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2) >
“차 크고 좋네요. 캠핑 갈 때 좋겠어요.”
지수가 안전벨트를 동여매며 말했다. 서중철이 모는 차는 널찍한 미니밴이었다. 천장에는 뒤쪽의 좌석에 탄 사람들을 위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모니터가 달려있었다. 적재공간도 넉넉하고, 잘 살펴보면 차실 내에 청소기까지 비치되어 있다.
차체가 멋있거나 예쁜 것은 아니지만, 실용성으로 판단한다면 더없이 훌륭했다. 지수 또한 오성화가 타고 다니는 것처럼 쫙 빠진 스포츠카보다는 이런 쪽이 취향이었다. 물론 독신인 지수는 이런 커다란 다인승 미니밴을 고르지는 않겠지만.
“그렇죠? 이게 참 야무진 녀석이라 연비도 괜찮습니다.”
핸들을 잡은 서중철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서중철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호인이라고 할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힘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아저씨 버전 허다인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리고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 명.
“...마음에 안들어.”
조수석에 앉아있는 전승민이 중얼거렸다. 백미러에 비치는 전승민의 눈빛은 누구 하나를 당장 씹어먹을 듯이 흉흉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해있는 것은 당연히 뒤에 있는 지수에게였다. 운전석의 서중철이 웃으며 말했다.
“승민이 너는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멀미 패치 또 까먹고 안 붙이고 왔구나. 밑에 서랍에 멀미약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승민이 벌떡 일어나려 하며 화를 냈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어 제대로 일어서지는 못했지만, 격한 움직임에 차 안이 조금 덜컹거렸다. 서중철은 앞을 보고 있는 채 한 손으로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한숨을 쉰 전승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보니 전승민을 다루는 게 상당히 능숙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난 거예요?”
지수가 서중철에게 물어보았다. 생각해 보면 첫 던전행을 함께하고 헤어진 뒤, 서중철의 행적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어떻게 해서 전승민과 얽히게 되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러자 서중철이 하하하 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거는 또 이야기가 길어지긴 하는데요….”
“아니. 별것도 없어.”
서중철의 말을 끊은 전승민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너같이 괴상한 마법을 쓰는 예외를 빼면, 보통 마법사들은 주문을 영창하는 동안 무방비가 되지. 그래서 나를 지켜줄 전열이 필요했다. 나름대로 조건을 붙여서 동행을 모집했더니, 그중에서 사람이 되어먹은 게 중철이 형 한 명뿐이더군. 그게 끝이야.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에이, 뭐가 그게 끝이야? 그냥 너 혼자 하겠다고 아득바득 싸우던 것부터 해서 반쯤 죽어가고 있던 거 내가….”
“중철이 형은 가만히 있어.”
전승민이 서중철의 말을 잘라먹었다. 지수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게 된 데에는 상당히 구구절절한 에피소드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린 전승민이 엄지로 뒷좌석 쪽을 삿대질하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든다는 건 그거다. 저 여자는 뭐지?”
전승민이 가리킨 곳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건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는 여자였다. 이름은 이유라. 조용히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눈매를 보면, 그녀의 정체가 한때 최흉의 각성자라고 불렸던 ‘인형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핸들을 잡은 서중철이 한쪽 손으로 전승민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서중철이 전승민을 혼냈다.
“저 여자가 뭐냐. 저분이라고 해야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왜 다른 각성자를 데리고 왔지? 우리들로는 네 도움이 되기 부족하다는 뜻이냐?”
전승민이 지수를 훽 돌아보며 말했다.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보니 전승민은 이유라가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떠나서, 그냥 자신이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는 사실 자체에 자존심을 상해하는 것 같았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사람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웃기지 마. 나를 납득시키고 싶으면, 저 여자가 필요한 이유 한 가지만 대봐라. 나랑 중철이 형은 못 하는데 저 여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한 가지라도 있다는 거냐?”
전승민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은 지수가 생각했다. 사실 이유라를 동행시킨 데에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전승민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수는 인형사라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서민하랑 친구라는 건 의외기는 했지만.’
그냥 의외인 수준이 아니라 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냐고 따지고 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유라는 자신을 납치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가 되어서 노느라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서민하에게 들은 뒤였다.
하지만 오해가 풀렸다 해도 이유라를 곱게 보지 못하겠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처음부터 적으로 만난 사이였다.
