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38화 (138/176)

138화.  <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1) >

“…진짜로 전부 공략하신 거예요?”

지수는 질렸다는 얼굴로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정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에는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의 개요와 특이사항, 원정대원들의 부상 정도와 정유현이 느낀 점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쓰여있었다. 지수는 혀를 내둘렀다. 공략 스피드 자체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강행군을 이끄면서도 이런 보고서까지 완성시킨 정유현의 철저함이었다.

‘프로페셔널하다는 정도가 아니야.’

지수는 자신이 광신도들과 관련된 사안을 처리하려고 떠나 있는 동안에도 원정대가 그대로 공략을 진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정유현에게 결정권과 지휘를 맡겼다. 그리고 루드비히의 수기에 쓰여있는 S급 던전의 공략법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정유현이 보인 성과는 지수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정유현은 단단히 기강을 잡은 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인력을 굴리면서 강행군으로 S급 던전들을 돌파해나갔다. 부상을 입은 사람도 많았지만 재기불능의 중상을 입은 헌터는 한 명도 없었고, 그들을 대기조로 돌리면서 원래 대기하고 있었던 인원들과 함께 곧바로 다음 던전에 들어갔다.

생사의 경계인 아수라장에서 쉬지도 않고 일해야 했던 집행부의 노하우. 정확히 한계까지 무리를 시키는 것. 그것은 지수의 신중한 방식과는 다른 과격함이었다. 현장에 서는 순간 정신적인 피로 따위는 잊어버린다. 다른 일이 얼마나 쌓여있더라도 해야할 일은 제대로 해낸다. 그것이 정유현이었다.

‘처음부터 늑대 씨한테 맡기는 게 나을 뻔했는데.’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 정도의 성과를 보고받으니 무슨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사실, 마음 한켠에서는 자신이 없으면 원정대의 공략이 제대로 진전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단순히 최대 전력인 것 이전에도, 지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 자체가 다르니까.

하지만 오만이었다. 정유현도 오성화도, 현장의 경험이나 전투에 있어서의 노련함은 지수보다 훨씬 더 단련된 이들이었다. 읽고 있던 보고서를 툭툭 정리한 지수가 말했다.

“대단하네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척척 뭉쳐서 이끌고. 저는 솔직히 그런 쪽으로는 하나도 모르겠어서.”

사실이었다. 지수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지시를 내리는 데에 재주가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 게임을 한다면 철저하게 개인 플레이를 고집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 말에 정유현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

“우스운 일이군. 다른 누구도 아닌 박사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로 모르고서 말하고 있는 건가?”

정유현이 조용히 물을 마셨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원정대…용궁 기사단의 기형적인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기능할 리가 없는 집단이다.’

문제가 있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구성원이었다. S급이라는 것은 각각이 자신의 분야에서 모든 초일류의 헌터들을 찍어누른 최강자라는 의미. 당연히 하나하나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곧 죽어도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는 것은 싫다고 할 위인들이었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자신들을 통솔하는 것에 대해 누구 하나 불만을 표하지 않고 있었다.

그뿐인가. 오히려 원정대에 소속된 헌터들은 용궁의 길드 마스터인 지수에게 단단한 신뢰와 충성을 보내고 있었다. 단지 귀중한 장비를 무상으로 받아서라기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호인 집단은 동화책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S급 헌터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건 하나의 경의였다. 단순히 압도적인 힘과 능력에 대해 바치는 경외심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수의 행적에 대한 것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할까.’

저 어린 나이에 저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능력을 과시하는 일도 없이, 불철주야 S급 던전의 공략에 매달리고 있었다. 다른 헌터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발품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을 가진 자의 책임. 단지 자기 좋을대로 살고 있던 S급 헌터들은, 지수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 또한 나름대로 최강의 헌터 중 하나라 자부하고 있는 초인.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쯤은 도움이 되어야겠구나 하고. 그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만큼 지수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박사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원정대의 헌터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그걸 명심하도록 해.”

정유현이 말했다. 사실 명심하고 뭐고, 지금까지대로만 한다면 지수를 향한 불만이 새어나올 여지 자체가 없었다.

지수는 그 별명대로 정말 척척박사 같은 인간이었다. 지수가 알려준 대로 했더니 신기할 만큼 간단하게 던전의 공략에 성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용궁의 길드장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떼를 부린다면 그거야말로 어린애 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쪽에서는 무언가 수확이 있었나?”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또 한층 성장해, 다음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절대중립. 둥지를 두름으로써 만들어내는 불가침의 영역. 하지만 사실 평범한 상대와 싸울 때는 필요가 없는 기술이기도 했다. 절대중립은 법칙을 비트는 수준의 적을 상대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기술이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익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지.’

