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9) >
하나부터 열까지 괴상한 현상들 투성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모자를 쓴 남자가 피리를 불면, 살아있는 음표가 나타나더니 지수를 향해 달려들어 날아왔다. 어떤 원리의 공격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수는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체념한 지 오래였다. 이곳은 이미 현실의 법칙이 아니라 동화책 속의 법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음표들을 피하자 수십 자루의 은제 포크와 나이프들이 쇄도했다. 사각에서는 빈틈을 노린 장화 신은 고양이가 뛰어들고, 멀찍이선 애꾸눈 선장이 계속 대포를 쏴대었다. 트럼프 병사들은 다시 한 번 돌진하기 위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들을 상대하는 게 자신이어서 다행이었다.
지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지수가 아니었으면 순식간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화책 속 악당이란 양반들은 원래부터 주인공보다 더 강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치있는 주인공이나 조력자의 기지에 넘어가 호된 꼴을 당하게 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든, 묻혀있던 그물에 붙잡히든. 못된 악당은 통쾌하게 뒤통수를 맞아 패배하는 것이 도리였다.
동화책 속이라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곳을 지배하는 건 그런 룰이었다. 즉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는 순간 끝장이다. 그렇게 흘러가도록 되어있다. 지수가 억지로라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현상해석으로 거의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동화의 침식이 완전해지는 순간 억지를 부리며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더욱 더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겠지. 실제로 아까까지만 해도 화염의 룬을 쏘아보내면 적당히 쓰러져주던 브레드맨들이, 지금은 더 바삭바삭해졌다고 웃으면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답이 안 나와.’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이길 방법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수가 눈을 감았다. 그것은 김유성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법칙 그 자체를 주무르는 적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었다. 기본권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적어도 직접적인 간섭 아래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는 것이다. 일단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해석해서 공략을 하든 어쩌든 할 것이 아닌가.
이 네버랜드 안은 말하자면 세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다른 법으로 돌아가고 있는 왕국이었다. 그 왕국 안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이상, 법에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주변에 침범받지 않는 스스로의 영토를 선언하면 그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지수는 조금이나마 갈피를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요령 자체는 영역이랑 비슷할 거야.’
영역이라는 기술의 요점은 마력을 발산하지 않고 자신의 주변에 묶어두는 것. 그것과 같이, 용왕으로서 지수가 품은 둥지 그 자체를 전개하지 않고 몸 주변에 두른다. 말로 하면 쉽지만 영역과는 차원이 하나 다른 수준의 난이도였다.
그럼에도 시도해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용왕의 힘만으로는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동화의 군세들은 압도적이었다. 지수가 심호흡하며 둥지를 끌어냈다. 울렁거리는 왜곡의 역장이 지수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장은 곧바로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렸다. 불안정해도 너무 불안정했다. 멈추는 순간 곧바로 터져버린다. 역장의 폭발에 휩쓸린 지수의 팔에서 뚝뚝 피가 흘러나왔다.
‘역시 바로는 안 되나?’
뒤쪽으로 물러난 지수는 또다시 둥지를 두르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지수의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심장을 과부하시키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투 중에 시도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으나, 지수는 포기하지 않고 시도했다. 이 정도로 다른 법칙의 침식을 직접적으로 받는 환경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감을 잡으려면 지금뿐이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계속해서 생각해라.
눈을 감자, 어둠 속에서 섬광이 휘둘러졌다.
떠올린 것은 김유성의 검이 그리던 궤적이었다. 마왕 주변에서 넘실거리던 이형적인 기운과, 네버랜드에 들어와서 본 앨리스의 능력. 그리고, 봉인 속에서 아주 잠깐 엿보았던 여왕의 본체. 자신은 그 모든 것을 해석했을 터였다. 다시금 떠올려라. 자신과는 무엇이 달랐는지 찾아내는 거다.
‘방향성.’
그게 아니면 성향이나 의지. 욕구라고 해도 좋았다. 그들의 모든 능력에는 그것이 담겨있었다. 예를 들어 김유성의 참격에는, 뭐든지 전부 베어버릴 것이라는 확고한 각오가 있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동화의 침식은, 세상이 동화책 같았으면 좋겠다는 이유라의 강한 바람이 투영된 것이었다. 물론 그걸 가능케한 근원은 정령 앨리스가 가진 힘이지만.
