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1) >
세상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달라져 가고 있었다.
딱히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는 자들이 아니더라도, 지금 사회가 무언가 새로운 기점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눈치챘다. 다름이 아니라 이계의 침식 때문이었다. 침식은 최근 들어 급격하게 활성화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봉인이 당장에라도 깨질 듯 덜그럭대고 있으니, 안에 갇혀있는 여왕의 영향력 또한 짙어진 것이다. 몬스터는 강해졌고 나타나는 던전의 숫자는 훨씬 많아졌으며 게이트가 열리는 유예 또한 짧아지고 있었다.
마치 대전쟁의 재림이었다. 대응을 잘못했다간 길거리에 사람 대신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사태가 될지도 몰랐다.
다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헌터들은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침식으로 인해 각성자들 또한 강해졌다. 대전쟁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기에 어떻게 대응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놈들을 상대하는 법에 대해서 알고 있다.
던전의 패턴과 공략법들은 정립되었고, 이미 노련한 헌터들의 인재풀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다. 실수해서 게이트가 해방됐을 때의 절차와 인프라 또한 제대로 구축해놓았다. 인류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었다. 또다시 쩔쩔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맨 앞에 서 있는 것이 용궁 기사단이었다. 대전쟁의 재앙이었던 용왕. 그 몬스터의 비늘을 갑주로 걸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지로 뛰어드는 인류 최강의 각성자들. 그들이 없었다면, S급 던전 게이트들의 해방으로 사회는 진작에 무너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몇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 용궁 기사단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원래부터 이름을 날리는 각성자들이었다. 육영웅인 허다인과 백묵부터 시작해 발푸르기스의 밤의 마녀들, 일곱 번째 영웅 정유현, 폭검 오성화. 국내의 헌터 이외에도 권성이나 정원사처럼 외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강자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S급의 경지에 입문하고 있는 헌터들 또한 나타나고 있었다. 이른바 후기지수.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갈 강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두 사람, 각성자 리그를 제패한 콤비.
원소 마법사 전승민과 중갑 기사 서중철이었다.
“...황금기라면 황금기라 할수도 있겠지.”
의자에 앉아있는 전승민이 말했다. 그의 몸 주변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구슬들이 궤도를 이루며 회전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구체들은 각 속성의 정수들을 고밀도의 마력으로 압축해놓은 것이었다. 압축되어 일종의 인력을 띠게 된 의사천체는, 공격에도 방어에도 주문의 보조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각성자의 수요가 이만큼이나 커진 건 아마 대전쟁 이래로 처음일 거다. 게이트는 정말 외계인이 침략해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자원들도 많아졌다. 헌터들의 입지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 사회 전체가 각성자에게 의존하고 있어.”
전승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재였다. 누군가를 따라하기만 해서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오로지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전투 스타일을 구축했다. 서중철 또한, 타고난 자질과 비상식적일 수준의 근면한 노력으로 신세대 헌터들 중에선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이 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적마녀조차 거의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진정으로 각성자 리그의 패자가 된 순간이었다. 이내 전승민이 말했다.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야. 처음부터 그걸 알고서 이런 학원을 만들고, 협회에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거냐? 가치평가만 해도 족히 백 배는 넘는 이익실현을 해냈겠지. 아니면 반대로, 이런 상황을 조장해 만들어낸 장본인이 너인가?”
그리고 앉아있던 전승민이 고개를 들어 지수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바쁘실 텐데 찾아와줘서 영광이군, 척척박사. 아니, 용궁의 용왕님이라 부르는 편이 나을까? 기사단의 원정은 일단락된 건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전승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청년, 이지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각성자라 말해도 좋았다. 용궁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용궁 길드의 용왕. 사람들 앞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에 그 신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체격이나 실루엣, 비교적 어린 나이의 청년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라고까지 불리는 수수께끼의 마법사, 척척박사와 용궁의 용왕이 동일인물이라는 것 또한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용왕의 정체가 지수라는 건 전승민에게는 추리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었다. 전승민의 질문에 지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공략하고 있는 중이에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말할 것도 없이 원정이 끝났을 리가 없었다. 원정은 최후의 S급 던전에 다다를 때까지 강행군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서민하를 비롯한 S급 헌터들은 지금도 던전에 들어가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수가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선생님이 빠지셔도 되는 겁니까? 물론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총대장이시니 없어지면 빈자리가 상당히 클 텐데…..”
