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39화 (139/176)

139화.  <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2) >

환상의 회랑 안에 들어왔을 때 일행이 느낀 점은 한 가지였다.

“멋지네요.”

흑마녀가 모두의 감상을 대변해서 말했다. 환상의 회랑은 다른 던전들과 비교했을 때 좋은 의미로 이질적이었다. 커다란 건축물은 석재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끊임없이 구조와 형태를 바꾸어갔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들이 어떠한 기하학적 정합성을 띠고 있었다. 정말 대단히 머리를 쓴 설계였다.

보고 있으면 경건함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잠깐 동안 회랑의 아름다움에 취해있자, 새하얀 건물 안쪽에서 뚜벅뚜벅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나타난 것은 갈색 제복에 베레모를 쓰고 있는 여자였다. 일행은 몬스터일 가능성에 긴장하며 경계했지만, 지수는 여자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유령도 아니고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다가오는 제복의 여자는 존재감이나 기척뿐만이 아니라 아예 영혼 자체가 없었다. 사실상 실체를 가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확실히 지수와 일행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즉, 환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환상의 회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회랑의 안내를 맡고 있는 자입니다. 이후, 부디 기억해주시기를.”

지수 일행의 곁에 다가온 제복의 여자가 정중한 자세로 꾸벅 인사했다. 그녀에게 적대의 의사는 전혀 없어 보였다. 여자는 말 그대로 이곳의 안내인 비슷한 존재인 듯했다. 지수는 바로 그것에 이질감을 느꼈다. 던전에 안내인 같은 게 존재하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관람객은 전부 네 분이시군요. 그렇다면 회랑의 방은 네 개. 즉시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여자는 담담히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를 손가락으로 조작했다. 그러자 회랑의 톱니바퀴가 움직이며 쿠르릉대는 소리와 함께 건물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내 건물이 철커덕 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앞의 여자는 입장한 사람의 숫자를 파악한 뒤 던전 자체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역시 소수정예가 정답이었어.’

지수가 조용히 생각했다. 여자가 말한 ‘방’이라는 것이 넘어야 할 관문의 개수고, 그것이 입장한 사람의 숫자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수십 명의 원정대가 몰려왔을 경우 수십 개의 관문을 클리어해야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한 장치 하나로 던전 자체의 구조를 변화시키다니. 어쩌면 여자는 안내인 같은 것이 아니라 던전의 관리자일지도 몰랐다. 극단적인 경우 환상의 회랑의 보스일 가능성도 있었다. 정유현이 지수에게 냉정한 눈빛을 보내왔다.

‘한 번 공격해서 제압해볼까?’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시선이었다.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지수가 파악하는 한 눈앞의 여자는 애초에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딱히 그녀가 이쪽을 적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이내 지수 일행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말했다.

“티켓은 몇 장 구입하시겠습니까?”

지수를 포함한 모두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곳이 다른 던전들과 여러모로 다르다는 건 들어오자마자 눈치챘지만, 설마 입장할 때 티켓을 구입하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입고 있는 저지의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서민하가 말했다.

“티켓이라니… 그런 게 필요해?”

여자는 기계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회랑 안에 입장하시기 위해선 최소한 한 명의 손님께서 티켓을 소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같이 들어가는 사람의 숫자에는 제한이 있나?”

“네. 한 장의 티켓으로 동행 입장이 가능한것은 최대 다섯 명까지가 됩니다. 그 이상의 인원이 회랑에 입장하시기 위해서는 추가로 티켓을 구매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수의 질문에 안내인이 대답했다. 그리고 안내인은 다시 꾹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마치 기계처럼, 물어보기 전까지는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 화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생각나는 질문을 계속 말해, 정보를 알아낼 만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티켓을 사서 먼저 들어간 사람들과 합류할 수 있나?”

지수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물었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었다. 안내인은 지수 일행을 보고서 회랑의 구조를 바꾸었다. 네 명이 들어왔으니 방은 네 개. 그렇게 고정된 회랑에 다른 원정대원들이 뒤따라 들어올 수 있다면 편하게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내인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한 번 관람객이 회랑에 입장하면, 관람이 다 끝날 때까지 다른 관람객분들의 출입은 금지됩니다.”

“역시. 그러면 티켓의 가격은?”

