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진격하고 또 진격하라 (3) >
원정대의 구성이 대강 정해졌다.
지수와 서민하 두 사람이 특공대. 백묵과 허다인이 앞서나가는 길을 뚫는 역할, 정유현과 오성화는 다른 S급 헌터들을 통솔하며 전선을 구축해나가는 역할이었다. 그 결정에 S급 헌터들의 반발이 있었다. 지금 남자가 지수를 독대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폭검 저 남자는 괜찮아.”
덩굴로 몸을 감싸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B급에 올라왔을 때부터, 전대미문의 천재 검사라고 우리들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지. S급까지 올라온 것도 이상할 게 없지. 현역으로 계속 던전을 돌고 있었으니, 현장에서의 감각도 우리보다 날카로울 테고. 하지만.”
말을 끊은 남자가 찌릿하고 지수를 노려보았다.
“정유현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우릴 통솔시키겠다니. 대체 무슨 농담이지?”
“농담 같은 거 아닌데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우리들 정도의 경지에 다다르면 추앙하는 가치는 하나 뿐이야. 순수한 강함. S급 헌터들에겐 한 시대의 최강으로서 가진 긍지란 게 있다. 저런 어중이떠중이 밑에서 명령을 들으며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어. 이건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인 S급들 전체의 의견이다.”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이 무언가를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추앙하는 가치가 강함 하나뿐이라고? 그러면 정말로 아무 문제도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썹을 찌푸린 남자가 말했다.
“알고 있어. 당신은 당신대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겠지.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인가? 그러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최소한 말을 듣는 척쯤은 해줄 수 있으니. 아무튼 이대로는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어.”
“늑대… 아니. 정유현 씨는 그런 이유로 뽑은 게 아닌데요.”
그러자 덩굴의 남자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설마 당신과 친한 순서로 뽑기라도 했나?”
“제일 세니까 뽑은 거예요. 누가 돌발행동을 하면 곧바로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 만큼. 싫다는 거 앉히려고 사정사정을 했구만.”
“진지하게 대답해라! 나는 지금 당신과 말장난이나 하러 온 게 아니야. 하는 말뜻이 그렇게 알아듣기 어렵나? 난 그런 짐덩이를 지켜주면서 싸우긴 싫다는 뜻이다!”
짐덩이는 개뿔이. 지수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생각했다. 사실 지금은 사소한 문제 따위 다 무시하고 돌진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런 귀찮은 해프닝들에 하나하나 대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한번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갈 필요 자체는 있어 보였다.
지수가 만나본 S급들의 인상이 그러했다. 속에 내가 최고라는 자존심만 꽉꽉 들어차 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트러블을 일으키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통솔하는 역할의 사람이 그들을 정면에서 완전히 꺾어버리면 된다.
정유현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한 번 수고해줄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앉은 지수가 덩굴에 감싸인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면 불만 있으신 헌터분들 중에서 대표자를 한 명 정해주실래요?”
“뭐라고?”
”그쪽이 말하는 ‘제일 강한 사람’으로요."
***
사람들이 모여있는 건 불식 길드의 대련장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시키는군.”
박사도 참 사람 다루는 게 거칠어. 넓은 공간에서, 정유현이 조용히 제복 매무새를 다듬었다. 대련장의 관전석, S급 헌터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정유현이 S급 헌터에게 일방적으로 깨져버리는 꼴을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관중석 한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멋있어 보이려고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해라 너!”
그곳에서는 오성화가 팝콘까지 사 와서 선글라스를 낀 채 구경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는 것은 김혜성이었다. 김혜성은 이 승부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눈을 빛내며 관찰하고 있었다. 김혜성이 오성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대장은 이 승부 어떻게 봅니까?”
“뭘 어떻게 봐? 저 사람 S급 중에서도 좀 강한 편이라며.”
그러면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 오성화가 팝콘을 씹어먹었다. 그리고 대련장의 한쪽 끝, 덩굴에 감싸인 남자가 말했다.
“이봐. 그냥 항복하는 게 어때? 누구 하나 다쳐서 실려 나가기 전에. 이런 짓을 하는 데에 의미가 어디 있지?”
“동감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정유현이 말했다. 정말, 이렇게 아군끼리 싸우는 것에 의미 따위는 없어 보였다.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항복해줄 수는 없었다. 이 싸움이 필요하다고 박사가 판단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유현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사양하지.”
“그래. 그렇게 악몽을 꾸고 싶다면야.”
