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10) >
이유라를 향해 손을 내민 서민하가 말했다.
“돌아가자.”
서민하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일부러 그렇게 꾸며낸 목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라도 만난 어조였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야기는 지수에게 전부 들었다. 하지만 서민하로서는 뭐 그게 어쨌냐는 심정이었다. 세상이 거지 같아서 죽고 싶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누구나 우울하면 그런 생각도 해보고 그러는 것 아닌가. 그런 것 가지고 하나하나 호들갑을 떠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니 존중해야 한다는 지수와도, 섣불리 손대도 될 영역이 아니라 판단해 발을 뺀 서중철과도, 어이가 없다며 화를 내고 있는 전승민과도 달랐다.
뚜벅뚜벅 계단을 걸어온 서민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은 뒤, 이유라의 머리에 푹 눌러 씌워주었다. 새빨갛게 빛나는 서민하의 눈동자가 이유라의 내리깐 눈을 쳐다보았다.
“밥 사줄게. 같이 돌아갈 거지?”
"......."
이유라가 고개를 숙였다. 서민하는 착하다며 이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내 이유라는 무언가가 변화한 것을 느꼈다.
앨리스와 융합해 네버랜드의 총괄자 비슷한 존재가 된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네버랜드 안에서 사역하고 있는 영체들에게 걸어놓은 암시가 풀렸다. 모든 미련을 일절 버리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무의식에의 명령. 주민들의 정신에 박아둔 그 말뚝들이 일제히 빠져버렸다.
어째서? 이유라가 생각하자마자 안쪽에서 앨리스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그걸 바라고 있지 않으니까. 앨리스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정령이다. 이유라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곧장 그만두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말하려던 이유라는 입을 다물었다. 네버랜드에선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그 규칙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자 여기저기의 풍경이 보였다. 사람들은 다투고 있었다. 서로 시비를 걸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마을이기에 더더욱, 사람들 사이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 건 간단했다. 걸어두었던 자그마한 암시를 풀어버린 것만으로, 동화 속 나라는 간단히 현실에게 무너져내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영혼들이 앨리스의 품으로 돌아와 성불해갔다. 규칙을 깬 네버랜드의 주민들이었다. 동화 속 나라의 깨끗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속 좁고 화를 내고 남을 무서워하는 인간인 채로 죽어갔다. 이유라는 얼굴로 손을 덮었다.
“죄송해요.”
자리에 주저앉은 이유라가 등을 떨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영혼들이 하나하나 날아오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네버랜드 안에서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었을 이들이었다.
막아놓았던 수도꼭지가 한 번에 터져버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주민의 자격을 잃고 성불해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었다. 품종개량을 하지 않고서는 네버랜드라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나사가 하나 빠져버린 네버랜드가 망가져간다. 회수되고 있는 혼들을 보며 이유라는 자신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미 현실에선 죽은 영혼들인데도 그러했다.
이유라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라도 되돌리려고 한다면 되돌릴 수 있었다. 간단한 일이다. 남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건, 자신만을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유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가고 싶다는 자그마한 미련도. 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이기심도, 보기 싫은 질투와 어리광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서투름도.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승민이 상처투성이인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너라도 상당히 고전한 모양이군.”
그 말에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전한 정도가 아니라 서민하가 오지 않았으면 이미 유령이 되어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입은 상처들은 동화 속 존재들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술을 컨트롤하는 데에 실패해 입은 것이었다.
지수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둥지를 두르는 것. 이것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기술이었다. 지수는 어떠한 경지의 편린을 보았다. 갈피를 잡았다면 이제 발전시켜나갈 뿐이었다. 자리에 서서 쭉 기지개를 편 지수가 말했다.
“그러면 철거하죠. 앨리스라고 했나, 이곳은 네가 유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 네가 부술 수도 있겠지?”
