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3) >
차량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아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전승민은 팔짱을 끼고서 입술을 이죽였다. 지수의 대답을 들은 뒤 더 이상 불평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납득이 가지는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이유라의 경우엔, 차에 탄 뒤 쭈욱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말 한 마디조차 꺼낸 적이 없었다.
서중철이 백미러를 통해 지수에게 시선을 보냈다. 선생님 어떻게 좀 해주십쇼. 그런 절실한 부탁이 담긴 눈빛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받은 지수는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애초에 지수는 이런 류의 분위기에 거북함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하니까 참 좋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지수의 반응을 확인한 서중철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태생이 혼자 있길 좋아하는 지수와 달리, 살갑고 붙임성 좋은 서중철은 주변의 분위기가 어색하면 위부터 아파왔다.
“커, 커피 한 잔씩 할까요? 보온병에 담아왔는데.”
결국 이야기의 물꼬를 튼 것은 버틸 수 없던 쪽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서중철이 턱짓하자, 전승민이 한숨을 쉬며 손을 움직였다. 익숙한 동작으로 수납공간에서 꺼낸 것은 종이컵과 보온병이었다. 쪼르르 따라진 커피에서 김이 올라왔다. 이유라와 지수가 고개를 꾸벅이며 컵을 받았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까 말이죠, 저번에 갔던 가게에서 있었던 일인데, 아내랑 같이 외식이나 할까 해서 나갔다가….”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이끌어나간 것은 서중철 혼자서였다. 지수는 경청하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고, 전승민은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라 질린다는 듯 턱을 관 채 차창을 바라보았다. 앉아있는 이유라는 하염없이 입을 다문 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은데.’
지수가 곁눈질로 이유라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였다. 예전에 지수와 싸웠을 때는 좀 더 방방 뛰어다니던 느낌이었는데. 지수가 조용히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준 우진을 부활시키기 위해, 아그리올라의 하수인이 되어 온갖 더러운 짓을 해가며 각성자들을 사냥해왔다. 그것이 전부 헛짓거리였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그야 상당한 충격이겠지.
단순히 매달려온 희망을 잃어버려 좌절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저질러온 일에 대한 죄책감에 잡아먹힌 것인가. 어느 쪽이든 지수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분명했다. 제대로 싸우지 못할 수도 있었다.
‘뭐, 그냥 실로 적당히 포박만 해주면 오케이지만.’
정말 큰 상관이 없었다. 단순히 전력 면에서라면 지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을 동행시킨 건, 지수 혼자서 커버할 수 없는 부분을 보충시키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면 빠져나가려 하는 적을 붙잡는다거나.
끼익.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미니밴이 멈추었다.
차가 세워진 곳은 외딴곳의 빌라 단지였다. 차에서 내린 각자가 장비와 상태를 점검했고, 이유라는 트렁크에서 커다란 관을 꺼내 등에 멨다. 흑기사 우진의 인형이 들어있는 관이었다. 저편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온 건 낯익은 남자였다.
“용왕님!"
"응?"
다가온 남자의 모습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예술가. 매드 티 파티의 회원 중 한 명이었다. 지수에게 학원의 시설들을 안내해주었던 그 사람. 문제는 어째서 예술가가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지수는 안내역 따위를 파견해달라는 부탁을 한 적도 없었고, 미리 언질을 받지도 않았다.
“꼭 직접 안내해드리고 싶어서요!”
예술가는 웃는 얼굴로 지수의 동행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그런 예술가를 보며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이제부터 싸움이 있을 곳이고, 돌입하는 건 전투원 네 명으로 충분했다. 예술가가 함께 있어봤자 짐덩이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 또한 그런 사실쯤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안일한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지수가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애초에 같이 들어가고 싶다면 처음부터 같이 차를 타고 오거나, 먼저 지수에게 뭐라고 한마디 말이라도 해두는 것이 맞았다. 만일 지수가 그냥 날아와서 이곳 전체를 폭격이라도 했으면 어쩔 셈이었던 건가.
단지의 주변은 슬럼가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분위기였다.
담벼락은 죄다 반쯤 깨져있었고, 구석에는 비어있는 소주병 몇 개가 굴러다녔으며 벽마다 그라피티가 칠해져 있었다. 매드 티 파티에서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이곳이야말로 수상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신비주의 집회의 소굴이라고 했다.
지수 일행이 곧장 돌입하려고 하자, 예술가가 입을 열었다.
“저쪽에 정문 말고 돌아가는 길이 있어요. 눈에 안 띄고 들어가서 조사하려면 그쪽으로 가는 편이 좋을 거예요.”
속삭이는 예술가의 말에 지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냄새가 나는데.‘
지수는 적과 싸울 때를 제외하고선 웬만하면 심상해석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기력의 소모나 부작용의 문제 같은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의 감정을 마음대로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례한 행위라는 게 지수의 생각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모종의 수단으로 지수의 감정을 읽어낸다면 지수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자신이 당했을 때 불쾌할 행위는 남에게도 하지 않는다.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수상한 기색을 대놓고 풍기고 있으면 써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지수의 한쪽 눈동자에서 푸른 빛이 흘렀다. 심상해석. 본질을 간파하는 눈은 순식간에 예술가가 감춘 속내를 까발렸다.
역시나라고 할까, 예술가는 지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잘 속일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광신도들이 파둔 함정으로 유인이라도 하려는 생각이었나.
‘이걸 어떻게 하지?’
당장 제압하고서 정보를 추궁하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오히려 모르는 척 입 싹 닦고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마 여왕의 광신도들은 이미 자신들을 박살 내러 온 지수를 역으로 상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것이다. 주전력이 전부 모여있겠지.