“정보는 다 알려주고 왔으니까 큰 위험은 없을 거예요. 지휘하고 있는 것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서중철의 말에 지수가 대답했다. 지금 공략하고 있는 던전에 관해서는, 전력 면에서 지수가 없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환상의 회랑’을 공략하기 위해선 지수 혼자 모든 보스를 쓰러뜨리는 것을 피해야 할 필요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지수에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존재했다.
“그래서. 마녀도 쓰러뜨렸으니 이번엔 네가 직접 우릴 상대해주려고 온 거냐? 그런 거라면 상당히 기쁠 텐데.”
전승민의 시선에서는 호승심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수준 높은 각성자끼리의 대련은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고, 능력의 제어를 갈무리하는 데에 제격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를 제쳐두고라도 전승민은 꼭 지수와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전승민은 한 마디로 안하무인이라 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자신은 천재다. 자신보다 재능있는 자는 적어도 같은 세대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스승 격의 존재인 김혜성조차 단지 경험의 차이일 뿐, 자신이 충분할 만큼 경험을 쌓는다면 당연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과신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향한 냉정한 평가였다.
그리고 헌터 라이센스를 따기 위한 시험을 쳤을 때.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한 시험이라 생각했지만,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마법사를 만났다. 자신과 비슷한 시기, 혹은 그보다 늦게 각성한 듯한 또래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전승민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패배했다. 분명히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쭉.
지수가 불식 길드의 유일한 동맹이 되어 치고 나간 뒤에도, 자신 앞에서 척척박사라는 충격적인 정체를 밝혔을 때도. 인류 최강의 각성자들을 이끄는 용궁 길드의 길드장이 된 지금도. 아무리 손에 닿지 않는 먼 곳까지 가버렸다고 해도.
전승민은 쭈욱, 지수를 자신의 라이벌이라 생각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네 눈에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것쯤은. 리그의 패자라고 해봤자 우물 안 개구리일 뿐. 너에게 비하면 아주 형편없는 재능이라 생각하겠지.”
전승민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전승민은 자신을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의 이지수라는 녀석은 그런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완전히 규격외였다. 각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미 세계 최강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괴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다고, 이제 됐다고. 어차피 따라가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체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뛰어넘어 보일 것이다. 그것이 전승민의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눈을 끔뻑이던 지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그런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는데요.”
“흥. 입바른 소리를 하려는 거라면….”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로 대단한 마법사라고. 저는 말하자면 컨닝을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딱히 전승민을 북돋아주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담담한 목소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지수의 마법은 이를테면 남이 개척한 길을 그대로 따라 걸은 것에 불과했다.
문자로 배운 지식과 노하우. 다른 사람이 고안해낸 구조를 마음대로 투시해 모방한 것. 그러한 것들이었다. 어느 정도 지수의 손으로 뜯어고친 것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사용하면서 손에 익도록 개조한 것일 뿐. 요령이 좋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지수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 적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수의 모든 능력들은 전부 해석 스킬에 기반한 것이니까. ‘해석’은 이미 있는 무언가를 알아낼 수는 있어도,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의 발상으로 자신의 신경지를 개척한 전승민은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마법사라고 할 수 있었다. 순수한 재능을 따지자면 지수는 따라갈 수도 없었다. 가식이나 치장 따위는 요만큼도 섞이지 않은 본심이었다.
“아부를 떤다고 기뻐할 줄 알았다면, 너는 정말 멍청이다.”
전승민은 그렇게 말했지만, 한쪽 손을 들어 필사적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 걸 보니 사실은 상당히 마음이 요동치는 듯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입가가 경련하고 있는 게 보였다. 지수와 눈이 마주친 서중철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큼큼 헛기침을 한 지수가 본론에 들어갔다.
“아무튼, 유감스럽게도 친선전 같은 걸 하러 온 건 아니고. 협력을 부탁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원정대는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 바깥에서 강한 각성자를 찾아야 했거든요. 아무래도 조금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어서.”
