앞에 선 서민하가 말했다. 흑마녀가 지수를 쳐다보았다. 저 말을 들어줘도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일 대 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서 느껴지는 마력만으로도 알 수 있다. 흉왕. 그림 속에서 나타난 괴물 서민하는, 웬만한 S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쯤은 한 손으로 찢어발길 만큼 강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혼자서 싸우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흑마녀가 걱정을 표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수 또한 여기서는 안전하게 다 같이 공격하자 지시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수는 서민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끼어들었다간 용서 안해.
그러한 결의가 엿보이는 표정. 몰아치는 강한 기백에 지수는 저도 몰래 움찔 발을 뒤쪽으로 끌었다. 지금 서민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하고 있었다. 멈추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수가 꾹 눈을 감았다.
“동료가 믿어달라니 믿고 맡기죠.”
이내 나른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판에 박힌 말이었지만, 이것 말고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흑마녀가 눈을 끔뻑였다. 척척박사, 이지수라는 인간은 조금 더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인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위험해 보이면 끼어들 거지만.’
지수가 팔짱을 끼고 서민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수 자신은 한발물러나 있는 게 정답일지도 몰랐다. 지수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안내인이 스템프로 찍어준 티켓이 각인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지수 혼자만 티켓을 구매한 덕분에 나타난 적은 흉왕 하나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티켓을 구매했다면 또 다른 적이 나타나고, 돌파하는 건 훨씬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지수의 티켓이 상처를 입었다간 그대로 전원이 자격을 잃어 회랑에 걸린 그림이 되어버린단 뜻이었다.
아무리 모든 공격을 읽을 수 있는 지수라고 해도, 동작이 따라잡을 수 없는 공격을 당할 가능성은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라도 허용했다간 치명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위인 서민하 혼자서 먼저 적을 상대하는 건 유효한 전략이었다.
어차피 다 변명일 뿐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의 정리를 끝낸 지수가 남은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늑대 씨는 그냥 눈 감고 저쪽 보고 계시고요. 저희는 일단 관찰에 전념한다는 걸로 하죠.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아마 환상의 회랑이라는 던전의 구조는 각 방에서 구현된 보스 몬스터들과의 연전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뒤에서 전투를 관찰하며 그림에서 구현된 존재들의 특징이나 약점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이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지수가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흉왕과 여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서민하 양쪽 모두, 막대한 마력의 분출력과 신체능력을 기반으로 싸우는 피지컬 몬스터. 지수와 정유현, 흑마녀 세 사람 몸을 쓰는 것보다는 능력을 주력으로 하는 각성자였기에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서민하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혈석의 반지로 꺼낸 피의 무구들은 그런 서민하를 뒤따르며 함께 날아갔다. 눈에 비치지도 않을 빠르기였지만, 흉왕의 반사신경 또한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등에 달려있는 또 다른 팔 형태의 날개가 날아오는 서민하를 쳐냈다.
‘역시 정면승부에서는 이쪽이 밀리나.’
흉왕이 팔을 휘두른 여파만으로도 거대한 풍압이 몰아쳤다. 회랑 자체에서 어떠한 보정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정당당히 맞붙어서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내 튕겨나온 서민하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서민하를 중심으로 피의 무구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난회전하기 시작한다.
“피폭풍.”
적잖이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온갖 형태를 하고 있는 창칼이 휘몰아쳤다. 피로 이루어진 무구들의 난무는, 멀리서 보면 새빨간 폭풍 같았다. 그 광경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저건 아무래도 안 좋은데.’
보자마자 기술의 분석을 끝낸 지수가 생각했다. 피폭풍이라는 것의 요점은 그것이었다. 주변 무기들의 제어를 아예 포기한 채, 최고속을 유지하며 막무가내로 폭주시키는 것. 그것에는 상대방을 향해 사출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 바로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춤추는 수십 개의 칼날들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팔다리를 찢어낼 만큼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저 안에서 싸웠다간 서민하도 상대도 피곤죽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리한 일이었다. 서민하에게는 뱀파이어의 회복력이 있으니까. 우직해도 자신의 강점을 잘 활용한 멋진 기술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안 좋았다.
‘저쪽은 회복력으로도 이쪽을 웃돌 거야.’