하지만 지수의 둥지에는 그런 것이 담겨있지 않았다. 안쪽에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채워넣었을 뿐, 공간 자체의 성질은 아무 것도 없는 커다란 빈 공간일 뿐이었다. 현실에 자기 자신을 주장하며 존재를 고정시킬 만한 특이성이 없었다.
순수한 의지로써 자신의 능력을 변형시킨다. 바로 그것이 곤란한 점이었다. 지수는 별로 대단한 의지나 발전성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바람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었다.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남에게 참견당하지 않는 것.’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이런 시답잖은 것들 뿐이었다. 하나같이 삶에 걸고 있는 바람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한심하고 쑥스러웠다. 하지만 쑥스럽든 말든 상관없었다. 지금 해내지 못하면 낭패를 보는 것은 지수였다. 다시 울렁거리는 역장이 지수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능력에 자신의 의지를 섞는다.
‘참견받지 싫다는 강한 이미지.’
지수에게 삶에 건 단 하나의 숙원 따위는 없지만, 그것 만큼은 24시간 내내라도 마음속 깊이 떠올릴 수가 있었다. 비눗방울처럼 불안정하던 역장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끼이익,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각성자의 다음 경지. S급이 능력에의 적응을 끝내고 스스로 응용을 시작하는 단계라면, 지금 지수가 입문하려는 것은 완전히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단계였다. 지수가 조용히 눈을 떴다.
“절대중립.”
용왕의 둥지가 지수의 주변을 둘러쌌다.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겠지만 어떠한 참견도 받지 않겠다. 그것은 지수가 언제나 강하게 꿈꾸고 있던 삶의 모토였다. 그리고 동화 속 존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동화의 법칙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지수에게 달려오던 브레드맨과 쿠키들은 둥지에 닿는 순간 그대로 빵가루로 변해 흩날렸다.
악역과 선역에서 현실과 환상으로. 상성관계는 지금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지금 지수의 몸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대부분이 적에게 당한 것도 아닌 스스로의 기술로 입은 상처라는 게 코미디였다.
‘이건 뭐 늑대 씨도 아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운 것은 좋지만, 여길 정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현기증에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서중철 씨는 남아달라고 할걸. 그런 소소한 후회를 했다.
이대로 있으면 동화의 침식은 점점 심해질 테고, 이제 와서 도와줄 누군가가 찾아올 리도 없다. 사면초가라는 게 이런 것인가. 몸에서 둥지를 푸는 순간 끝장이었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지수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위에서 떨어진 새빨간 유성이 브레드맨을 통째로 깨부수었다. 깨져나간 쿠키의 파편이 날아가는 게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동화 속이라고 환상이 보이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었다. 네버랜드의 입구는 평범한 사람은 보고도 지나치게 된다고 했다. 찾아낼 수 있는 건 파장이 맞는 사람 뿐. 세상에 섞여들지 못하고, 친구 따위 없고, 언제나 사회에서 겉돌기만 하는 그런…거기까지 떠올린 지수는 생각을 그만두고 납득했다.
“우리 서민하 씨가 좀 그렇긴 해.”
확실히, 지금 돌아보고 있는 서민하는 그런 성격이었다.
“...되게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 표정인데.”
“너, 던전 공략은.”
“그런 거 벌써 다 끝났거든. 다들 전화도 안 받고 걱정돼서 가보라고 난리였어. 괜찮을 거라 해도 듣지도 않고. 제 몸 하나 간수 못하는 바보겠냐고. 근데 이제 보니까 바보 맞네.”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계약자와 연결된 감각이 도중에 끊겨, 기다리잔 말을 무시하고 뛰쳐나와 허겁지겁 날아온 것이 서민하였다. 요정의 동굴도 돌아가지 못하게 완전히 부숴버리고 온 채였다. 심상해석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웃어? 뭐 잘했어?”
“아니, 와줘서 고맙다고. 핀치였는데.”
지수가 항복 자세를 취했다. 계약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뱀파이어의 감각에 고마워해야 할까. 서민하가 아니었으면 시간에 맞추지 못 했을 것이다.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 지수가 한손으로 회복의 룬을 발동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동화의 군세고 뭐고 문제가 아니었다. 지수는 서민하에게 말했다.
“...평범하게 싸우면 질 거야. 저 녀석들 장난 아니거든.”
“그렇게 세? 하긴 미역 씨가 이 꼴이 됐으니.”
“근데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리고 양팔을 살짝 벌린 지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나를 업어.”