아그리올라의 하수인. 오성화의 원수. 지수의 안에서 그녀의 인상은 사람 몇쯤이야 간단히 토막 내는 흉악한 악당이었다. 솔직히 말해 전 협회장과 도찐개찐인 수준이었다. 애초에 이유라의 손에 지수 자신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결코 마음을 풀고 대할 수는 없다.
물론 이유라 또한 S급에 해당하는 전력이었다. 이레귤러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웬만한 S급 헌터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원정대에 넣을 수가 없었다. 단지 흉악한 전과가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용궁 기사단은 애초에 기인들의 집합이다. 발푸르기스의 밤의 마녀들부터가 시비가 붙은 길드를 통째로 괴멸시키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무시무시한 짓거리는 다 하고 다니며 온 동네에 수배가 다 붙어있던 양반들이었다. 인형사라는 정체 자체가 원정대에 소속되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바로 구성원과의 원한관계였다.
‘오성화 씨의 원수라고 했으니까.’
그것도 반드시 죽이겠다고, 이를 갈며 죽도록 검을 휘두르게 할 수준의 원수.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리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는 지수였지만, 그 둘을 같은 원정대에 편성하는 것이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작게는 분위기가 파탄날 것이요 크게는 칼부림 소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지수는 이유라를 부탁받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친구가 거둔 아이다.”
지수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던 것은 백묵이었다. 그가 부탁한 것은 한 가지였다. 인형사, 이유라를 용서해달라. 적대했었지만 딱히 원한으로 얽혀있는 것은 아니기에 용서하고 뭐고 할 것도 없었지만, 지수는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백묵이 지수에게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머리까지 숙이면서. 물론 백묵의 행동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수양딸이, 자신을 거둬준 아버지를 살려내기 위해 손을 더럽혀왔던 것이다. 결국 아그리올라에게 속아 넘어가 이용당한 것에 불과했지만.
“아마도 우진을 죽인 것도 아그리올라일 거다. 직접 처리한 게 아니더라도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게 용왕이라는 건 확실해. 우진은 웬만한 몬스터한테 당할 녀석이 아니니까. 최종적으로는 육영웅 전부를 죽이는 게 목적이었겠지.”
정황상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했다. 약해져 있던 아그리올라 자신을 토벌한 것이 육영웅이니 원한을 가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이내 자신이 부활해 활개 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될 인물들이기도 하고. 백묵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정을 못 저버리는 얼간이라 비웃어도 좋아. 그 아이는 내가 속죄하도록 만들겠다. 부족하다면 나도 같이 속죄하지.”
솔직히 지수가 뭐라고 할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야 분명히 인형사로서 이유라는 비난당해 마땅한 짓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지수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은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저 앞의 의자에 앉아있는.
“그래서, 할 말 다 끝나셨다고요.”
목소리는 섬뜩할 만치 건조했다.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오성화는, 평소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익살이나 능글맞음 따위는 요만큼도 섞여 있지 않고, 섣불리 건드리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위험한 공기가 감돌았다.
“화풀이가 필요하다면, 나를 죽기 직전까지 패도 좋아. 일절 방어하지 않겠다. 이건 길드장같은 자리하고는 상관없는, 오로지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부탁이다.”
“웃기고 앉았네.”
등을 돌린 채 오성화가 날 선 음성으로 대꾸했다.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서 아예 기가 찬다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오성화에게 인형사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건, 지수에게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무례함을 넘어서 모욕으로까지 느껴질 수 있었다. 당장 오성화가 백묵의 얼굴에 주먹을 갈겨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오성화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제가 무슨 심정으로 불식 길드에 들어왔는지 다 알면서. 자는 시간도 줄이면서 칼을 휘두른 걸 다 봤으면서! 인형사가 죽은 것처럼 위장시키고 빼돌렸죠. 재밌었어요? 병신 같은 놈이 원수가 살아있는 줄도 모르고 헤헤 웃고 다니네 하고!”
“...미안하다.”
“미안해? 진짜 미안하면 애초에 그딴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은 안 하는 게 당신 신조라며! 그리고선 들키니까 하는 말이 뭐? 용서해주면 좋겠다고?”
오성화는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가 똑바로 눈을 쳐다보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했다.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백묵의 얼굴을 봤다간 자신은 보스의 얼굴을 후려치는 걸 참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먹을 꽉 쥔 오성화가 백묵에게 내뱉었다.