지수의 말에 이유라의 안에서 앨리스가 빠져나왔다. 이유라의 모습과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앨리스가 말했다. 정령인 상태라도 지수는 앨리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못해. 네버랜드를 만든 건 내가 아니니까.>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은 담담했다. 이곳을 만든 것은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다. 그 양반이라면 정령인 앨리스가 마음대로 네버랜드의 중추를 건드리지 못하게, 이런저런 안전장치를 걸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핵만 꺼내주면 다음은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어.”
<핵?>
“이 공간을 이루는 중심이 되는 주줏돌.”
<응. 보석을 말하는 거구나.>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인지 무엇인지 몰라도, 이곳을 지탱하고 있는 핵을 보면 그 뒤는 지수가 해석 능력을 발동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였다.
<그것도 안 돼. 너희들보다 먼저 나를 찾아내 소원을 빈 사람이 있으니까.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네버랜드의 보석을 꼭꼭 숨기라고 했어. 그 사람의 소원이 우선이야. 보석을 꺼내고 싶으면, 먼저 그 사람의 허락을 맡아야 해.>
지수의 눈동자가 빛났다. 심상해석으로 보석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읽어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본인에게 다시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기 전엔 앨리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곳에 숨겨놓은 듯 했다. 이래서야 지수 일행이 백날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이내 지수는 앨리스를 향해서 부탁했다.
“그러면 우릴 동굴 바깥으로 데려다줘.”
요정의 동굴은 서민하가 통째로 박살내버리고 왔다고 했다. 마을까지 뚫고 나가려면 상당한 수고가 들 것이다. 요정에게 부탁해서 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좋았다.
<그 정도야 간단해!>
앨리스가 양팔을 벌리자 새하얀 빛이 터지고, 이내 눈을 뜨자 지수 일행과 앨리스는 동굴의 입구까지 날아와있었다.
마을 안에서는 소란이 일고 있었다. 술집에서는 사내들이 멱살을 잡고 싸웠고, 그러자마자 뿅 영혼이 되어 앨리스에게 날아왔다. 누구든 껍질을 벗기자 평범한 인간이었다. 지수 일행은 조용히 마을의 중앙에 있는 촌장의 집에 들어갔다.
예술가는 자리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그리고, 엘프 촌장은 차를 마시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 일행이 돌아왔는데도 예술가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아예 깨닫지도 못한 듯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그리고 촌장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유라의 옆에 서있는 앨리스를 발견하고, 촌장의 고요한 눈에 자그마한 놀라움이 내비쳤다. 그리고 촌장은 요정을 향해 옅은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촌장은 앨리스에게 인사했지만, 그 한 마디 뿐이고 더 이상 별다른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촌장은 대신에 이쪽을 쳐다보았다. 지수는 말 돌릴 것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네버랜드를 부수기 위해서는 반드시 촌장의 동의가 필요했다.
“보석 숨겨놓으라 한 거 당신 맞죠?”
“보석?”
“네버랜드의 핵 말이예요.”
그 말에 촌장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빌었었다. 이 네버랜드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도록,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 보석을 숨겨달라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보석만 있으면 네버랜드는 부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수가 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버랜드를 철거할 겁니다. 보석을 꺼내주세요.”
“너도 동의한 일인가?”
촌장이 바라본 것은 이유라였다. 누구보다 이 네버랜드의 이상에 공감한 그녀라면, 이곳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에 크게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이유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괴로워보였지만, 확실하게 표현한 동의의 의사였다.
이곳은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지만, 단지 아름다울 뿐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죽은 시체들이 인형극을 하고 있는 장소다. 손발이 아닌 정신 그 자체에 실이 걸려있다는 것만이 다른 점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싫다 해도 인형들 사이에서 스스로까지 인형이 된 채 살아갈 순 없었다.
이유라를 바라본 촌장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그러면 마음대로 해라.”
