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5) >
루드비히 베리에야프 저, 네버랜드 건설기.
‘또 마왕이란 말이지.’
지수가 동화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생각했다. 솔직히 기대하지도 않았던 수확이었다. 이곳 네버랜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루드비히 베리야에프가 개입했다. 그러한 사실 자체가 다른 무엇보다도 귀중한 정보였다.
동화책의 주인공은 한 명의 남자였다. 그는 연인과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당하고, 온갖 누명이 씌워진 채 사람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구타당했다. 세상 어디에도 그가 당당히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방황하던 남자는 그를 불쌍히 여기어 나타난 요정과 만난다.
요정이 말하기를, 부디 당신의 소원을 말해주세요. 사람들한테서 당신의 누명을 벗겨드릴까요? 아니면 당신을 배신한 이들에게 끔찍한 벌을 내려줄까요?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 어느 쪽도 바라지 않는다고.
잃은 명예를 회복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사과받는 것도. 심지어는 복수하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딱히 그가 선량한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런 것들은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만큼, 남자는 세상 자체에 깊게 실망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있을 곳을 갖고 싶어.”
그렇다면 그 소원 이뤄드리지요. 요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정이 만들어준 것은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세상에게 거절당해,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의 있을 곳이 되어줄 장소. 누구도 사람을 배신하지 않고, 누구도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꿈 속의 네버랜드. 지수가 책장을 덮었다.
‘루드비히가 쓴 거 맞네.’
사실 지금 상황에서 품을 감상은 아니지만, 지수의 마음은 좋아하는 작가의 첫 동화책 작품을 본 충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여운을 즐기고 싶을 정도로.
얼핏 보기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난 상냥한 이야기 같지만, 기저에는 결국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못 되니 전부 다 엿이나 먹어라 하는 냉소주의적 세계관이 깔려있었다. 반쯤 배배 꼬여있는 감성이 과연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작품다웠다.
“넌 또 왜 실실 웃고 있냐. 그런 얼굴 처음 보는데.”
옆에 앉아있는 전승민의 말에 지수가 퍼득 허리를 세웠다.
“어, 네? 아뇨. 그냥 동화책이 재밌어서….”
“흥, 실없기는. 아무튼 이야기는 대충 알았다. 그 ‘상점’이라는 건 여기 주민이 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건가?”
“그래. 주민 특권이지. 아주 편리하다고.”
전승민은 아무래도 쉬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면 허공에 상점창을 구매해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수는 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상점인지 뭔지 하지만 각성자들 상태창이랑 별 차이도 없어 보였다.
‘신기하다면 신기하긴 한데 그것뿐이지.’
테이블 위를 보니 지수 말고 다른 두 사람은 이미 식사를 끝마친 듯했다. 집중하며 동화책을 읽던 동안 지수의 스튜는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지수는 재빨리 스튜를 떠먹기 시작했다. 손에 턱을 괸 전승민이 뚱뚱한 남자에게 말했다.
“아무튼 고맙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됐어. 방금 들어와서 헤매는 중이라 뭐가 뭔지 잘 몰라. 나중에도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 보고 싶은데. 혹시 연락처라도 줄 수 있나?”
그리고 전승민이 흠칫했다. 전화부에 추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냈지만, 생각해보니 이런 마을에 전화 같은 것이 있을리 없었다. 이내 남자가 말했다.
“아…미안한데 친구 추가는 주민끼리만 할 수 있어서.”
“친구 추가?”
“주민끼리의 연락책이 있어. 한번 추가해두면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할수 있지. 뭐, 나랑 만나고 싶으면 여기저기 식당을 살펴보라고. 마음껏 식도락을 즐기고 있으니까.”
완전히 게임 그 자체군. 스튜를 먹던 지수가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이제 보니 정보 조사를 할 것도 뭣도 없었다, 이곳 네버랜드의 주민들은 다들 외부인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궁금한게 있으면 그냥 가서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저, 그거….”
들려온 목소리에 지수와 전승민이 놀랐다. 지수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것은 이유라였다. 지수는 눈동자를 끔뻑이며 당황했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말하는 거 아닌가? 그녀가 삿대질하고 있는 건 지수가 들고 있는 동화책이었다.
“혹시, 저도 읽어봐도 될까요.”
“어, 얼마든지….”
지수가 당황해하며 이유라에게 동화책을 넘겨주었다. 힐끗 눈동자를 돌려 동화책 주인인 남자를 쳐다보자, 그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꾸벅 숙이고 동화책을 받아든 이유라가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남은 두 사람은 남자와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며 네버랜드의 정보를 들었다. 그리고, 훌쩍. 떠들던 세 사람이 문득 이야기를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서 동화책을 읽는 이유라가 히끅대면서 울고 있었다. 이유라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동화책의 페이지를 적셨다.