흉왕은 서민하보다 흡혈귀로서의 면모가 훨씬 짙은 괴물. 그런 상태에서 서로가 평등하게 찢겨나가는 기술을 발동했다간 저쪽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다. 만일 지수처럼 현상해석을 가지고 있어, 모든 무기들의 궤적이 한시에 읽힌다면야 모르겠지만. 이내 전황을 바라 보던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어?"
반사적으로 반응해 무기들을 튕겨내는 흉왕과 달리, 서민하는 창칼이 몰아치는 피폭풍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무기들에게 상처입지 않았다. 우연이라기엔 수십 개의 칼날들이 만들어낸 폭풍은 안에 있는 모든 걸 박살 내고 있었다.
‘설마 하나하나 조종하고 있는 건가?’
저런 속도로 휘몰아치고 있는 검들을?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병렬사고를 배운 지수조차 불가능했다. 대체 어떻게 이루어낸 묘기인지 알 수 없었다. 저거 참 대단하지 않냐는 듯 흑마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보이는 건가요? “안에서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아….”
그 말에 지수가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애초에 멀리 있는 마법사가 눈으로 좇을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S급조차 훌쩍 뛰어넘은 수준의 두 괴물의 격돌이다. 흑마녀의 입장에서는 서민하가 피폭풍을 발동한 순간, 몰아치고 있는 새빨간 잔상의 소용돌이만이 보일 뿐이었다. 피폭풍 안쪽의 움직임은 애초에 비치지도 않았다. 전투의 양상을 하나하나 눈으로 분석하고 있는 지수 쪽이 이상한 거였다.
그리고 턱을 매만지며 전장을 관찰하던 지수는, 서민하의 기술에 존재하는 트릭에 대해 조금씩 감을 잡기 시작했다.
‘저건, 나랑은 반대야.’
말 그대로 정반대였다. 저것은 날아오는 무기의 궤도를 읽고서 회피하고 있는 움직임이 아니다. 현상해석을 이용한 움직임에 익숙해진 지수이기에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서민하는 지금, ‘무기 쪽에서 자신을 비껴가게’ 만들고 있었다.
서민하가 각성자로서 가지고 있는, ‘결을 보는 능력’. 그것을 이용해 스스로 마력의 격류를 헤집어, 칼날의 궤도가 닿지 않는 절대 안전권을 시시각각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폭풍의 눈이다. 지수는 감탄했다. 이제 보니 저것은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이판사판 자폭 기술이 아니라, 피의 무구들을 활용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필살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흉왕에게는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괴물이어도 너무 괴물이야.’
서민하가 직접 공격을 꽂아 넣는 것이라면 몰라도, 휘몰아치는 피의 무구들쯤이야 곧장 반응해서 이형의 팔로 튕겨낸다. 눈에 비치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와 꽂히고 있는데도, 확실히 포착한 다음 움직여도 늦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 끔찍한 수준의 강함이었다. 지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정면에서 붙으면 위험하겠는데.’
지수의 현상해석은 모든 공격과 동작의 궤도를 곧바로 읽어낼 수 있다. 일단 한 번 전투에 들어가면 불의의 습격 따위는 절대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보를 활용해 대응하는 것은 오로지 지수의 몫이었다. 만일 지수가 미리 읽었는데도, 도저히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다가와 때린다면 .
순살(勝殺). 죽음을 상상한 지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실력이겠지만.’
지수가 서민하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피의 무구를 전개한 뒤, 자신만은 쏙 피해가는 무차별 칼날 폭격. 피폭풍은 말 그대로 사기를 친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일방적이고 두려운 기술이었지만, 저 정도로 타격을 받지 않는다면 괜히 더 힘을 쓰지 말고 기술을 해제하는 게 나은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서민하는 계속해서 피의 무구들을 몰아쳤다. 폭풍을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될 텐데. 완전한 손해다. 유지할 메리트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민하의 움직임에서 기묘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흉왕 쪽이 힘도 속도도 우위일 텐데, 단 한 번도 서민하에게 직격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서민하는 일방적으로 허를 찌르는 듯 흉왕을 공격한다.