지수가 다 읽은 보고서를 정유현에게 건네주었다.

S급 던전을 공략하는 이 원정도 드디어 종반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도전해야 할 던전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루드비히의 수기에 공략법이 명시되어있지 않은 던전. 즉, 직접 싸우면서 승산을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히의 수기에 따르면, 최후의 시련이 될 세 던전.

그렇기에 지금 원정대는 던전행을 멈추고 정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귀중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공략법을 이미 숙지하고 있는 던전이라면 몰라도, 미지의 던전이라면 지수의 해석 능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단순한 전력 면에서도 최강의 각성자인 지수를 빼고 들어가는 건 이야기가 안 됐다.

깍지를 낀 정유현은 다음 던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환상의 회랑.”

손님에 따라서 그 모습을 바꾸는, 온갖 기괴한 그림들이 걸려있는 회랑. 던전의 각 방을 지나갈 때마다, 여태껏 쓰러뜨려온 적수들이 최악의 형태로 그려져 구현된다고 했다. 공략하는 데에 필요한 역량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렇게 말해봤자 무슨 소리인지 감이 안 오는데.’

결국 안에 들어가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히의 정보 덕은 이미 톡톡히 보았다. 더 이상 날로 먹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리스크의 상한을 가늠할 수 없다. 지수가 조용히 앞머리를 매만졌다. 이쪽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챈 것인지, 정유현이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 녀석들도 강해졌다. 짐이 되지는 않아.”

정유현이 말한 ‘녀석들’은 원정대의 헌터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공략을 계속한 그들은 예전보다 더욱 강해져있었다. 분명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점점 더 짙어지고 있는 여왕의 침식, S급 던전에서 얻은 장비와 스크롤들. 강한 몬스터와 싸우며 깨달은 능력에 대한 갈피와 제어법.

아무튼 S급 헌터들은 이전처럼 조무래기 몬스터들의 발이나 묶는 용도의 잉여전력이 아니었다. 실제로 정유현은 지수 없이 그들만으로 후반부 S급 던전들의 공략을 성공해냈다. 이를 테면 아그리올라를 쓰러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정도면 충분히 유의미한 전력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아뇨.”

하지만 지수는 정유현에게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들어가는 건 세 명. 많아도 네 명까지예요.”

환상의 회랑이 가진 특성은 소수정예의 구성을 강요했다. 지금까지 마주했던 적들이 최악의 형태로 재현된다. 그렇다면 던전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위험요소는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지수를 포함해 백업을 봐줄 두 명. 많더라도 세 명까지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한계였다.

지수를 제외하고 함께 들어갈 두 사람은 이미 정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아마도 이번 환상의 회랑 공략의 조커가 될 존재. 과연 그녀들이 설득에 응해줄지가 관건이었다.

지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약속장소에 가보면 불러낸 사람들 전원이 와있었다. 적마녀와 청마녀, 황마녀. 거기에 흑마녀까지. 지수가 알고 있는 모든 마녀가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 전원 집결이었다. 적마녀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말했다.

“뭘 다 이렇게 불러놓았어? 우리 용왕님이 또 무슨 대단한 말씀을 하시려고.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못할 얘기야?”

지수는 담담하게 본론부터 꺼냈다.

“너희들. 성흔을 전부 흑마녀한테 몰아줘.”

그 말에 마녀들이 흠칫 놀라 지수를 쳐다보았다. 방금 한 말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성흔을 전부 흑마녀에게 몰아주어라. 그것은 마녀들의 비밀, 흑마녀가 가진 특수능력에 대해 파악하지 않고 있는 이상 결코 나올 수가 없는 말이었다.

“너, 누구한테 얘기를 들은 거야…!”

흑마녀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은, 모든 걸 포용하는 흑색. 다른 색깔을 지닌 마녀의 성흔을 흑마녀가 집어삼켜 흡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녀도 아닌 외부인이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고 지수는 냉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어디서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 던전의 공략이 현저하게 어려워질 거란 사실이지. 솔직히 너희들 하나하나는 그리 대단한 전력이 못 돼. 네 명이서 다같이 덤벼도 나 하나를 못 이길 테니까.”

마녀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들은 최악의 각성자이자 날아다니는 재앙이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더욱 분한 것은 지수가 말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만큼 지수는 괴물이었다. 평범한 S급 헌터들과는 아예 일선을 달리한 곳에 위치해있었다.