아무리 이계의 침식이 가속하고 있는 덕이 있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턱걸이로라도 S급의 영역에 들어간 실력자. 각성자 리그를 제패한 콤비라고 하면 최소한의 증명은 된 것이었다. 입에서 손을 땐 전승민이 지수에게 물었다.
“S급 던전의 공략에… 증원이 필요한 건가?”
“아니요. 다른 일이예요. 사람을 상대해야 할 일.”
집행부의 업무에 가까운 일이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능력을 쓰는 것. 성격에 따라서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각성자 리그에서 싸워온 이 두 사람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인전의 경험도 풍부할 것이다. 그러자 앞에 앉아있는 서중철이 지수를 맹렬히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께는 갚아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저 같은 놈의 도움이라도 필요하시다면 어디든지 기쁘게 따라가겠습니다!”
어딜 가는지조차 듣지 않고 승낙이었다. 전승민 또한 중철이 형이 저렇게 나서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지수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어느 정도의 거래를 제시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형태로 협력을 얻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면 일단 무슨 일인지 설명해드릴게요.”
지수가 하려는 일은 어떤 비밀스러운 집단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꼬리는 잡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구성과 인원,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상황을 커버할 수 있도록 동행할 협력자들이 몇 명 필요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여왕을 숭배하는 컬트 교단. 이 또한 루드비히의 수기에 쓰여 있는 메모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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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도들>
그들은 말하자면 여왕과 주파수가 딱 맞는 인간들이다. 이계의 침식 그 자체를 대단히 민감하고 선명하게 느낀다.
광신도들의 대부분은 그리 좋지 못한, 시궁창 같은 인생을 보내고 있던 자들이다. 애초에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 세계를 마음속 깊이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침식을 거부반응 없이 백 퍼센트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청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음향의 노이즈를 금방 알아차리는 것처럼, 그들은 여왕이 무언가에 봉인되어있다는 걸 어느 순간 눈치챌 것이다. 그걸 알아채면 여왕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르겠지. 그들은 마약 중독자와도 같기에, 이계의 침식이 더욱 자신을 갉아먹길 원한다.
어느 정도 조치는 취해뒀지만, 침식의 밀도가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광신도들이 나타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각한 자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골치 아픈 사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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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엄밀히 말해 각성자조차 아니었다. 각성이라는 것은 현대의 인간이 다른 세계의 힘에 눈을 뜨는 것. 하지만 그들은 현대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애초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 세계 부적응자가 짙은 이계의 침식에 노출되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모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인’이라고 불러야만 했다.
지수가 민감한 부분은 적당히 건너뛰어 가며 이번 일에 대해 설명했다. 광신도들의 집회에 대해선 매드 티 파티에 무언가 짚이는 부분이 있는지 계속 주시해달라 부탁했고, 이미 그 단서가 어느 정도 잡혀있는 상태였다. 지금 박멸해야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야.’
오로지 여왕의 해방만을 위해 움직이는 마인들의 교단. 각성자들의 세력 구도가 어느 정도 분열된 상태였다면, 견제 따위 상관하지 않고 날뛰는 그들이 국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미 각성자 사회의 거의 모든 세력을 지수가 꽉 잡고 있었으니까.
'S급 던전 공략만 해도 골 아파 죽겠는데, 정신병자들 대응까지 하고 있어야 되면 그냥 머리가 터져버리지.’
지수가 손으로 미간을 꼬집었다. 이 세계의 부적응자들. 여왕과 주파수가 맞는다는 그놈들이 모여 귀찮은 일을 획책하기 전에, 애초에 뿌리부터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원정대에서 잠깐 손을 떼어놓아도 될 시간을 만든 것이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다시 S급 던전 공략을 하러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쉴 수는 없었다. 지수는 스스로가 참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생님이랑 같이 싸우는 건 그때 이래로 처음이네요!”
“흥. 내 신기술을 보면 놀라 자빠질걸.”
전승민과 서중철은 놀이공원에라도 놀러 가는 듯한 기색으로, 빨리 싸우러 가자는 듯 지수를 다그치고 있었다.
지수는 진심으로 두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 느긋하게 방에서 책이나 읽으며 지내는 걸 좋아하는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