‘뭔데 이건.’
지수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인형사가 동화책을 읽으면서 울고 있다. 대체 누가 이 풍경을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슬쩍 눈을 돌리자 그 전승민 또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와 전승민의 눈이 맞았다. 지수가 시선으로 말했다.
‘울잖아요.’
‘우네.’
‘어떻게 좀 해봐요.’
‘네가 데려온 사람이잖아. 네가 어떻게 좀 해봐!’
‘전 이런 상황엔 쥐약이란 말이에요!’
무언으로 주고받은 건 대강 그러한 대화였다. 솔직히 곤란했다. 뭐 속상해할 일이 있는 거면 괜찮냐 위로라도 해주겠지만, 동화책 읽다 울고 있는 사람한테 뭐라고 말을 해줘야 되는 건가. 아 진짜 잘 썼죠? 제가 사실 그 작가 팬인데 다른 작품들도 끝내줘요. 이렇게 말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옆에서 누가 울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떠드는 것도 이상했다. 몇 초간 상당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수와 전승민의 눈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어떻게든 해봐. 어떻게든 해주세요 좀! 그러던 중 큼큼 헛기침을 한 것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였다. 남자가 이유라에게 티슈를 건넸다.
“이걸로 좀 닦으면서 읽지.”
“아, 감사합니다….”
티슈를 받아든 이유라가 눈가를 닦고 다시 동화책에 집중했다. 결국 상황을 수습한 건 일행도 아닌 다른 남자였다. 지수는 멋쩍어서 머리를 긁었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인간 두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유라가 동화책을 덮었다.
“감사합니다.”
이유라는 공손하게 동화책을 내밀었지만 동석한 남자는 손을 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기념인데, 정말 감동적으로 읽은 듯하니 그냥 선물로 가지라는 말이었다. 네버랜드에는 다 좋은 사람밖에 없다더니 그게 정말인 듯 싶었다.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식당에서 나왔다. 슬슬 시간이었다.
약속장소에는 이미 서중철과 예술가가 와있었다. 두 사람의 입에는 닭꼬치 같은 것이 하나씩 물려있었다. 거리의 노점에서 산 음식인 듯싶었다. 어쩌면 거저 받았을 수도 있고.
“용왕님!”
이쪽을 알아본 예술가가 손을 흔들었다. 복장이 복장이니 멀리서도 확 눈에 띄는 게 당연했다. 서중철과 합류한 뒤에는 서로 얻은 정보를 교환하는 시간이었다. 지수는 이쪽이 알아낸 이야기를 대강 전해주었다. 그리고 예술가가 말했다.
“여기에도 던전이 있대요! 음, 던전 맞나?”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던전이라면 어떤 던전인지, 설마 S급 던전의 게이트가 이곳 안에 있던 것은 아닌지. 신경 쓰이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큼큼 헛기침한 예술가가 시인 같은 어조로 말했다.
“네버랜드를 만든 요정은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자신을 발견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 괴물들을 무찌르고 끝에 다다른다면, 요정이 그대의 소원을 이뤄주리라!”
다른 사람들은 아무 반응 없이 빤히 예술가를 쳐다보았다. 역시 조금 부끄러웠는지 예술가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음유시인이 부르는 노래가 이런 내용이었어요. 그냥 전설 같은 건지 진짜인지는 몰라도, 일단 몬스터가 나오는 커다란 동굴은 존재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아무도 끝에 다다르진 못했지만. 모험가들이 매일 거길 조사하고 오는 것 같던데요.”
예술가의 말을 들은 지수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유라는 보물이라도 되는 듯 동화책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저 책. 분명히 루드비히가 쓴 저 동화책에서도 요정이라는 존재가 서술되어있었다. 이야기의 신빙성은 상당히 높아 보였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인가….’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 말고도 서중철이 알아낸 정보와 지수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이러했다.
- 네버랜드 안에서는 각성자의 상태창이 무력화된다.
즉 각성자들이 상태창을 이용해 스탯의 보정을 받거나 스킬 같은 것을 쓸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반쯤 무능력자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지금 네버랜드에 들어온 네 사람은 전부 S급에 이르러, 상태창의 도움이 없어도 단독으로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어쭙잖은 놈들이 와서 깽판 놓지 말라는 뜻이군.”