촌장의 동의를 받자, 앨리스의 손 위에서 빛나는 보석이 나타났다. 현실의 물건이 아닌 것 같은, 무지갯빛을 띠고 있는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동화의 심장, 네버랜드의 핵. 저것을 부수는 것으로 네버랜드는 철거된다. 지수가 앨리스에게 핵을 건네받고, 걸려있는 안전장치들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역시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보석에는 아그리올라의 결계보다도 복잡한 술식들이 몇 중으로 걸려있었다. 하지만 해석할 수 있는 이상 해제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지수가 손에 든 보석을 조작하기 시작하자, 네버랜드의 외곽이 무너져갔다. 하나하나 방화벽을 허물어버린다. 그리고 모든 안전장치를 해제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공간이 찢어지며 보랏빛 안광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역시 스나크 너인가.>
지수의 눈에 보인 것은 가면을 쓴 마왕, 루드비히의 모습이었다.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지수는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루드비히가 이 정도 장치도 해두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놀랍군. 설마 이렇게 빨리 네버랜드를 함락시키는 데에 성공할 줄이야. 앨리스를 독립시킨 게 화근이었나? 보아하니 초월자의 영역에도 성공적으로 입문한 것 같군. 축하한다.>
축하한다고 말하지만 이쪽을 노려보는 눈은 강렬했다.
하지만 지수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지금 루드비히는 움직일 수 없다. 그것에 대한 근거 또한 있었다. 애초에 루드비히가 움직일 수 있었다면 훨씬 전에 지수를 방해했을 것이다. 원정대의 결성부터 해서 지수의 모든 움직임들은, 처음부터 마왕이 묶여있는 걸 계산해두고서 행동한 것이었다.
루드비히가 서있는 뒤쪽에서는, 온갖 쇠사슬로 묶여있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여왕을 봉인하고 있는 술식이었다. 루드비히는 지금 저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못했다. 여왕을 억누르려 애쓰는 중이니까. 지수를 막으려고 루드비히가 직접 이곳에 왔다가는 곧바로 여왕이 풀려나버릴 것이다.
<...일주일.>
“뭐?”
뜬금없는 소리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일주일이다. 이제 와서 스나크 너를 설득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앞으로 일주일만이라도 좋아. 네버랜드를 그대로 내버려둬라. 영원의 보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그게 없으면 여왕을 다시 봉인하는 건 영영 불가능하게 된다.>
루드비히가 지수가 든 보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수가 손에 들려있는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루드비히가 네버랜드를 만든 것은 단순히 여왕의 신도가 될 인간들을 처리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 아래 숨겨진 또 다른 노림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로.
마왕이 조금쯤 절실한 목소리로 지수에게 호소했다.
<애초에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스나크 네가 싼 똥을 치워주고 있는 거다. 억지로라도 봉인을 수습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해버릴 테니까.>
“…당신한테 민폐를 끼쳐버렸다는 건가?”
<그래. 기브 앤 테이크다. 던전 공략만 해도 내가 남긴 기록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는 게 네 신조겠지? 그러니 조금만 더 네버랜드를 그대로 내버려둬라. 조금만 더 여왕의 신도들을 꾀어낼 때까지.>
루드비히의 말에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이 다 맞았다. 지금 루드비히는 혼자서 무너지려는 봉인을 떠안은 채 고생하고 있었고 지수 또한 루드비히의 수기를 이용해 던전을 공략해갔다. 그가 지수에게 부탁한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수는 천천히 보석을 움켜쥔 다음,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루드비히를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 마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수는 망설임 없이 네버랜드의 핵을 부숴버렸다.
모든 것이 붕괴되어가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모든 영체들은 제어를 잃고서 그대로 소멸했다. 예쁜 지붕의 여관도, 커다란 간판이 달려있던 술집도. 고목과 버섯을 이용해 만든 집들도 물거품이 되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되었다.
<바보같은. 스나크, 너는 지금 세상을…>
다음 말이 무엇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무너지는 네버랜드와 함께, 루드비히의 목소리마저 멀리 사라져갔다.
눈을 뜨자 앞에는 현실이 있었다.
빌라 단지에는 다 썩어 방치된 시체더미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살갗이 짓물러져 터져있는 건,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의 시체였다. 지금까지 네버랜드의 결계 때문에 발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있었던 것이다. 끔찍한 냄새와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그거 같다. 원효대사 해골물.”
서민하만이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그런 비유를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