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4) >
‘통화는 당연히 안 되나…..’
핸드폰을 확인한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정유현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통신은 바깥과 완전히 두절되어 있었다. 공략법은 이미 전달해놓았지만, 이변 따위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원정대의 상황에 대해 한 번 확인해두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네버랜드 안에서의 연락은 불가능한 듯 싶었다.
그렇다면 잠깐동안 밖으로 나가서 확인했다가 다시 들어오면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고개를 든 지수가 마을의 입구, 뭉게뭉게 퍼져있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지수의 눈동자에서 금빛의 안광이 흘렀다. 수수께끼가 해체되어 네버랜드를 감싸고 있는 신비의 구조가 해석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이 마을은 커다란 결계 비슷한 공간이야.’
결계가 아니라 결계 비슷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일반적인 결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바깥과 안을 차단하는 종류의 것이었다면 지수가 곧바로 구조를 간파해 파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지수가 용왕 스나크로서 지니고 있는 둥지와도 비슷한 성질의 공간이었다.
‘핵 비슷한 걸 찾아내지 않는 이상 해체는 어려워.’
그리고 해석 스킬로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패널티였다. ‘이 마을에 들어온 각성자가 밖으로 나갔다간, 다시는 네버랜드의 입구를 포착하지 못한다.’ 입구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에는 그러한 장치가 되어있었다.
예술가가 네버랜드에 한 번 방문한뒤에도 다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예술가에게도 외부인인 이상 일주일이라는 체류 제한이 걸려있고. 그 기간을 다 채우면 강제적인 방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힘으로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 종류의 패널티가 아니었다. 이 마을, 네버랜드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법칙을 강제하고 있었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든, 세계 최강의 각성자든. 일주일이 지나면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김유성 씨가 말했던 거랑 비슷해.’
가진 능력이 어느 정도의 영역을 넘어서면, 문제는 단순한 힘싸움이 아닌 법칙의 싸움이 된다. 과장을 곁들여 주먹으로 지구를 박살낼 수 있는 힘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같은 능력을 가진 적과 싸우면 무능력자나 마찬가지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법칙을 상대보다 빨리 해석해, 자신이 찌를 수 있는 빈틈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김유성이 가르쳐준 싸움법이었다.
‘애초에 그만한 수준이 대체 몇이나 되겠냐만.’
적어도 아그리올라 급의 존재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이 마을 네버랜드는 그와 같은 ‘법칙의 강제’를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었다. 이곳을 만든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수가 생각하고 있던 것만큼 만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선생님, 용무는 끝나셨습니까?”
“아, 용무라고까지 할 건 없고. 그냥 전화 되나 확인해봤어요.”
“상식적으로 될 리가 없겠지.”
“그렇더라고요.”
전승민의 말에 지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무튼 한 번 나갔다 들어올 수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안에서 어떻게 해결을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지수는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이곳에 쓰러뜨려야 할 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여왕을 숭배하는 광신도들의 교단. 루드비히의 수기에 적혀있던 그 서술의 실마리를 더듬은 끝에 도착한곳이 이 마을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정말로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긴 한 건가.
이곳은 어떻게 봐도 광신도들의 아지트라는 느낌이 아니었다. 지수가 어렴풋이 떠올리고 있던 이미지는, 사람을 만나자마자 뒤통수를 쇠파이프로 후려치고 집단으로 린치하는 광인들의 집단이었다. 능력을 쓰면 괴물로 변신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쯤이야 장난처럼 여기는. 그런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편견이라고 할수 있지만, ‘큰 힘을 얻게 된 사회부적응자’라고 하면 그런 음습한 인상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을 보아라. 이곳 네버랜드는 마치 온화와 평온이라는 단어가 온 공기에 녹아내려 있는 듯한 장소였다. 전부 다 박살내주겠다며 싸움을 걸 만한 분위기는 도저히 아니었다.
같잖은 고민 말라는 듯 지수의 등을 밀어준 건 전승민이었다.