그리고 덩굴에 감싸인 남자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흉측하게 생긴 거대한 나비들과, 기괴한 형태의 식물들. 팔다리와 입이 달려 있는 움직이는 나무 괴물. 소환술사인가? 눈썹을 찌푸린 정유현은 이 주변이 문득 더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이 싸우게 될 테니 알려주지. 내 능력은 온갖 벌레들과 꽃, 식물을 다루는 것. 물론 너도 알겠지만 보통의 식물들은 아니야. 내가 싸우는 전장은 적의 생명을 양분으로 하는 정원이 된다.”
나타난 식물은 상대방의 마력을 빨아먹는 가시덩굴들을 촉수처럼 흔들었다. 상당히 기분 나쁜 외형이었다. 이레귤러 클래스 ‘정원사’. 그는 S급 헌터들 중에서도 한층 이질적인 각성자였다. 적어도 능력이 파악당하지 않은 초전에서라면 대부분의 S급들을 거의 확실히 이길 수 었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나왔다.
“정원이라.”
정유현이 천천히 시선을 이동하며 식물들을 관찰했다. 끈끈이, 흡혈, 독 안개, 마비 포자. 지금 겉으로 훑어보기만 해도 상당한 능력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교적 만능에 가까운 힘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겠지. 정유현이 칭찬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유용할 것 같지만, 일대일 승부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군.”
“뭐라고?”
“어느 쪽이냐 하면 보조 계열이야.”
그 말에 덩굴로 몸을 감싼 정원사가 발끈했다.
“뭘 안다고 잘난 듯이 떠들고 있어…! 바보 같은 놈, 내 정원은 오히려 한 명을 옭아매는 데에 특화된 능력이다!”
이거 큰일 났군, 하고 관중석에 앉아있는 헌터가 입맛을 다셨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정유현이라는 저 남자 말이야. 하필이면 정원사의 식물들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어. 저놈은 자기 식물들에 정신병 수준으로 애착을 갖고 있어서, 그런 말을 들으면 반쯤 이성을 놓아버린다고. 정말로 미라가 돼서 죽을지도 몰라.”
그 말에 S급 헌터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정원사에 대한 흉악한 소문들은 익히 들어보았다. 그 마녀들에 버금갈 만큼 미친 각성자라고. 그들이 긴장해서 자신의 무기를 꽉 쥐었다. 유사시에는 뛰쳐나가 정원사가 정유현을 죽이지 못하게 제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정유현이 말했다.
“준비가 다 됐으면 이제 시작해도 되겠나?”
“아직도 태연한 척이라니. 배짱 하나만큼은 봐줄 만하군.”
정원사가 거칠게 손을 쓸어올리자, 기괴한 소리를 내며 식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싸움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수십 갈래로 나누어진 덩굴은 한 번이라도 잡히는 순간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양분을 빨아먹는다. 온갖 포자들과 독, 체액들은 적이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더욱 옭아매겠지. 큭큭큭 웃음을 터뜨린 정원사가 말했다.
“너는, 빠져나갈 수 없는 악몽을 꿔본 적이 있나?”
표정이 위험했다. 정원사는 정유현을 완전히 불구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그리고 식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정유현 또한 조용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정유현의 손등에 연보라색 회오리처럼 기운이 모여든 것은 눈 깜빡할 사이였다. 그것과 동시에, 관중석에 있는 모든 S급 헌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꽈지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식물들이 땅바닥에 짓눌렸다. 휩쓸린 건 정원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끄악…!"
비명조차 제대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준비 동작도 거의 없는 한순간. 저만한 범위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 위력은 단지 움직임을 멈추도록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압박 그 자체로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내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정원사 본인 또한 초인 수준에 이르른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압박을 풀어헤치기는 커녕 꼼짝조차 할 수 없었다.
“미안하군. 식물들만 제압하기엔 내 컨트롤이 아직 미숙해서. 이래서 아군이랑 싸우는 건 싫다고 했는데.”
꽈득, 꽈드득. 너무 큰 압력에 땅바닥이 밑으로 파여갔다. 나무 괴물은 갈라졌고 거대한 나비는 체액을 쏟아내며 짓눌렸다. 기괴한 형태의 식인식물은 덩굴 하나 움직이지 못한채 바닥에서 경련하고 있었다. 폐가 압착되어 쪼그라든다. 정원사는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압박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런 상태로는 뭘 할 수도 없다. 이게 대체 뭐지? 정원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주기에 뭐 하는 멍청이인가 했는데, 단 일격으로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일대일 승부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군.’