“하, 내가 지금 당신 친구를 도륙내서 죽여볼까? 그다음에, 당신한테 나도 사정이 있으니 용서해달라고 말해줄까! 그러면 댁도 알 수 있겠지. 지금 내가 무슨 기분인지!”
“지독하게 이기적인 말인 것 알고 있다. 그러니….”
그리고 백묵이 서서히 상체를 기울였다. 사이에 낀 채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지수는 순간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지금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인 오성화를 상대로. 그것은 백묵이라는 인간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였던 행동이었다. 그리고 백묵의 다리가 반쯤 접혔을 때.
메마른 목소리가 백묵을 제지했다.
“…그만.”
오성화는 초인적인 수준의 검사다. 등을 돌리고 있다 해도,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쯤이야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앉아 있는 오성화의 모습은 고요했다. 마치 폭발한 뒤의 잿더미 같았다. 오성화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인형사 때문에… 당신이 그런 짓까지 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정말로 그것만큼은 싫다고. 그러니까 그만해.”
화가 풀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성화는 더욱 깊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빨을 뿌득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불 붙은 도화선이 조금씩 타들어갔다.
그리고 한 순간. 콰앙! 커다란 소리가 방 안을 휘저었다. 오성화가 발로 책상을 걷어찬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오성화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내 그대로 멈춰있는 백묵에게 오성화가 말했다.
“아무리 부탁해봤자 저는 그 새끼 용서 못 합니다.”
"......."
”할 수 있어도 안 해요. 영원히 안 할 거예요. 그래도, 용서받지 못한다 알고서도 죽은 사람한테 사과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살라고 해요. 저는 무슨 쌩쇼를 하고 있나 생각하겠지만, 죽은 녀석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할 테니까.”
슬쩍 보인 오성화의 옆얼굴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내 일어나 몸을 돌린 오성화가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는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당장에라도 원수를 죽이고 싶은데, 죽이려들었다간 은사와의 관계가 파탄 나버린다. 그런 모순에 시달리다 결국 숙원 쪽을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이 이겼어요.”
오성화의 목소리는 자조감에 감싸여있었다. 어떤 의미로 말하자면 백묵의 부탁은 비겁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인질로 삼아 협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친구 복수도 제대로 못 해주는 한심한 새끼. 혼잣말한 오성화는 스쳐 지나가며 힘없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최소한 제 눈앞에 나타나게 하지 마세요. 보자마자 훼까닥 돌아버려서 죽여버리지 않을 거라 장담 못 하니까.”
“고맙다.”
천천히 걸어간 오성화가 끼익 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에서는 정적만이 흘렀다. 지수는 괜히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꼬았다. 도저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백묵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다가 멈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백묵은 머릿속에선 방금 오성화가 남기고 간 말들을 곱씹는 듯했다. 오성화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실망하고, 어느 정도 상처를 받았을 지 또한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백묵은 그렇게 몇 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든 백묵이 말했다.
“정유현을 불러줄 수 있나?”
“네?”
조금 뜬금없게 느껴지는 말에 지수가 두 눈을 끔뻑였다.
여기까지 회상 끝.
지수는 고개를 들고 이쪽을 노려보는 전승민을 쳐다보았다. 분명 자신과 서중철에게는 불가능한데, 이유라에게는 가능한 일을 하나라도 대보라고 했었다. 그런 것이라면 곧바로 말해줄 수 있었다. 지금 뒷좌석에 앉아있는 인형사는 새까만 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지수 또한 예전에 걸쳤던 적이 있는 제복이었다.
각성자가 사람을 상대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범죄였다. 자신의 힘을 사용해 임의로 제압행위에 들어가고 싶다면 걸맞은 자격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협회의 집행부였다. 집행부의 업무 중이라면 사람을 상대로 능력을 사용할수 있었다. 외부인력인 임시직이 아니라 제대로 협회의 명부에 등록되어있는 정식 집행부원 자격이 필요했지만.
물론 그것은 지수가 아니고, 전승민이나 서중철도 아니었다. 죽은 사람한테 사과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살아라. 오성화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서 백묵이 낸 답이 바로, 지금 이유라가 입고 있는 제복이었다. 인형사의 강력한 각성자의 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자리. 지수가 대답했다.
“이 사람 집행부원이라서 있어야 돼요.”
그 말에 집행부 신입 이유라가 두 사람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꾸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