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23화 (123/176)

123화.  < 진격하고 또 진격하라 (2) >

S급 헌터들이 이렇게나 모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곳에는 권성이 있었다. 검제가 있었다. 대낫을 어깨에 매든 사신이 있었고, 함선을 이끄는 선장이 있었다. 산 너머의 표적을 쏘아 맞히는 명사수도, 수십 수백 자루의 검 사이를 걸어도 상처 하나 나지 않는 불굴의 성기사도 있었다.

이 시대의 최강이라는 단어를 대표하는 면면들. 처음 대전쟁의 시작된 땅인 대한민국의 헌터들 말고도, 이런저런 나라들의 S급 헌터들 대부분이 이 자리에 집결해있었다. 외부와 최소한의 연락을 취하고 있는 S급들은 전부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느님 맙소사. 여기 있는 양반들이 전부 힘을 합치면 세계정복도 꿈이 아니겠군.”

의자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그 몸에는 가시덩굴들이 둘둘 휘감겨있었다. 그 또한 모국에서는 악몽의 정원사라 불리며 두려움받고 있는 헌터였다. 마녀들에게 부름받았을 때만 해도 발푸르기스의 밤에 초대해주는 건가 싶어 흥분했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좋은 건수는 아닌 것 같았다.

정원사의 말을 들은 다른 남자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말하니 농담처럼은 안 들리는데?”

“농담 같은 거 아니니까.”

정원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열 명이 될까 말까 하는 숫자였지만, 그들 전부가 가진 전투력에 있어서도 세력에 있어서도, 단순한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S급 헌터 전원이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때 이루어내지 못할 일은 거의 없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중년인이 말했다.

“나는 던전에 간다고 들었는데.”

“그건 당연히 그냥 하는 말이지. 던전 한 번 가자고 이 사람들을 다 불러? 포크레인으로 소꿉놀이를 하자고 하는 게 덜 황당하겠군.”

말하기를 이곳 길드의 이름은 용궁이라고 했다.

사실 길드라고 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막 만들어진 신생 길드에다, 구성원은 길드 마스터 단 한 명뿐. 그럼에도 근본도 없는 풋내기가 왜 귀찮게 하는 거냐고 짜증을 낼 수는 없었다. 그만큼 상황은 이질적이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백묵이 이끄는 불식, 무당이 이끄는 누각, 마녀들의 집회인 발푸르기스의 밤. 세계 최강의 헌터 길드라고 할 수 있는 그 3개의 세력이, 바로 며칠 전 만들어졌다는 신생 길드인 용궁과 함께하고 있다. 자그마치 동맹도 아닌 산하 길드로서. 이상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세 길드가 작당해서 합병이라도 한 건가?”

헌터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섬뜩한 가정이었다. 그런 것이 정말로 실현되어버리면, 세력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독주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S급 헌터들을 이렇게 모은 이유가 그 새로운 길드에 길드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함이라면?

“...정말로 세계정복을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군.”

모여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권성 또한 눈썹을 찌푸렸다. 사실 방금 직인들에게 끌려가 치수를 재고 오는 길이었다. 길드원 제복이라도 맞춰주려고 하는 건가? 아직 들어가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물론 저쪽에서 자신의 실력을 원한다면야 기꺼이 가입해줄 수 있지만.

“그런데 길드장은 누구야?”

누군가 꺼낸 한마디에, S급들이 다시금 쑥덕이기 시작했다. 합병설이 사실이라면, 조직의 톱은 누가 차지할 것인가. 누각과 불식, 그리고 발푸르기스의 밤. 육영웅이 두 명. 마녀들 또한 S급들 사이에서 흉악하다 소문이 자자한 각성자들이었다.

“백묵 씨 말고 누가 있어? 그 사람은 격이 달라.”

“하. 네가 무당님을 못 만나봐서 그러나 본데.”

“생각해 봐라. 애초에 마녀는 네 명이다. 1대 1대 4야. 길드의 수장이 나온다면 똘똘 뭉친 마녀들 사이에서 나오는 게 당연하겠지.”

누구보다도 한 시대의 정점에 가까운 그들이기에, 최강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가열찼다. 하지만 다들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을 최강이라 지지했고, 조금 있으면 싸워서 결정하자고 시비까지 붙을 판이었다. 그렇게 S급 헌터들의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을 때, 한쪽에서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정유현도 여기에 있더군.”

"응?"

"일곱 번째 영웅. 들어본 적 없나?"

좌중이 조용해졌다. 정유현이라는 이름은 그들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헌터 협회에서 내전을 일으켜, 몬스터를 가지고 미친 실험을 하고 있던 당시 협회장을 스스로 숙청한 인물. 하지만 그들이 입을 다문 것은 정유현이라는 이름에 압도당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그래서 어쨌다고…?”

현역 헌터들은 대부분 던전에서 몬스터와 대치하지 않는 각성자들을 약해빠졌다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여기 모인 S급들은 그런 헌터들의 정점이었다. 정유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은 큰 사건을 해결한 각성자 경찰, 정도였다.

“뭐, 설마 걔가 길드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기가 찬다 참. 일곱 번째 영웅이라니, 그냥 뭣도 모르는 인간들이 붙여준 거잖아. 거품이라고 거품.”

“정말 그럴지 어떨지.”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그는 이전 협회장과 얽혀 잠깐 충돌해본 경험이 있었다. 한 번 부딪히고 끝난 일이었지만, 그 남자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시무시한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 협회장을 정말로 정유현이 쓰러뜨린 거라면, 적어도 S급 헌터들 사이에서도 중위권에는 들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권성이 말했다.