“뭐, 잘못 찾아온 거든 제대로 찾아온 거든 상관없어. 이렇게나 이상한 곳이다. 샅샅이 조사해봐도 손해는 없겠지.”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이곳이 정말 여왕의 신도들이 모여있는 아지트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건 갑자기 나타난 수수께끼의 마을. 던전의 게이트를 지나온 것도 아닌데.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했다. 이만큼이나 돌출된 상황이라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 실체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선생님, 아까 기사분이 말한 대로 촌장의 집에라도 가볼까요?”
“술집에서 정보를 얻는 게 정석이겠지. 떠드는 사람도 많고, 다들 우릴 경계하는 기색은 요만큼도 없어 보이니까.”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서중철과 전승민. 거기에 예술가까지 끼어들어, 세 사람이 왁자지껄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 또한 이 수수께끼의 마을 네버랜드에 대해 큰 흥미가 있어 보였다. 그야 흥미가 동하지 않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지수가 콧숨을 내뱉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촌장의 집에 술집에서 정보수집이라니,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러면 나뉠까.”
전승민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지수 또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와 달리 정보조사는 인원이 많다고 해서 무언가 어드밴티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움직이는 데에 불편함만 많아졌다. 어떻게 생각해도 분산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일행 중 단 한 사람, 예술가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전승민에게 따지고 들었다.
“왜요? 당연히 다 같이 둘러보는 게 더 재미있잖아요!”
“그쪽은 대체 뭘 하러 온 거지? 일 방해하러?”
“아이고, 승민아. 너무 날 세우지 말고.”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의 전승민을 제지한 건 역시나 서중철이었다. 그리고 미소를 띤 서중철이 예술가를 돌아보았다.
“너무 서운해하진 마세요, 얘가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니까. 그쪽 분은 학원 이사님이시죠? 분명히 리그 경기마다 VIP석에서 매일 망원경으로 보고 있으셨던 것 같은데….”
“아, 알고 계셨어요?”
예술가가 짝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맞잡았다. 각성자 리그를 제패한 콤비 중 한 명인 서중철이 알아봐줬다는 게 커다란 감동이라는 듯, 예술가는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저 사실 리그 팬이거든요! 각성자의 능력이 발하는 색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싸움!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요!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영감이 무럭무럭 솟아난다니까요!”
예술가는 이계의 문물들을 격렬하게 동경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각성자들끼리 싸우는 리그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이내 서중철과 예술가는 의기투합해서 떠들었다. 화제는 대부분 리그의 선수평가나 명경기 같은, 그들끼리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을 바라본 전승민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튼 찢어지지. 할 얘기 많아 보이니 저기 둘이서 붙어먹으라고 하고. 이쪽 셋이 한 그룹이 되면 되겠지.”
“네? 저는 용왕님이랑 같이 다니고 싶은데!”
“그러면 바꾸든가.”
“그렇지만 서중철 선수랑도…아아, 못 고르겠어요! 그냥 다 같이 다니면 안 돼요? 그게 제일 재미있을 것 같은데!”
“가지가지 하는군 진짜. 이 놈 그냥 놓고 가면 안 되나?
전승민이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룹으로 찢어져서 조사한다라. 솔직히 마음대로 좋아하는 쪽에 붙어가라 방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학생들 수학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는 없었다. 일행의 결정권자는 지수였다. 확실히 판단을 내려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인형사를 떼놓고서 다니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지수가 힐끗 이유라를 쳐다보았다. 이유라는 지금까지도 말을 아예 안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인사할 때조차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대신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이유라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설마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만일 무슨 일이 있어 이유라가 돌발행동을 할 경우 인형사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나뉘면 될 것 같네요.”
얘기하고 있는 두 사람, 서중철과 예술가가 한 그룹. 나머지인 이쪽 세 사람이 한 그룹. 더 나누어서 세 그룹 이상이 되면 한 명은 필연적으로 혼자가 되어버리니 이렇게 나누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수가 예술가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쪽은 마을을 순회하면서 정보를 모아주세요. 이쪽은 술집에서 이야기를 들어볼 테니.”