완벽한 전략이었다. 너무나 똑똑하고 명석하다. 그렇게 한다면 둥지가 두 사람 모두를 감쌀 수 있었다. 지수의 새로운 기술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이내 서민하는 멍청이를 보는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
“…그 녀석 혼자서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괜찮을 거야. 선생님은 대단하니까.”
전승민과 서중철은 숲을 지나 성 안에 돌입하고 있었다. 온갖 동화속 존재들이 화려하게 춤추던 바깥과는 달리, 성 안은 소름끼칠 만큼 고요하고 어두웠다. 중앙의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자, 갑자기 훅 하고 불꽃이 나타났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것은 타오르고 있는 커다란 성냥이었다.
불꽃 속에서 보인 것은 하나의 환상이었다.
어릴 적 길가에서 곰인형을 주웠다.
여자아이는 그때까지 인형 같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처음 가지게 된 곰인형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인형을 깨끗하게 빨아, 이름까지 붙인 뒤 항상 껴안고 다녔다. 혼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인형과 대화하는 일도 곧잘 있었다.
소녀가 또래 여자아이의 인형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돈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고아니까 손버릇이 나쁜 것은 당연하다. 다른 아이들의 여론을 모으는 데에 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자신은 길가에 버려진 걸 주운 거라고 항변하자, 그 아이는 인형 안쪽에 자기 이름이 쓰여있을 거라고 했다.
안쪽을 살펴보니 정말로 이름이 있었다. 소녀는 그걸 보고 어떻게 된 일이지 하며 놀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어린아이는 악의에 놀랄 만큼 민감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계획된 일이라는 걸 눈치챘다.
인형의 주인이라는 아이는 아이들 앞에서 뚝뚝 눈물을 흘렸다. 제일 좋아하는 인형인데, 부모님께 선물받은 건데 하며. 부럽다고 훔쳐가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모두가 소녀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소녀가 인형을 돌려준 뒤, 곰인형은 더럽다고 갈기갈기 찢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져있었다.
<이런 건 너무해.>
타오르던 성냥이 새까맣게 비틀려 사그라들었다.
"......."
서중철과 전승민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릴 적이라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얼굴이 쏙 빼닮았기에 알 수 있었다. 방금 그것은 이유라였다.
계단을 몇 걸음씩 오를 때마다 옆쪽의 난간에서 성냥이 켜졌다. 동화 속 마법의 성냥처럼, 불꽃이 타오르는 동안 이유라가 겪었던 행복한 일들이 스쳐지나가고, 결국 그 모든 기억들은 비극으로 끝나 성냥과 함께 새까맣게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서중철과 전승민이 계단의 끝에 올라서자,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밝은 빛으로 타오르는 불빛이 있었다.
<우진.>
이유라의 부모가 되어주겠다고 한 것은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했지만 상냥했고, 손재주가 좋아 곧잘 이유라에게 봉제인형을 만들어주었다. 사실 이유라는 한 번도 그 사람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쑥쓰러움 탓일까. 언제나 그저 우진, 하고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었다.
우진이 만들어준 인형을 꼭 껴안고 낚싯대를 든 우진 옆에 앉아있었다. 이유라는 그 조용한 시간이, 빤히 무뚝뚝한 우진의 옆얼굴을 쳐다보는 게 좋았다. 낚싯줄을 인형의 팔다리에 매어서 움직이는 놀이를 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서투른 탓에 대화도 별로 없고, 기대는 법도 알지 못하는 부녀였지만 서로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이라는 존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톱니바퀴가 된 감각. 이런 것이 가족이라는 거구나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같이 있으면 이 시궁창 같은 삶이 역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진이 죽었을 때 이유라는 망가져버렸다. 결국 가장 커다란 성냥도 새까맣게 비틀리며 타들어갔다.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삶이 원래 이런 거라고 체념하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겨우 손에 넣은 희망은 언제나 더 큰 절망의 준비과정일 뿐이었고, 무언가를 이루어낸다고 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막이 내려가는 것은 동화책 안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모든 것이 변할까 무서웠다.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넣으면 누가 그것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만나게 되면 또 다시 자신 곁을 떠나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손을 뻗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누군가가 손을 내뻗어줘도 잡을 용기가 없어, 계속해서 계속해서 늪에 가라앉아갔다.
그러니까 이유라는 네버랜드를 동경했다. 아무도 거짓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지 않는다. 아무도 변하지 않는다. 이 마을에서 살고 싶었다. 현실도피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분 나쁜 인간인 거 알아요.”