완전한 모순이었다. 저런 난타전에서는 힘이 강하고 속도가 빠른 쪽이 주도권을 잡기 마련인데. 하지만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지수의 해석처럼. 허다인의 내림처럼. 서민하 또한 상대방의 공격을 미리 읽어낸 듯이 피해버리고 있었다.
서민하가 누각에 들어갔었다는 말은 들었다. 그때 허다인에게 기술을 배운 것인가? 지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허다인의 내림도 지수의 현상해석도, 그 기반이 되는 기술은 영역이다. 마력을 완전히 컨트롤한 뒤 자신의 주변에 조용히 고정시키는 것. 그것을 통해 주변의 존재들을 느낀다. 서민하에게 그것은 불가능했다. 숙련도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마력을 다루고 있는 방법 자체가 다른 것이다.
마법사가 물감을 붓에 묻혀 섬세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서민하처럼 마력을 터뜨려 신체를 강화하는 타입은 페인트통을 들이부어 연료로 쓰는 자동차나 마찬가지다. 서민하가 영역을 쓴다는 건, 이를테면 자동차가 석유로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는 수준의 김밥 옆구리 터지는 헛소리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 현실이다.
단순한 반응과 예상이 아니다. 지금 서민하는 명백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전조 단계에서 미리 읽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무슨 원리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지수는 이미 싸움의 양상보다도 그 원리를 규명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의문점은 두 가지. 어째서 서민하는 효과가 미미한 피폭풍을 해제하지 않고 있는가. 어째서 영역을 발동한 것과 같이 모든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인가. 천천히 정리하자 품고 있던 두 가지 의문은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떨어져 돌아갔다.
‘그렇구나.’
깨달은 지수가 자신의 입가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피의 연결. 그걸 이용해서….’
저 피의 무구들 하나하나와 공명하고 있는 흡혈귀의 감각이, 영역과 유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무구 하나하나는 약간의 범위밖에 커버하지 못하지만, 수십 자루의 검을 전방위에 휘몰아치게 하는 것으로 주변 전부를 감지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폭풍의 눈.
칼날 속에서 서민하가 내달렸다. 이런 억지스러운 방식으로까지 영역의 재현을 이루어낸 건 하나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 사람과 닮은 방식으로 싸우고 싶다. 그 사람과 어울리는 상대가 되고 싶다. 사실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고, 신경쓰이는 사람과 같은 디자인의 티셔츠를 사는 것 같은 은근한 심경의 발현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고집은 결국 형태가 되었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압도적인 기술로 승화했다.
붉은 폭풍. 서민하가 모든 것을 관조하는 피의 영역.
물론 그것은 지수의 현상해석처럼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궤적이 읽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을 뿐. 하지만 서민하처럼 괴물 수준의 반사신경과 속도를 지녔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춤추는 서민하가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진 동경심이야.”
그렇기에, 이 기술로 또 다른 자신을 뛰어넘는 것은 서민하에게 있어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이 마음이야 말로 최강이라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다.
“그아아아아아!”
분명 이쪽이 더 빠를 텐데, 이상하게 단 한 번도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지 못한다는 모순. 그것이 흉왕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괴물은 흉흉한 마력을 폭발시키며 포효했다. 팔의 형태를 한 날개가 배배 꼬이며, 흉왕의 오른팔과 일체화된다.
전력으로 휘두른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공격보다도 강렬한 찢어내기. 서민하는 공격을 피했지만, 너무나 강한 위력은 여파만으로도 서민하의 자세를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그리고 흉왕은 이번에야말로 필살의 일격을 내리친다.
아무리 서민하라도 공중에서 급격히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내리찍히는 흉왕의 손톱에 무방비로 직격당했다간 그걸로 끝장이었다. 완전히 외통수에 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서민하의 발이 그 끝을 스쳐 지나가던 피의 칼날을 밟았다.
"이거, 발판으로도 쓸 수 있거든."
공중에서 칼을 밟은 서민하의 몸이 튀어나간다. 끼이이익! 발이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서민하가 착지하고, 반드시 맞을 터였던 흉왕의 손톱은 또다시 허공만을 갈랐다. 그리고 만들어진 빈틈. 서민하가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완전히 몸의 밸런스를 잃은 흉왕의 가슴을, 서민하의 손톱이 꿰뚫었다.
환상의 회랑,
첫 번째 방의 승부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