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6) >
“웃기고 자빠졌군.”
농담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친 건 전승민이었다.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 애초에 이야기가 안 됐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그런 조건을 듣고서 알겠습니다 하고 끄덕이겠는가. 전승민이 따지고 들며 말했다.
“주민이 되려면 죽어야 하니까 너희들은 안 된다고? 그러면 네가 가리킨 둘은. 순순히 죽어주기라도 할 거란 뜻이냐?”
전승민은 한 번 대답해보시지 하고 의기양양한 얼굴이었지만, 지수는 자신의 표정이 굳어가는 걸 느꼈다. 지수는 이 안에서 유일하게 이유라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라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차를 마시고 있는 촌장은 전승민의 말에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쪽은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옅을 뿐이다.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만 있다면야 그 정도는 까짓거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 별난 인간이다만 없는 것도 아니지.”
일행이 돌아보자 예술가는 원래 그런 거 아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가치관이 정상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 한 표정이었다.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이 예술가 양반이 괴짜인 건 저번에 이미 겪어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유라였다. 촌장이 홀짝이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너는 죽어도 상관없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죽고 싶어 하는 중이군.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어. 잘 찾아왔다. 촌장으로서 환영하지, 네버랜드는 정확히 너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
촌장의 말에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김유성처럼 용사의 심안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슥 쳐다보고서 저런 심리를 읽어내는 것은 이해가 안됐다. 네버랜드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감안한다 해도 그랬다. 심지어 지수는 능력이 발동하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겉으로 보고 안다는 겁니까.”
“인간관찰이 내 특기다. 사람 관찰을 게을리하다가 여러모로 모진 꼴을 당해봐서 말이지. 의심병에 걸린 끝에 이런 재주까지 얻게 됐지. 눈을 마주치면 무슨 속셈인지 대충 보여.”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정관했다. 지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제 보니 촌장의 관심법은 마법적인 능력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기술인 듯 싶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유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고 싶어요.”
전승민과 서중철이 이유라를 돌아보았다. 동화책을 꼭 품에 안고 있는 이유라는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저도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유라의 말에 전승민은 무슨 괴상한 생물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중철 또한 크게 놀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쯤은. 조금쯤은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고 있어요? 죽는다잖아요. 여기 주민이 되려면 죽어야 한다잖아요. 그런 무의미한 추궁을 꺼내지는 않았다. 전부 충분히 생각한 뒤에 꺼내고 있는 말이라는 건 이유라가 지은 표정만 봐도 명백했다.
전승민이 고개를 휙 돌아보며 지수를 노려보았다.
“…이봐. 왜 안 말리는 거야.”
“뭘요?”
“아는 사이잖아! 저 여자가 지금 미친 소릴 지껄이고 있는데,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한 대 때려줘야 할 거 아냐!”
지당한 반응이었지만 지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무슨 권리로 참견을 해요.”
“그딴 게 문제야? 죽는다잖아!”
“바로 그게 문제예요. 죽는다는 걸 어떻게 막아요.”
지수의 대답에 전승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진지했다. 자신은 이유라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말리려 해도 죽으려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지수가 가진 원칙의 문제였다.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는 게 이유라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라면, 그건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다. 아는 사이라고 하기도 뭐한 지수가 어쭙잖게 끼어들어 막을 사안이 아니었다.
만일 이곳에 있는 게 이유라의 친구인 서민하였다면, 그러지 말라고 감정에 호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가 단지 ‘죽으려 하는 건 잘못된 것 같으니까’ 이유라를 말리려 드는 건 지독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여왕을 쓰러뜨려야 하니까.’
그것이 지수가 대고 있던 핑계였다. 다소 강압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협력을 얻어내더라도 그런 핑계를 대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지수가 실패한다면 전부 죽을 것이고, 그 사람도 자신이 죽는 걸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 인간에게 그런 논리는 무용지물이다. 지수는 이유라를 막을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너…!”