“티켓을 구매하는 것 자체에 무언가를 지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각 방에서는 티켓을 가진 관람객의 숫자만큼 그림이 걸리게 됩니다. 관람객이 헤쳐온 시련을 그린 그림이.”

지수가 어렴풋이 갈피를 잡았다. 루드비히의 수기에서 읽었던 내용. 환상의 회랑에선 개인이 마주했던 적이 최악의 형태로 구현된다고 했다. 안내인의 말을 들으니 그 적이라는 것은 티켓을 가진 관람객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인 듯했다.

‘이 던전은 그림으로 쓰러뜨렸던 적을 재현하고, 티켓을 가지고 있는 게 한 사람이면 방마다 걸려있는 그림은 하나. 두 사람이면 두 개, 세 사람이면 세 개. 그런 구조인가.’

그렇다면 티켓을 구입하는 개수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았다. 지금 네 명이 들어왔으니 환상의 회랑의 방은 네 개. 티켓을 한 장 구입한다면 그림 네 개를 박살 내는 것으로 끝낼 수 있지만 한 장만 더 구입해도 쓰러뜨려야 할 적은 여덟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지수가 안내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티켓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좋은 점은?”

이것 또한 확인해야 했다. 그런 것이 없다면 무조건 티켓은 최소한으로, 다섯 명당 하나씩만 끊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리고 분위기상 그런 단순한 이야기로 끝내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안내인은 지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티켓은 구매하는 순간 개인에게 귀속되며, 개인이 기절하거나 전투불능이 되는 즉시 재가 되어 사라집니다. 티켓 자체가 공격을 당해 손상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티켓을 잃어버리시는, 순간 티켓을 가진 당사자와 동행분들은 전원 ‘관람객’의 자격 또한 잃어버리시게 됩니다.”

“자격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지?”

정유현의 질문에 안내인이 담담히 설명했다.

“티켓 없이 회랑 안에 입장하고 있는 분들은 ‘인간’에서 ‘상품’으로, ‘관람객’에서 ‘전시물’로 전락하시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액자 속의 그림이 되어버립니다. 부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티켓의 취급에는 각별히 유의해주시길.”

지수가 납득했다. 티켓을 한 사람만 들고 있으면 그 한 사람이 빈틈을 찔려 당할 경우 그걸로 끝. 나머지 전원은 그대로 영원히 그림이 되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두 장 세 장을 소지하고 있다면 티켓이 하나쯤 손상돼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난이도는 올라가지만 리스크는 낮아지는 건가.’

파티의 구성에 따라 고민해서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방어를 굳히고 천천히 싸우는 견실한 조합이라면 만약의 경우를 제거 하기 위해 두 장 이상의 티켓을 선택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던 지수가 일행에게 말했다.

“티켓은 제가 한 장살게요.”

그것이 최선이었다. 지수는 현상해석으로 만약의 변수를 거의 전부 제거할 수 있었다. 일단 실수나 불운 따위로 티켓이 손상되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다면 최소한인 티켓 한 장으로 도전하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할 것이다.

다른 이들도 불만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티켓 구매의 의사를 표명하자, 안내인이 스탬프 같은 것을 꺼내 지수의 손등에 찍었다. 그러자 ‘01’이라 쓰여있는 빛나는 숫자가 지수의 피부 위에 나타났다. 티켓이라길래 주머니 속에 숨길 수 있는 종이 형태일 줄 알았는데 이것은 예상외였다.

‘손등을 공격당하면 게임 오버인 건가.’

티켓을 지키는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이런 형태라면 의외로 티켓을 여러 장 구매하는 게 정상적인 공략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수는 공격을 피하는 데에 있어서는 도가 튼 인물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총알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피할 경로가 분명히 존재한다면 한 발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른 분들은 구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열쇠를 꺼낸 안내인이 걸어가 회랑의 문을 열었다.

안내인이 직접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도 그렇고, 티켓을 구입하느니 그림을 관람하느니 하는 것도 그렇고. 다른 던전들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일반적인 던전에 익숙한 오성화가 있었다면 붕 뜬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들어가자 돔 형태의 지붕을 한 커다란 공간에 액자 하나가 걸려있었다. 지수 키의 두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한 액자였다. 액자 안의 그림은 어떠한 인물의 초상화였다. 놀랍게도, 그려져 있는 건 지수 일행 전부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잖아.”