‘그런 용왕조차 공략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흑마녀에게 다른 마녀들의 힘을 몰아줘서 최강의 마녀로 거듭나게 하라는 것은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합리만을 따졌을 때의 이야기였다. 눈앞의 용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할까.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거야? 그건 한 번 하면 끝이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어! 우리 보고 그냥 모든 걸 포기하라고?”

한 번 흑마녀의 ‘검정’과 섞이면, 흑마녀가 죽고 마녀의 이름이 다음 대에 계승될 때까지 성흔을 분리할 수 없다. 적마녀, 청마녀, 황마녀 세 사람에게 무능력자가 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런 걸 강요하는 건 무례한 것을 넘어서 모욕적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하지만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성흔은 다시 분리할 수 있어. 조건만 갖춰지면 확실하게. 용왕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모든 일이 끝나면 능력을 원래대로 되돌려주겠어. 그러니까, 전부 흑마녀에게 넘겨.”

확신으로 가득찬 지수의 말에 마녀들이 눈썹을 찌푸렸다.

***

S급 던전, 환상의 회랑의 게이트 앞.

소수정예로 돌입할 멤버의 구성이 확정됐다. 그것을 듣고서 길길이 날뛴 것은, 기대하는 얼굴로 지수의 말을 듣고 있던 오성화였다. 벌떡 일어난 오성화가 정유현을 삿대질했다.

“이상하잖아! 왜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인 건데!”

“받고 있는 신뢰의 차이겠지.”

정유현이 답지 않게 피식 웃었다. 명백한 도발의 기색이었다. 선글라스를 쓴 오성화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웃기지 마! 지수야, 정말로 그런 거야? 다시 생각해봐. 쥐포장수 같은 놈보다야 내가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새로운 필살기도 개발해냈단 말이야! 보여줄까? 인정하지 못한다는 듯 몸을 배배 꼬는 오성화를 보며,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의 구성이었다. 지수를 보호하는 전위인 서민하. 전방위를 커버할 수 있는 보조인 정유현.

“그때랑 똑같네.”

서민하가 말했다. 지수와 정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리올라의 둥지 안에서 협회장과의 결전에 나설 때. 그때도 지금과 똑같이 지수와 서민하, 정유현 세 사람이서 싸웠다. 생각해보면 얼마 되지 않은 일일 텐데도 상당히 예전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하긴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갑자기 용왕이 되었다가, 대전쟁 한복판에 빠져버렸다가, 인류를 구한 용사와 만나 여왕의 본체를 엿보기도 했다. 기억이 아래로 묻히는 것도 당연했다. 서민하와 정유현이 꾹꾹 관절을 풀어주며 게이트 안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흠. 컨디션은 어떻지?”

“만전이예요.”

팔짱을 낀 백묵의 질문에 지수가 대답했다. 옆에서는 허다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첫 시도는 탐색전이라 생각하고 위험하면 빠져나와야 돼.”

“네. 무리 같은 거 안 해요.”

애초에 지수는 겁쟁이였다.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중하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수가 휙 고개를 돌렸다. 깜빡하고 말하지 않을 뻔했다. 마지막 네 번째 멤버를.

“아, 그리고 한 명 더 있어요. 같이 던전에 들어갈 사람.”

“역시 우리 지수. 마지막에 이렇게 반전 줄줄 알았다니까!”

오성하가 콧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럴 줄 알고 이미 전투 준비를 다 해놓은 듯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지막 한 명은 오성화가 아니었다. 저쪽에서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올렸다. 천천히 게이트까지 걸어온 것은 흑마녀였다.

하지만 이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새까만 머리카락에는 빨간색과 노란색, 파란색의 브릿지가 한줄씩 들어가있었다. 그것 말고도, 느껴지는 마력의 격 자체가 한 단계 틀렸다. 그녀 주변에는 새빨간 기운을 머금은 작은 포탑들이 날아다녔다.

“마녀인가. 아군이라면 든든하지.”

"영광이네요. 일곱 번째 영웅께 그런 말을 듣다니.”

"흠. 원래는 박사가 받아야 할 칭호였다.”

정유현과 흑마녀가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이제부터 팀메이트끼리 잘 부탁한다는 의사표시였다. 지수는 다시금 상태를 살폈다. 준비 할 수 있는 건 전부 준비했다. 상황은 만전이다.

“그러면 가죠.”

네 사람은 환상의 회랑에 걸음을 내딛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