서중철이 헉 숨을 삼키고, 전승민은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듯이 지수를 노려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두 사람이 보이는 반응 쪽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런 것쯤은 지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행위는 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 지수는 꽉꽉 막힌 고집불통이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타협안 정도는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은, 사람들과 만나서 성장했기 때문일까. 이내 한숨을 쉰 지수가 이유라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개인의 선택에 참견하진 않아요. 그래도 져야 할 책임이 있는데 내팽개치고 도망치면 안 되겠죠. 여긴 엄연히 집행부 업무로 온 거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협조해주세요.”
네가 뭘 하든지 상관은 없는데, 일단 하던 일은 다 끝내고 가라. 이 정도가 지수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지였다. 지수의 시선을 받은 이유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나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전승민은 그제야 겨우 진정했다.
일행을 바라보고 있던 엘프 촌장은 삼류 촌극이라도 본 듯이 헹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보니 그쪽도 만만찮게 꼬여있는 인간이군.”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너, 축 늘어진 곱슬머리. 서투른 남자야. 어떻게 말려야 하긴 할 것 같은데 나는 못할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이 설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겠다. 그렇게 말하면 어디 덧나나? 예전에 너 같은 인간을 한 번 본 적이 있지.”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수는 그런 계산을 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을 골라…. 아니 그만두자. 촌장이란 양반이 자신에 대해 뭘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지수가 이유라에게 잠깐 동화책을 이쪽으로 넘겨달라 말했다. 이유라는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지만, 순순히 동화책을 넘겨 주었다. 네버랜드 건설기. 동화책의 표지를 촌장을 향해 보인 지수는 장정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동화책을 쓴 사람을 알고 있나요?”
지위가 촌장쯤 되는 자라면 어떤 형태로든 평범한 주민들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동화책을 바라본 엘프 촌장은 재밌는 질문이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지.”
“정말입니까?”
“애초에 그 동화책 주인공의 모델이 된 게 나니까.”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공의 모델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촌장은 아무래도 뭔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루드비히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차를 마시고 있는 촌장이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이상한 별명으로 사람을 부르는 게 취미였지. 나를 보면서 ‘교주’라고 불렀어. 나는 평생 교회랑은 연이 없는 무신론자였는데 말이야.”
그 말에 지수는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껴졌다. 광신도들, 여왕을 숭배하는 교단. 루드비히의 수기에 쓰여있던 사실. 즉 이 남자는 원래대로라면 그 교단의 교주가 되었을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왕이 개입한 것이고.
“뭐, 은인이라면 은인이지. 여기 네버랜드도 그 남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계해 만든 거나 마찬가지야.”
“마왕이 설계해서….”
“네버랜드를 만드는 내내, 전부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했지. 흠.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하군. 사람을 도와야 편해지는 체질이라도 되는 건가? 아무튼 인간관찰에 도가 튼 나도 속을 알 수가 없는 남자였다. 가면도 나한테 표정을 읽히지 않으려고 쓴 것일지 모르지.”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루드비히가 ‘자신이 편하자고 이러는 것’이라 말한 것은 그런 기특한 뜻이 아니라, 정말로 말 그대로의 의미였을 것이다. 너를 방치해두면 귀찮아지니 내가 편하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놓아야겠다. 그런 뜻의.
“아무튼 이곳은 세상에 있을 곳이 없어, 인생의 낭떠러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한 곳이다. 네버랜드란 이름이 싫으면 튜토리얼 마을이라고 불러도 좋아.”
“튜토리얼 마을.”
지수가 혼잣말하며 읊조렸다. 참 싸보인다. 정말 백묵이 지을 법한 네이밍 센스였다. 뭐라고 했더라, 이름은 딱 들었을 때 본질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짓는 편이 좋다였나? 고개를 끄덕인 촌장이 다 마신 찻잔을 옆으로 치웠다.