“알겠습니다!”
“한 시간 뒤에 이곳에서 다시 모이죠. 촌장의 집은 그때 다 같이 가보는 걸로 하고.”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예술가는 한 번 이곳에 와본 적이 있으니,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조사하는 것도 더욱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조사는 뒷전이고 마을을 즐기는 데에 전념할 것 같지만, 그런 점은 성실한 서중철이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줄 것이다. 지수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이쪽도 가보죠.”
“그래.”
"......."
팔짱을 낀 전승민이 대답하고, 이유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가와 서중철 그룹과 달리, 이쪽의 세 사람은 사교성이라거나 붙임성 있다는 말 하고는 담을 쌓은 이들이었다. 지수와 이유라는 말할 것도 없고, 전승민 또한 기본적으로 날을 세우고 있는 성격이었다. 혹시 인선을 잘못한 건가? 지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술집에 들어갔다.
“어서 옵쇼~!”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주인장의 유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집 안쪽은 바깥의 테이블들보다도 더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아직 낮인데도 가게는 사람들로 붐벼있었다. 테이블들을 바라보니 거나하게 취해있는 사람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내 술집에 들어온 지수가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거 돈은 쓸 수 있는 건가?’
가게 구석구석에 눈동자를 까닥여보니 계산은 금화처럼 생긴 노란 동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슨 동전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수가 알고 있는 백 원 오백 원 동전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지폐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곳에 한화를 환전해주는 서비스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당연히 음식을 시킬 수도 없다.
이거 조금 곤란하게 된 건가. 지수가 입을 벌리고 있자, 주인장이 직접 다가와 원하는 자리에 앉으라 안내해주었다.
“저기, 죄송한데 돈을 구할….”
“응? 응? 너희들 외부인이지?”
지수와 두 사람을 살펴본 주인장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그 말대로였지만 딱히 주인장이 발군의 추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죽 갑옷이나 로브 같은 중세풍의 의상을 입은 술집 안의 다른 손님들과 달리 지수 일행은 현대의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질적인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외부인한테는 돈 안 받아. 서비스라고, 서비스.”
“정밀인가?”
“네버랜드의 인심을 얕보지 말라고!”
주인장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서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이 가게만의 방침이 아니라, 이 네버랜드 전체의 규칙인 듯했다. 손님을 대접한다고 해야 할까, 체험판은 무료라는 느낌의 그것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지수 일행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피식 웃은 전승민이 주인장을 비꼬며 말했다.
“너무 안일한 거 아닌가? 우리가 하루 종일 가게에 눌러앉아 비싼 메뉴를 팍팍 시켜서 거덜 내면 어쩌려고.”
“거덜이 나면 나는 거지, 와하하하하!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외부인한테 대접한 것들은 다 촌장님이 알아서 정산해주시니까! 너희가 돈을 펑펑 써주면 나야 좋은 거지.”
두 사람의 대화에 지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외부인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는 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높은 분이 나중에 비용을 대신 내주고 있는 구조인 듯했다. 그런 거라면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술집 안에서는 다른 사람과 합석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합석하는 게 좋겠죠. 우리끼리 이야기해봐야 의미가 없으니.”
“돌아가는 사정에 빠삭해 보이는 녀석으로 골라야겠군. 좀 취해있어야 말이 술술 나올 테고. 저기 뚱뚱한 놈은 어때. 저게 몇 그릇이야? 혼자서 많이도 먹고 있구만.”
가리킨 테이블에 앉아있는 건 상인처럼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였다. 혼자서 음식을 시켜놓고 먹고 있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쪽 테이블, 그들끼리 어깨동무를 한 채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내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 봐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전승민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똑똑 두드렸다.
“이봐. 같이 앉아도 되겠나?”
“으응? 뭐야, 말상대라도 해주시려고? 오호, 외부인이시구만! 앉으라고, 앉아. 혼자 마시고 있느라 적적한 참이었는데 잘됐지 뭐야.”