합리적인 제한이었지만, 그런 안일한 규칙으로 봉인하기에 지수 일행의 능력은 너무 강했다. 애초에 지금 지수의 전투능력의 대부분을 이루는 건 각성자로서의 능력조차 아니었다. 각성과는 별개로 용왕의 이름을 계승해 얻은 힘이다.
얻은 정보들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있었다.
- 네버랜드 안의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곧장 바깥으로 퇴출당한다. 외부인은 일주일 안에 주민이 되어야 한다.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마을 중앙 촌장의 집에 방문할 필요가 있다.
-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면 자동으로 생활비를 지급받고, 연락이나 상점 등 여러 가지 편의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 주민이 되는 동시에 외형이 재구성되며, 자신과 적성이 맞는 능력에 눈을 뜬다. 능력은 훈련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 능력을 성장시키고 충분히 안정되어 다음 여행을 시작할 준비가 된 사람은 네버랜드를 떠나 이세계로 향할 수가 있다.
“이세계는 또 뭔지.”
전승민이 가지가지 한다는 듯 미간을 꼬집었다.
얻은 정보를 종합해보면, 이곳 네버랜드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잠깐 쉬면서 능력을 기르다가 다른 세계로 떠나게 해주는 정거장 같은 곳인 듯했다. 얘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수는 말이 안 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세계라는 게 뭐 장난도 아니고.’
그런 게 그냥 간단히 되는 것일 리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에 도달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여왕의 영역이다. 지수가 백 명 있어도 불가능한 수준의 일이었다. 뭔진 몰라도 무언가 속임수가 있다. 지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일단 촌장의 집에 가보죠.”
다른 사람들이 동의했다. 더 이상 마을을 조사해봤자 겉을 훑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강 다 얻었다는 느낌이었다.
촌장의 집은 네버랜드의 중앙에 뻗어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거목의 안쪽을 파서 사람이 사는 집으로 만든 모양이었다. 들어오란 말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촌장이 있었다. 솔직히 지수는 촌장이라 하길래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수 일행을 맞이한 건 훤칠한 엘프였다.
“외부인들이군.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고 싶어 온 건가? 다섯 명이 동시에 찾아온 건 또 처음인데…. 뭐 됐나.”
그는 테이블에 앉아 차분하게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내가 촌장이네, 따위의 자기소개 같은 것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찻잔을 쳐다보았다. 이내 고개를 든 촌장은 지수 일행의 면면을 한번 슥 훑어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삿대질했다.
“너랑 너.”
엘프 촌장이 가리킨 것은 예술가와 이유라였다.
“너희 둘 말고는 주민 못 될 테니 그냥 돌아가.”
그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네버랜드의 주민이라는 것이 그냥 되고 싶다 하면 되게 해주는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인가? 지수가 뭐라 말하려고 하자, 그보다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전승민이 불만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적어도 자격이나 기준은 말해줘야지. 그냥 한도 끝도 없이 너는 안 되니까 꺼지라 하면 기분이 더럽잖아.”
전승민의 말에 촌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결코 이쪽을 적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른 네버랜드의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네버랜드의 사람들 특유의, 이쪽에 무조건적으로 보내주는 호의가 없다. 그의 눈동자는 달관해있었다.
“자격이니 기준이니 하는 건 없어. 네버랜드는 찾아오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의 존재의의가 무너져버리지. 내 말의 뜻은, 어차피 너희들은 결국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는 걸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런 것쯤이야 척 보면 알아. 차를 마신 촌장이 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전승민이 입가를 이죽이며 촌장에게 말했다.
“웃기는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너.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건가?”
촌장이 말을 잘랐다. 너무 어이없는 질문에 전승민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댔다. 그게 대체 어디 말이나 되는 질문인가. 그리고 촌장은 그거 보라는 듯 두 눈을 감았다.
“절차의 문제야.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려면, 우선 원래 세계의 주민이길 포기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나?”
“원래 세계의 주민이길 포기… 설마.”
지수가 한 가지 생각에 생각이 미쳐 흠칫하자, 떠올린 그것이 맞다는 듯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에서 살고 싶다면 일단 한 번 죽어야 한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너희들은 당연히 그걸 받아들이지 않겠지.”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길가에서 떠들고 웃던 사람들도, 과일을 나누어준 아주머니도, 술집에서 만난 남자도. 전부 한 번 죽어서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었다는 건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정도로 이곳에서 살고 싶었다는 건가?
“그러니까 헛수고 말고 일주일 동안 마을 구경이나 하다가 돌아가도록. 나가면 전부 다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이야기 끝났으니 나가라는 듯, 촌장이 휘휘 손을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