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8) >
하얀 꽃밭에 맹렬한 기세가 몰아쳤다.
힘을 끌어낸 지수는 흉흉한 표정으로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곧바로 공격을 쏘아 보내지 않은 것은 대화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런 단계는 한참 지나있었다. 네버랜드는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걸 막으려고 눈앞의 정령이 뭔가를 시도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주문을 동시에 꽂아넣는다.
‘타이밍은 완벽하게 맞출 수 있어.’
지수가 손끝을 까닥였다. 지금 지수의 양쪽 눈동자는 각각 금색과 청색의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현상해석과 심상해석. 두 가지의 간파를 동시에 발휘하고 있는 지금, 어떤 눈속임도 지수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아주 작은 빈틈도 놓치지 않는다.
사실 평범한 상대라면 이런 견제를 할 필요도 없이 지수 쪽에서 먼저 주문을 폭격하는 것만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게 가능할 만큼 지수의 순간적인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확신하고 있었다. 선공의 기회를 넘겨주게 되는 한이 있어도, 눈앞의 정령에게 틈을 내보여선 안 된다. 잠깐이라도 앨리스의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멈추게 된다면 끔찍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고.
교착상태는 상당한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왜 공격하지 않지?’
지수가 룬으로 화한 수많은 주문들을 겨누고 있는데도, 앨리스는 이쪽을 향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들었다. 무언가 심리전을 걸고 있거나 숨겨진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상해석을 발동한 지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정말로 공격할 의지가 없었다. 지수가 입술을 이죽이며 말을 걸었다.
“안 싸울 거냐? 부술 거라고, 네버랜드.”
“하지 마.”
앨리스의 목소리는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었다. 웬만한 어른이라면 질겁하며 당연히 그래야지, 하고 끄덕여 줄 만큼 순수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기가 찬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설계하던 당시의 의도부터 실제로 돌아가는 꼴까지, 이곳은 완전히 미쳐있었다. 교묘하다는 점에서는 그 협회장의 실험보다도 더한 면이 있었다. 이곳 네버랜드는 아무리 평가해준다 한들 잘 만들어진 자동 살인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수가 앨리스를 겨누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러면 억지로 막아보든지. 맨날 하는 것처럼.”
“…나는 하지 말라는 설득밖에 못 해. 당신을 공격할 수 없도록 묶여있으니까. 왜 네버랜드를 부수겠다는 거야? 뭔가 부탁이 있으면 들어줄게. 그러니까 그만둬.”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묶여있다고? 아무래도 앨리스는 지수를 ‘공격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공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애초에 사람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칠 수 없는 정령이거나, 이쪽과 대판 싸우려면 네버랜드를 유지시키고 있는 힘까지 끌어다 써야 하거나…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지수에게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반격하지 못하는 상대를 공격하는 건 조금 주저가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곳을 내버려두면 점점 희생자가 늘어난다. 지금조차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겨우 멈춘 것이다. 지수의 눈이 앨리스가 가지고 있는 네버랜드의 핵을 정확히 포착했다. 저것을 부수면 전부 다 끝난다.
만년필을 쥐고 있는 손을 털자, 체셔 고양이의 정령무장이 깃들어 거대한 포신이 되었다. 정제된 용언은 마탄으로 화해 정령무장 안에 장전되었다. 지수가 앨리스를 겨누었다.
그리고, 그런 지수의 앞을 막아서는 인영이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수와 앨리스 사이를 가로막고서 서있는 것은 이유라였다. 전승민과 서중철 또한 놀란 표정으로 이유라를 바라보았다. 양팔을 벌린 채 앨리스를 감싸고 있는 자세는, 명백하게 지수를 방해하려는 의도였다.
“...왜 여길 부수겠다는 거죠?”
지수는 이유라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기는 한 건가? 네버랜드는 사람을 꼬드겨 자살하게 만든 뒤 관리하기 쉽게 반쯤 세뇌해버리고, 네버랜드는 결국엔 다른 세계로 간다느니 뭐니 하는 개소리로 사람들을 속여 영혼째로 처분해버리는 곳이었다.