전승민이 지수를 돌아보았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합숙하자 남자는 끄억 트림을 하면서도 주인장에게 또 다음 요리를 시켰다. 모든 메뉴를 한 번씩 시켜보기라도 할 생각인가? 지수 일행은 간단한 스튜를 주문했다. 그리고 지수가 남자에게 질문했다.
“저희가 사실 이곳에 대해 하나도 몰라서요. 우연히 흘러들어온 거거든요. 보니까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게 처음도 아닌 것 같은데….”
“꽤나 오지, 외부인은.”
“뭐 이건 꼭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게 있으면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궁금한 것은 산더미만큼 있었다. 하지만 초조해하면 안 된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야 했다. 컵을 든 남자가 물을 꼴깍꼴깍 삼켰다.
“음~ 네버랜드는 좋은 곳이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면 되고, 되고 싶은게 있으면 되면 돼.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서 꿈을 꾼 것처럼 이곳에 대해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그야 주민이 되어서 정착한다면 그만이고.”
지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처음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쫓겨나가게 되면, 네버랜드에 대한 것은 전부 잊어버린다.’ 평범한 정신계 주문이라면 어느 정도 강력한 것이라도 간단히 튕겨낼 수 있겠지만, 아마 이 또한 김유성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절단하는’ 능력처럼 어떠한 절대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항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성가신데….’
입술을 깨문 지수를 내버려두고 남자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네버랜드에선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
“그게 뭐지?”
“남을 속여선 안 된다. 약속을 어겨선 안 된다. 과거를 캐물어선 안 된다. 이걸 어기면 곧바로 바깥으로 퇴출이야.”
“하, 무슨 도덕 교과서에나 쓰여있을 법한 말들이군. 어겼다간 기사단 같은 게 와서 잡아가는 건가?”
“아니야, 아니야. 네버랜드의 철칙은 그런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같은 미지근한 게 아니라구. 어기는 순간 정말로 뽕 하고 사라져버려.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말이야.”
전승민이 그게 말이 되는 일이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공간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규칙은 단순히 글자로 쓰여있는 합의가 아니라, 정말로 힘을 지니고 있는 룰이다. 정말로 미리 알아서 다행이었다. 그걸 모르고서 섣불리 거짓말을 내뱉었다면 여지없이 쫓겨날 뻔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전승민이 따지듯이 물었다.
“애당초 그런 규칙을 만든 게 누구지? 이 마을을 만든 자인가?”
“모두의 바람이지. 네버랜드를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이 마을을 만든 건…흠, 나도 잘은 몰라. 동화책에 쓰여있는 이야기가 전부지. 한번 보겠나?”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들릴까 말까 한 수준의 목소리로 작게 혼잣말을 했다. 물론 지수의 귀는 음성을 포착했다. 분명히 상점, 이라고 중얼거렸다. 이내 남자가 공중에 대고 손가락을 툭툭 누르는 동작을 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책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두꺼운 장정으로 되어있는 동화책이었다.
“바로 이 동화책이지.”
“아니, 동화책이고 뭐고 방금 대체 뭘 한 거지? 분명히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 책은 어디서 뽕 하고 나타난 거야. 당신 마술사인가?”
“네버랜드의 주민들은 다 할 수 있다네.”
남자는 비밀이라는 듯 웃었고 전승민은 납득하지 못해 연신 남자에게 손바닥을 보여보라 하며 따졌다. 지수는 옆에서 조용히 동화책에 손을 뻗었다. 그것은 네버랜드의 건국신화, 아니 나라가 아니라 마을이니 건촌신화 쯤이라 할 수 있었다. 표지를 한 번 손으로 슥 훑은 지수가 표지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지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동화책을 쓴 작자의 이름을 확인하자 정말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야 설마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지수의 해석으로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떠오르는 인물은 그 자 정도밖에 없었다. 이 양반은 안 끼는 데가 없구만 진짜. 코웃음을 친 지수가 동화책을 내려놓았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 저, ‘네버랜드 건설기’.
그것이 남자에게 건네받은 동화책의 표지에 쓰여있는 문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