“이곳에서 능력을 키우고, 사람들과 살아가며 재활하다, 다른 세계로 떠나는 거다. 다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야 작은 마을이니까, 오래 있어봤자 딱히 할 것도 없지. 나야 촌장으로서 할 일이 있으니 눌러앉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참 훌륭한 의의를 지닌 곳이었지만, 반드시 추궁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바로 다른 세계로 떠나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그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서 사람을 이세계로 전송한다는 것인지. 지수가 질문했다.
“다른 세계로 보내준다는 건 어떻게….”
“내가 알겠냐. 그런 건 요정이 알아서 하는 거겠지.”
또 나왔다. 요정. 지수가 턱을 매만졌다. 분명 동화책 네버랜드 건설기의 내용에서도 요정이 등장했다. 주인공인 남자의 소원을 듣고 네버랜드를 만들어준 존재. 지수가 시선을 보내자 어깨를 으쓱인 촌장이 요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냥 관리를 맡고 있을 뿐, 요정은 네버랜드의 지배자다. 이곳의 모든 것은 요정을 근원으로 하고 있어. 주민들에게 허락된 신비한 능력들도, 네버랜드 안의 법칙들도 전부 요정의 힘으로 만든 거야.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고 하지만, 아무도 거기까지 다다라본 사람은 없지.”
일행들은 신기하다는 듯 입을 헤 벌리고 있었지만, 지수는 그렇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은 어느새 식은땀이 나와 축축해져 있었다. 그 요정이라는 건 엄청나게 위험한 놈이라는 확신 수준의 직감이 들었다.
촌장에게 요정의 능력을 들으면 들을수록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세상을 다른 법칙으로 덧씌우는 것도,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도. 어느 한 존재와 꼭 닮아있었다.
‘여왕.’
네버랜드를 유지하고 있는 요정이라는 것과 여왕은 상당히 닮아있었다. 이곳을 마왕이 설계한 것이라면, 루드비히는 설마 여왕과 유사한 존재라도 만들어낼 생각이었던 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하나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 요정이라는 존재의 정체를 지수의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요정이 있는 동굴이란 건.”
“동굴에 가볼 생각인가. 그야 로망이 있으니까 무리도 아니지. 하지만 너희는 외부인이니까 아무래도 힘들 거다.”
“뭐야.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는 건가?”
팔짱을 낀 전승민이 끼어들어 질문했다. 확실히 그렇다면 큰 낭패였다. 하지만 촌장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다만, 도저히 일주일 동안 조사할 수 있는 넓이가 아니야. 길은 미로처럼 얽혀있고 괴물들도 끊임없이 튀어나오지.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상천외한 미로가 돼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도 같은 곳을 빙빙 돌게 되기도 해.”
“끝인가요?”
“준비해야 할 물건들도 많아. 랜턴이랑 로프, 안에서 먹을 식량도 필요하겠지. 너희들은 상점창을 이용하지 못할 테니.”
촌장의 말에 지수는 미소지었다. 다행이었다. 그런 문제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벽이든 괴물이든 전부 다 박살내고서, 오늘 내로 동굴 끝까지 도달할 생각이었으니까. 지수가 동굴의 위치를 묻자, 촌장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숲 쪽으로 가면 동굴의 입구가 있지. 너희들은 각성자지? 네버랜드에서 각성자의 상태창은 무효화된다. 동굴 안은 위험하니까, 모험하고 싶으면 술집에서 호위라도 고용하도록 해.”
그 말에 전승민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상태창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런 것쯤은 이미 아무런 페널티도 되지 않았다.
스스로 가진 힘을 끌어올린다. 지수의 머리에서 용의 뿔이 돋아나고, 전승민의 주변에서 형형색색의 구체가 발현되었다. 갑옷을 입은 서중철의 몸에 새하얀 빛이 감돌고, 집행부의 코트를 걸친 이유라의 주변에서 흉흉한 기운이 내뿜어졌다. 촌장은 멍하니 입을 벌리며 지수 일행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희가 좀 규격외라서.”
그럼 요정이라는 녀석 얼굴 좀 보고 올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온 지수 일행이 동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