애초부터 내버려두면 혹이 될 광신도들을 발아하기 전에 지속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만든 시설이었다. 이런 걸 내버려둬도 좋을 이유 따위 지수는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착해요…. 나쁜 뜻 같은 건 품고 있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한테도 친절하게 대해줘요.”
“그게 친절입니까?”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정신지배를 당한 결과일 뿐이었다. 지수가 망령왕의 무덤에서 얻은 언데드 로드의 다이어뎀. 앨리스의 머리띠는 그것과 같은 종류의 아티팩트였다. 영체를 지배하고 사역하는 것. 그 능력을 이용해서 네버랜드의 주민이 된 자들의 사고방식 그 자체에 모종의 제한을 걸어둔 거다.
처음에도 지수도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할 만큼 착한 사람들만 모여 있다고. 하지만 장막을 벗겨보니 그 정체는, 귀찮은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주민들을 억지로 친절한 성격으로 교정시킨 것이었다. 영혼의 본능에 각인된 레벨에서. 저절로 구역질이 나올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뭐라고요?”
“남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어요.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도 거절당하는….”
“그러니까 사이좋게 세뇌해주면 좋겠다고요?”
“이곳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지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이유라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말할 줄은 몰랐다. 어지간히도 감명을 받은 거겠지. 감정이 전해져왔다. 네버랜드에 매료된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 또한 마왕이 예상한 것이라면, 정말로 대단하다 박수라도 쳐줘야 할 것 같았다.
동의는 못 하겠지만 일견 흥미로운 견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수는 여기서 이유라와 논쟁하고 있을 생각 따위 하나도 없었다. 네버랜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박살내야만 했다. 이것은 결정사항이었다. 지수가 조용히 정령무장을 쳐들었다.
“당신은 병자예요.”
"......."
상대방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심장이나 폐가 아픈 것과 똑같이, 정신이 병들어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온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런 미친 짓을 옹호하며 의존하려 드는 건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쯤은 이유라 또한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수가 말했다.
“비키세요.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지수가 이유라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그런 문제 이전의 이야기였다. 지수가 가진 능력과 이유라의 인형술은 완전한 극상성의 관계에 위치해있었다. 해주의 비술 하나만으로도 인형사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이유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호텔에서의 싸움에서 똑똑히 느꼈을 테니까. 아직 풋내기 마법사였던 지수도 이유라를 상당히 몰아붙일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예 승부란 게 성립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내 이유라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품에는 루드비히의 동화책을 꼭 안고 있었다.
"요정님. 소원이예요."
"응?”
“만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당신이라면, 제 소원도 이루어주세요. 네버랜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알았어! 그게 당신의 바람이라면….”
이뤄줄게, 그 소원. 정령 앨리스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유라의 한쪽 손에 들려 있던 동화책이 빛났다. 피비비빗! 펼쳐진 동화책의 페이지 안에서 카드들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트럼프들이 바닥에 박혔다.
“이봐, 저거.”
눈썹을 찌푸린 전승민이 정색했다. 이내 카드는 거대화해 팔다리를 뻗고 무기를 들었다. 트럼프의 병사들이었다.
“나는 저 사람을 공격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앨리스가 눈을 내리깔자, 알겠다는 듯 이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것은 인형사의 몫이다. 팔을 흔든 이유라의 손끝에서 수많은 실들이 병사들에게 연결되었다. 동시에 이유라가 등에 메고 있던 관이 열리며 우진의 인형이 땅에 섰다. 트럼프의 병대와 그걸 이끄는 흑기사. 완전한 전투태세였다.
“정말이냐…?”
정말로 동료끼리 싸우려 하고 있었다. 서중철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지수는 다가오려는 두 사람을 조용히 제지했다. 전승민과 서중철의 도움 없이도, 지수는 단독으로 상처 없이 이유라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정이 들었다기엔 별다른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적이라고 뚝 나눠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생판 남인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이 이유라에게 다치는 것도, 두 사람이 이유라를 다치게 하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해주의 비술.”