즉 깔끔하게 여왕의 광신도들을 일망타진할 찬스인 것이다. 지수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예술가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척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매복한 전력에 기습당한다 한들 이쪽이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지금 지수 일행의 전력은 말 그대로 과잉 수준이었다.
‘그래도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되겠지.’
지수가 자신의 주변에 희미하게 마력의 영역을 펼쳤다. 적어도 영역의 범위 안에서 적의를 가진 무언가가 움직이면 곧장 감지할수 있었다. 이내 일행은 예술가의 안내를 따라 걸어갔다. 예술가의 말대로 그곳에는 단지 안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통로라는 느낌이었다.
“잠깐 기다려. 저쪽….”
일행을 멈춰 세운 것은 전승민이었다. 마법사인 전승민은 입구 바깥과 안쪽의 공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사실 잘 살펴보면 육안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길 주변에만 미묘하게 안개가 흘렀다. 딱 봐도 아주 수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췄다간 의미가 없었다. 지수가 말했다.
“어우, 미세먼지 때문에 그런가 안개가 다 껴있네요.”
지수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러자 팍 눈썹을 찌푸린 전승민이 고개를 돌렸다. 너 정도 되는 놈이 아무 것도 못 느꼈냐 추궁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뭐라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아무 말 말고 그냥 들어가자는 신호를 알아준 듯 했다. 헛 기침을 한 전승민이 말했다.
“흠, 흠. 마스크라도 쓰고 올 걸 그랬군.”
“그러니까 수치 확인해봤을 땐 별로 안 높았는데.”
전승민도 지수도 연기에 그리 소질이 있지는 않았기에 상당히 어색한 어조였지만, 다행히 예술가는 의심 따위 품지 않은 것 같았다. 예술가가 앞장서서 길을 걸어갔다. 단지의 입구에 발을 들여놓으며, 지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떤 공격이든지 한 번 해보시지.’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기습을 해온다면 곧장 요격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공격해오지 않았다. 대신에 보고 있는 풍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흩어진 안개를 지나온 순간, 게이트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별세계로 바뀌어있었다.
“서, 선생님. 뭡니까 이건…?”
서중철이 질문했지만 지수도 돌려줄 말이 마땅치 않았다. 주변은 외딴 동네의 구석에 세워진 빌라 단지가 아니라 중세 서양의 마을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복장들 또한 그러했다. 다들 로브나 서양 전통 의상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행인들은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술집 같은 가게에서는 대낮부터 남자들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사내들은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모험가 같은 행색이었다. 거리 한쪽에서는 모자를 쓴 음유시인이 노래를 불렀다.
행인들 중에서는 금발에 귀가 뾰족한 엘프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이쪽을 향해 좋은 하루 되라며 살갑게 인사해주었다.
그리고 예술가가 양팔을 벌리며 지수 일행에게 말했다.
“대단하죠, 용왕님! 깜짝 놀랐지 않아요?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저는 아직도 두근거림이 멎질 않는다니까요!”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예술가는 악의 따위는 요만큼도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비밀 파티를 준비해 선생님을 놀래킨 학생처럼 그는 지수의 뒤통수를 치려던 게 아니라 단지 놀래키려던 것뿐이었던 것 같았다.
“저도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여기 도착하려면 제가 안내해드린 감춰진 길을 통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예술가가 방방 떠서 떠들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지수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말을 타고 있는 갑옷의 기사였다. 지수 일행을 한 번 슥 훑어본 기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올렸다. 이쪽을 보는 표정은 인자했다.
“행색을 보니 외부인인가?”
기사가 말했다. 서중철과 전승민은 헌터로서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대의 복장. 거리에서 나다니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게 명백했다. 그럼에도 기사는 딱히 이상하지 않다는 듯 차분히 말했다.
“여기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건…자네들도 ‘바깥’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거겠지. 네버랜드는 그대들을 환영하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네버랜드니 외부인이니, 이해할 수 없는 말들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이 다른 세계 같은 풍경 자체가 납득이 안 됐다. 던전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그리고 큼큼 헛기침을 한 기사가 지수 일행에게 말했다.
“외부인이 머무를 수 있는 건 일주일 뿐이네. 그 뒤로는 영영 이곳을 찾아오지 못해. 더 머무르고 싶다면 주민이 돼야 하네. 생각이 있다면 마을 중앙의 촌장님 댁에 가보게나. 무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네버랜드는 좋은 곳이니까.”
그리고 지수 일행의 면면을 하나씩 살펴본 기사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고생한 것 다 안다는 듯한 미소였다.
"푹 쉬며 천천히 생각해보게. 이곳의 주민이 되면 슬픈 기억도 과거도 전부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니."
기사가 떠나간 뒤 지수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당황스러웠다. 일단은 마을을 둘러보며 걸어보기로 했다. 그것 이외에 뭐 어쩔 도리도 없었다. 안내역을 맡은 건 예술가였지만 그도 지형을 그리 잘 알고 있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길치라서…하하하하!”
마을은 평화롭고 또 활기찼다. 아주머니들은 길을 걷기만 해도 과일을 나누어주었고, 사람들은 악기를 튕기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에 따라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었다.
마치 축젯날 같은 분위기였다. 모두가 즐거워보였고 친절했으며 싸움 같은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았다. 잠깐 둘러보기만 한 건데도 이곳이 좋은 마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내 의아한 듯 목소리를 낸 것은 서중철이었다.
“...선생님.”
서중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손바닥 위의 사과였다. 아까 길을 가면서 선물받은 것이었다. 그가 지수에게 물었다.
“저희는 이곳을 박살내러 온 겁니까?”
그 질문에 지수 또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