흠칫 서중철과 전승민이 고개를 들었다. 들린 목소리는 성냥의 환상에서 울린 메아리가 아니라 실제의 음성이었다. 계단의 끝에 있는 유리관. 잠자는 공주님은 이미 깨어있었다. 관 속에 채워져있는 것은 이미 새까맣게 타서 비틀려있는 수천 개의 성냥들이었다. 그것이 이유라의 삶이었다.
“웬만해서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겠죠. 배배 꼬여있는 인간 말종. 사회 부적응자. 이런 인간을 좋아해줄 사람 따위 없다는 것도, 제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라도, 있을 곳이 있으면 안 되는 건가요.”
그것이 사회에서 격리시키기 위함이든, 세뇌의 결과로 만들어진 평온이든, 스스로 목을 매달게 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너무 망가져버린 탓에 평범하게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이좋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이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네버랜드는 자신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겐 정말로 절실한 곳이었다. 누군가가 강제한 것이라도 좋았다. 인형극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도, 배신당하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그것 말고는 바랄 게 없었다.
"......."
서중철은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붕 떠버렸다. 성냥의 환상을 통해 이유라가 살아온 궤적을 엿보아버린 것이다. 그에게 이유라 앞에서 아무튼 앞으로는 좋은 일이 있을 테니 힘내서 살아가요, 하고 무책임한 말을 내뱉을 만한 철면피는 없었다. 하지만 전승민은 달랐다.
“요약하자면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못 찾겠다는 거군.”
“승민아.”
“그래서 이런 정신병자 행렬에도 부담 없이 참가를 할 수 있는 거고. 적어도 예쁘게 죽고 싶으니 방해 말라 이건가?”
난폭한 정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유라의 얼굴에 욱함이 드러났다. 서중철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는 듯 전승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승민은 개의치 않고,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화난 것처럼도 보였다. 입가를 이죽인 전승민이 말했다.
“바보 같긴. 멍청한 것에도 정도가 있어.”
“당신…!”
“됐고. 흠, 그래. 살아갈 이유라.”
이유라? 그 말에 옆에 선 서중철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승민아. 너 지금 이름 가지고 개그한 거니?”
“아니야!”
휙 돌아본 전승민이 웃는 서중철에게 짜증을 냈다. 이내 전승민이 포켓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무엇인가 보아하니 그것은 두꺼운 색지였다. 마법이 담긴 스크롤 같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종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낸 전승민은 손에 든 색지 위에 거칠 게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그리고 이유라에게 휙 종이를 건네었다. 받아든 이유라가 무엇인지 쳐다보자, 색지 위에는 전승민의 사인이 되어있었다. 이유라가 멍하니 전승민을 쳐다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 자체가 안 됐다. 이런 걸 갑자기 왜 주는 것인가.
그리고 전승민은 완전히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세계 최고의 마법사가 된다. 이건 반드시야.”
이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 어쩔 수가 없다는 듯, 전승민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유라는 물론 서중철 또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전승민은 손가락을 들어 이유라가 들고 있는 두꺼운 색지를 가리켰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이 내 이름 세 글자를 부르짖겠지. 대통령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전승민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그걸 세상 사람들한테 자랑할 날만 손꼽고 기다리며 살아가면 된다.”
전승민이 삿대질하자 이유라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 전에 죽어버리면 억울해서 성불도 못할걸. 살 이유를 못 찾겠다는 놈이 더 있으면 다 데리고 와. 절대 못 죽을 이유를 하나씩 만들어줄 테니. 이걸로 이제 문제 없겠지?”
전승민이 펜을 안주머니에 다시 쓱 집어넣었다. 서중철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중심적인 것도 이 정도가 되면 독보적인 경지였다. 이유라가 멍하니 전승민의 사인을 쳐다보았다. 나중에 이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을 버텨나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살아라. 정말로 서투른 설득이었다.
"......."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라는 그 서투름이,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유도 도리도 없다. 아무튼 죽지 마라. 우진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엇나간 딸을 다그치려는 평범한 아버지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유라가 고개를 숙였을 때.
"어? 진짜 있잖아.”
"어고 뭐고 이것 좀 놔봐. 놔보라니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 저편에서 달려오는 건, 어깨에 부둥거리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둘러메고 있는 여자였다. 이유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성 안은 어두웠지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색깔이었다.
“민하…?”
친구를 본 이유라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