영역을 펼친 지수가 파사의 마력을 쏘아 보냈다. 우선은 모든 인형과의 연결을 끊어버린다. 그 뒤 자신을 보호해줄 인형이 사라진 이유라를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지수는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인형술이 해제되지 않았다. 해주의 비술이 아예 통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마법이 아니라고?’
그리고 지수는 고개를 돌려 이유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느 새 자리에서 앨리스가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이유라의 몸에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복장이 하늘색의 에이프런 드레스로 변해있었다. 앨리스가 입고 있던 그것이었다. 저러한 현상을 지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고 뭐고, 지금 지수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과 똑같은 기술이었다.
그 몸에 정령을 받아들이는 것.
“허주의 술.”
허다인이 자랑하는 누각의 오의. 정령사의 최대 비기. 지수는 해석이라는 꼼수 덕분에 정령과의 교감치가 처음부터 최대치로 시작했지만, 그런 지수조차 요령을 잡는 데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던 기술이었다. 정신을 공허하게 비우는 것부터 해서 다른 존재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까지.
적어도 이 자리에서 한순간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라의 재능, 앨리스의 특이성. 어느 쪽의 힘이 작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매나 망량이 보았다간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뛸 상황이었다. 몽롱한 눈빛의 이유라가 손의 실을 당기자, 랜스를 들고 있는 트럼프 병사들이 일제히 돌격해왔다.
지금 이유라가 펼치고 있는 인형술은, 어느 쪽이냐고 하면 마법이 아니라 정령술에 가까웠다. 자신의 기술을 그릇으로 해서 앨리스의 힘을 발현시킨다. 모든 공격에 네버랜드의 특이한 기운이 서려있다. 해주의 비술로 해제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흑기사가 대검을 들어 이쪽을 가리켰다.
“뭐?”
그러자 순식간에 티타임에서나 쓸 법한 은제 포크와 나이프들이 나타나 이쪽으로 쇄도했다. 지수가 부재증명을 사용해 나이프들을 피했다. 날아가는 은제 식기들은 두꺼운 벽을 두부처럼 관통하며 날아갔다. 이상했다. 흑기사에게 이런 능력은 없었을 텐데. 인형 또한 앨리스의 힘으로 변화하고 있다.
아니, 변화하고 있는 것은 인형뿐만이 아니었다. 눈치챈 지수가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정말로, 웃음밖에 안 나왔다.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구만….”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중철과 전승민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풍경이 믿기지 않는 건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현실이 무너지고 있었다.
땅에서 살아있는 바게트와 진저쿠키가 솟아올랐다. 어딘가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자, 쥐들의 떼가 바닥을 한바탕 쓸고 지나갔다. 우하하하! 누군가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하늘 저편에는 낡아빠진 해적선 위에 후크 선장이 서 있었다. 뒤뚱뒤뚱 걸어가는 거위는 끊임없이 황금알을 낳고 있었다.
법칙이 뒤틀린다. 지금 앨리스와 융합한 이유라는 네버랜드의 지배자나 마찬가지였다. 현실에 온갖 동화책의 내용들이 떨어져 섞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동화 속 존재들은 이유라의 바람에 따라, 종이 무대 위에서 춤추는 인형이 된다.
<동화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이유라에게서 그러한 마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풍경들은 모두 그 소원의 연장선이었다. 앨리스는 이유라가 바라는 걸 성실하게 이루어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현실이 점점 동화에 먹혀간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로 위험해진다. 동화의 침식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져버리기 전에,
‘지금 여기서 제압해야 해.’
지수가 용왕의 힘을 전부 개방했다. 재버워키의 힘으로 정신을 가속시키는 동시에, 밴더스내치의 힘으로 해석 능력을 폭주시킨다. 눈동자의 안광이 불꽃처럼 치달았다. 현상해석의 폭주로 몇 번이고 미래를 엿봐, 확실하게 이유라를 제압할 수 있는 한수를 찾아낸다. 지수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리고 지수의 시야에 미래의 광경이 들어오려던 순간.