멍하니 눈을 끔뻑이고 있는 서민하가 말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서민하를 모델로 하고 있는 초상화였다.

그리고 이내 그림이 일그러지며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초상화를 이루고 있던 물감들이 다시 액화해 흐르는 눈물처럼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물감의 늪을 형성하더니, 그 안에서 한 존재가 튀어나왔다.

검은자위 속에서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빛났다.

화아악! 압도적인 마력이 폭풍처럼 거대한 공간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지수는 피부가 찌릿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이건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단순한 마력의 밀도만으로는 지수가 만난 존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준이었다.

"......."

정유현은 굳어서 움직이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몰아치는 해일 같은 막대한 마력에 압도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충격을 받은 것일 뿐이었다. 지금 물감의 늪 속에서 나타난 적은, 존재 자체만으로 정유현을 압박할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지수는 재버워키와 계약할 당시에 보았던 환상을 떠올렸다.

어차피 허황된 망상일 뿐인, 그렇기에 미련이 남는 만약의 이야기. 지수는 그 안에서 서민하를 구해냈다. 서민하는 협회장의 실험에 희생되지 않았고, 그 몸에 괴물의 인자가 섞여버리는 일도 없이, 평범하게 교복을 입고서 학교에 다녔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그것의 정확히 반대였다.

“정말로 최악인데.”

환상의 회랑은 쓰러뜨렸던 적을 최악의 형태로 재현한다. 지수는 지금 처음으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머리카락. 검게 물든 흰자위와 살의로 가득 찬 눈동자,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거대한 손톱. 지금 지수의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괴물은, 흡혈 충동에 몸을 맡기고서 폭주한 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서민하였다.

액자의 타이틀에는 단 두 글자만이 쓰여있었다 : <흉왕>.

만일 지수가 없었더라면,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최악으로 흘러갔더라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모습. 수많은 각성자와 사람들을 잡아먹은 흡혈귀의 말로. 그것은 눈앞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정유현의 죄책감을 압박하고 있었다.

적이 나타나자마자 무조건 능력을 날리고 보는 정유현이, 아직까지도 무방비하게 괴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수가 슬쩍 눈길을 돌렸다. 아주 살짝이지만 정유현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저 강철의 정신을 지니고 있는 남자가 지금 어느 정도로 동요하고 있는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폭주하는 괴물 서민하가 정유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속도였다. 막말로 평범한 S급 헌터들은 급습하는 것만으로 찢어발길 수 있는 수준의 신체능력이다. 그 탓에 정유현을 감싸야 할 반응이 살짝 늦어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야.’

지수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현상해석을 발동하고 있는데 반응이 늦을 리가 없었다. 지금 지수는 나타난 서민하에게 전력으로 주문을 꽂아 넣어 불태워버리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괴물의 붉은 손톱은 비슷한 형태의 손톱에 막혔다. 정유현의 앞쪽까지 단숨에 날아가, 폭주하는 흉왕 서민하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이쪽의 서민하였다. 서민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정유현과 지수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바보야? 왜 반격을 안 해. 이게 나인 것도 아닌데.”

손톱을 막아낸 서민하가 튕겨 나갔다. 순수한 완력에서는 아무래도 그림 속에서 나타난 괴물 서민하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지니고 있는 마력 또한 괴물 쪽이 강했다. 서민하와 서민하가 일 대 일로 싸운다면 지는 쪽은 십중팔구 이쪽의 서민하다. 그렇게 판단한 지수는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때 서민하가 팔을 들어 지수를 가로막았다.

“나서지 마. 나 혼자 싸울래.”

“무슨 헛소리야?”

“확실하게 하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으니까.”

미역 씨랑 만난 내 쪽이, 저런 괴물 따위보다 훨씬 강하다고 증명해주겠어. 서민하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호승심에 불이 붙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건, 피의 마왕 마르카브의 혈석의 반지. 마왕의 성을 공략한 뒤 지수가 선물해주었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새빨간 액체가 공중에서 형태를 이루어간다. 폴암과 창, 대검, 고문용 말뚝과 긴 송곳. 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붉은 무구들이 발현되었다. 서민하는 혈석의 반지를 완전히 지배해, 모든 무구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고 있었다.

“내가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거든.”

수많은 무기들을 또 다른 자신에게 겨눈 서민하가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