바닥에 납작하게 처박혀 있는 정원사는 그렇게 말한 정유현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원사의 능력이 단체전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타입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즉, ‘나와의’ 일대일 승부에는 적합하지 않다.
혼자서 나와 싸우겠다니 가당치도 않다. 적어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네가 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였던 것이다.
관중석의 S급 헌터들 사이에서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원사는 실제로 그들 중에서 상당히 강한 편에 속하기에 대표자로 뽑힌 것이었다. 그런 정원사를 싸움이 시작되고 몇 초 만에 일격으로 마무리했다.
‘괴물이다.’
인식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는 S급 중에서도 최상위. 육영웅 급의 각성자였다. 저만한 남자가 집행부인가 하는 곳에서 협회의 개로 일한다는 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오직 오성화만이 태연하게 팝콘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는 김혜성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 사람 원래 저렇게 셌대요…?”
“말했잖아. 저 사람 S급들 중에서도 좀 강한 편이라며? 그냥 ‘좀’ 강한 정도로는 쥐포장수랑 싸움이 안 되지. 능력만 센 게 아니라 전투 센스도 천재적인, 그래. 한 나 정도는 되어야 승부가….”
김혜성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오성화를 무시했다. 그렇다 해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물론 집행부의 늑대가 무시무시한 각성자라는 건 알고 있고, 협회장과의 싸움에서 한층 더 강해졌다는 것 또한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지막지했다. 완전히 괴물이었다.
순수 마법사가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영창해서 발동하는 중력 주문 수준의 화력을, 정유현은 손 하나 까딱 드는 것만으로 1초 만에 발현시키고 있었다. 김혜성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준비 동작을 보자마자 블링크로 거리를 벌린다고 치면, 발동 전에 저 능력의 범위 바깥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싸웠을 때 십중팔구는 이쪽의 패배로 끝날 것이다. 한 번이라도 잡히면 중력에 발목을 잡혀 쥐포 신세. 공중에서 처박히면 그만큼 타격도 클 것이다.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김혜성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대련장에서 정유현이 능력을 풀고 걸어갔다.
“이걸로 납득은 됐겠지.”
소환된 식물들이 전부 사라졌다. 정유현은 쓰러져있는 정원사에게 손을 내밀어서 부축했다. 정원사 또한 S급 헌터였다. 분명 큰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곧바로 전투불능이 되지는 않았다. 정유현의 손을 잡은 정원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면 당신 혼자서 다 정리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관중석에서 바라본 헌터들은 제대로 느끼지 못했겠지만, 몸으로 직접 겪은 정원사는 알 수 있었다. 이 정유현이라는 남자의 능력은 불합리한 수준에 이르러있었다. 심지어 아직 전혀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어느 정도 힘조절을 한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불가살이 백묵과 무당 허다인 또한 비슷한 수준의 괴물일 것이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S급 던전인지 뭔지는 몰라도 S급 헌터들을 이렇게 모이게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정원사의 말에 정유현이 쓴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
“무슨?”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강해져버려서. 저 정도면 저 아이 혼자서 다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강함의 저 건너편에 있는 존재. 정원사와 달리, 정유현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육영웅 따위가 아니었다. 정유현이 지켜내지 못해 괴물이 된 소녀와, 정유현을 지켜내기 위해 괴물이 된 청년. 그 두 사람은 지금 정유현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다다라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책이나 읽고, 노래나 부르며 안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전에 없는 위기가 다가온 지금, 그들은 쉬지도 못한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단지 너무 강해져버렸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대신할 수 있었다면 백 번은 대신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유현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나라도 옆에서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줄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걸 위해서 너희들을 충분히 이용할 생각이다.”
“이용이라니….”
“네 식물들이 탐난다는 이야기다. 도움이 될 여지는 충분히 있어. 이후 협조하도록.”
걸어가는 정유현의 눈동자에는 확고한 결의가 깃들어있었다. S급 헌터가 된 뒤, 무료함에 빠져서 기행이나 일삼고 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어쩌면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있기에, 이만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정유현.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곱 번째 영웅. 침을 꿀꺽 삼킨 정원사가 정유현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리더!”
“...리더?”
그것은 누군가에게 강요당한 게 아니라 정원사가 스스로 표시한 경의였다. 이 사람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에 더 이상 불만은 요만큼도 없었다. 다른 S급들이 뭐라고 불만을 지껄인다면 자신이 찍어눌러버릴 것이다. 그리고 관중석에 앉아있는 오성화가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빨리 끝냈잖아! 보는 사람 생각은 안 해?”
기대해서 가득 채워온 팝콘은 아직 반도 먹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