무언가가 치명적으로 틀어져가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검은 색 크레파스가 지수의 시야를 찍찍 칠하며 새까맣게 물들여갔다. 그리고 가려져버린 그 시야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동화책 종이를 찢어 오려 붙인 듯한 글씨가 나타났다.
[나 쁜 악당 은 천 벌을 받 고 말 았답 니다.]
[B a D E n D]
숨을 헉 내쉰 지수가 현실로 돌아왔다.
‘뭐야, 방금 건.’
현상해석으로 미래를 엿볼 수가 없었다. 이미 동화의 침식은 이쪽의 능력에까지 개입하고 있었다. ‘네버랜드를 무너뜨리려는 나쁜 악당은 절대 주인공을 이기지 못한다’. 동화책 안이라면 그것이 당연했다. 세계의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수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은 그런 법칙 그 자체였다.
<영원히 편안하게 잠들었으면 좋겠어.>
또다시 이유라의 마음속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서 잠이 든 이유라는, 땅에서 뻗어 나온 가시덩굴에 감싸여 유리관 안에 눕혀졌다. 이내 바닥에서 거대한 성이 솟아오르고, 이유라가 잠들어있는 유리관은 마법의 성 안쪽으로 날아갔다. 지수가 별 게 다 나온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가.”
쫓아가려 했지만 동화 속 존재들이 지수를 막아섰다.
돌격창을 들고 있는 트럼프 병사들. 칼을 겨누고 있는 장화신은 고양이. 우뚝 서있는 풍차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동화 속 존재들을 지휘하는 공주님의 흑기사. 나 원 참.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수야말로 지금 이 동화 속의 유일한 악당이었다.
지수는 조용히 김유성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은 그만둬라. 법칙을 해석해 빈틈을 찔러라. 어떻게 공략할지, 지수는 어느 정도 방향성을 잡은 상태였다.
‘아무튼 왕자님이 필요하겠지.’
지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전승민과 서중철이 전투 준비를 마친 채 지수를 엄호하기 위해 서 있었다. 간단한 소거법이다. 지수는 이미 악당으로 낙인이 찍혔으니 당연히 불가능하고, 서중철은 가족이 있는 몸이니 안 된다. 그러면 남은 건 한 명뿐이었다. 지수가 전승민을 보며 말했다.
“전승민 씨가 좀 힘내주셔야 돼요.”
“뭘 말하는 거냐.”
“저 성 안쪽에 들어가서, 공주님을 깨우고 동화를 끝내는 거예요. 혹시 하얀 말 같은 거 만들 수 없어요?”
공주님을 깨우러 가는 건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정해져있는 법인데. 전승민은 이 위험한 상황에 무슨 괴상망측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이었지만, 지수의 표정을 보고 지금 지수가 정말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준 듯 했다.
시간이 급했다. 아무리 용왕인 지수라고 해도, 자신이 악역으로 낙인찍힌 동화책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동화책이란 것은 그만큼 불합리한 것이었다.
얼굴을 굳힌 서중철과 전승민이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임 없이 성 쪽으로 달려갔다. 구현된 동화 속 존재들 또한 딱히 두 사람을 막지는 않았다. 그들이 적대시하고 있는 건 오직 지수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빵과 트럼프 병사들이 서서히 지수를 향해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불멸의 병사들이었다. 팔다리가 찢어져도 어느새 다시 붙고, 흔적도 없이 불태워도 다시 살아난다. 원리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동화책이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힘으로 대적할수 없는 존재. 재미있어. 이내 지수가 심장의 힘을 천천히이 끌어내기 시작했다.
“여왕을 상대할 예행연습이라고 하면 딱 좋아.”
시험해보고 싶은 기술이 있었거든. 마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지수가 입꼬리를 올렸다. 네버랜드의 영향인지, 적성을 찾아낸 것인지.
그것은 말 그대로 악역 같은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