“흠. 그 여자아이일지도 모르지.”

떠들던 이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져 권성을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라는 말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다른 이들 또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이해한 듯했다. 그렇다. 그녀를 까먹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았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야말로 실력 테스트랍시고 와서는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꺾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S급으로서 가진 자존심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기 충분했다.

“어쩌면 육영웅에 버금갈 수준의 힘. 세 길드를 통합해 이끌 만한 실력이 그 아이에겐 있었다. 아니, 정말로 아이일지 어떨지조차 의심스럽군. 내 직감이지만, 그녀의 안쪽에서 느껴진 건 심도 깊은 마(魔)의 기척이었어.”

“저 또한 느꼈습니다. 사람이 아닌 것의 잔향을.”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렇다면 설마 몬스터라는 말인가? 어쩌면 마녀들이 육영웅과 합작해 만들어낸 최종병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웅성대는 S급 헌터들의 구석에서, 푸욱 깊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고깔을 꾹 눌러썼다.

“아주 소설을 쓰세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건 김혜성이었다. 아까부터 듣자 하니 참 가관이었다. S급 헌터라는 양반들이 참.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목표점으로 삼아 동경하고 있던 인간들인데 이제는 무슨 개그맨 집단 같았다. 김혜성이 정답을 말했다.

“용궁의 길드 마스터는, 척척박사라고.”

“척척박사..?”

“척척박사.” “척척박사…!”

반응은 크게 나눠 세 가지였다. 애초에 척척박사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그게 대체 누구냐고 묻는 의문들.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보았다, 짚이는 곳이 있다 하는 사색. 그리고 마지막은 이미 척척박사의 존재를 들어서 알고 있는 헌터들의 경악이었다.

“척척박사라면,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라는 그…?”

“그래.”

“분명히 정체를 꼭꼭 숨기고 있는 중이라고 했을 텐데.”

“영원히 감추려는 것도 아닐 테고. 드디어 베일이 벗겨지려는 모양이지.”

김혜성이 기대된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모여있는 S급 헌터들의 건너편에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 방에 들어온 청년이 중앙의 의자에 앉았다. 양옆에 서서 청년을 지키고 선 것은 정유현과 오성화였다. 자리에 앉은 지수는, 조용히 무릎 위의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체셔 고양이의 형태를 한 재버워키였다.

"잘 모여주셨네요.”

잠깐 정숙이 내려앉았을 때, 한 명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헌터들이 왜 그러는 것인지 일어선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리에서 벌떡 튀어오른 김혜성은 입을 쩍 벌린 채 길드장 자리에 앉은 지수를 쳐다보았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지수가 눈을 끔뻑였다. 생각해보면 김혜성은 아직까지도 척척박사의 정체가 지수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전승민이 꾹 입을 다물고 있던 탓이었다. 지수가 오성화를 올려다보자, 나도 쟤가 모르는 줄 몰랐다, 하고 오성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김혜성은 아직도 상황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얼이 빠져있는 채였다.

“그럼 학원을 맡긴 것도. 허. 말도 안 돼….”

양손으로 얼굴을 덮은 김혜성이 혼이 빠진 듯 흐느적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앞의 바닥에 무슨 몬스터의 유해 같은 것을 산처럼 쌓아두고서 지수가 꺼낸 말은 충격적이었다. S급 헌터들의 앞에 선 지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건 용왕의 시체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했다. 방금 저 양반이 뭐라고 한 거지? 모든 S급 헌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왕이라면 그 대전쟁의 악몽이었다는 용왕을 말하는 건가? 그것의 시체라면…. 보물 중의 보물이다. 결코 이렇게 가볍게 보여줘도 될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지수의 다음 말을 들으려고 귀를 활짝 열었다.

“그 용왕의 유해로 만든 장비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능을 발휘할 것은 당연한 말이고요. 뭘 숨기겠습니까. 이쪽이 실제로 만든 장비입니다.”

지수가 오성화를 가리켰다. 그는 특수제작된 양복 위에 새까만 갑주를 입고 있었다. 불식의 대장장이가 백묵의 도움을 받아, 아그리올라의 비늘을 가공해 만든 갑옷이었다. S급 헌터들의 눈에 전에 없는 욕망의 빛이 깃들었다.

‘탐난다.’

S급 헌터쯤 되면 돈에는 부자유를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이것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헌터로서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고 난 뒤에는 자신의 격에 맞는 장비를 구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었다. 웬만한 A급들도 그런데, S급 헌터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언제나 장비에 대한 갈증에 휩싸여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오히려 자신 쪽이 따라가지 못할 수준의 장비가 있었다. 자그마치 대전쟁의 용왕의 유해를 재료로 만들어진 무장. 단언할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저것보다 더 우수한 장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다…! S급 헌터들을 죄다 불러모은 이유!”

눈치챈 건가. 지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길드 자금원을 확보해야 하니 경매에 부치려는 거군!”

눈치채긴 개뿔이.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소리친 남자의 말에 S급 헌터들이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런 이야기라면 이만큼이나 S급 헌터들을 불러모은 이유도 이해가 갔다. 용왕의 유해. 그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제값을 받기는커녕 처분 자체가 불가능할 수준의 재료였다.

단순한 수집가나 부호, 사재기꾼들이 이것의 가치를 제대로 쳐줄 리가 없다. 용왕의 유해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그 유해를 장비로 가공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S급 헌터들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S급 헌터들을 소집한 거라면, 멋지게 들어맞았다.

“도, 돈은 얼마든지 내겠어! 나한테 팔아줘!”

“웃기지 마! 순서를 지켜!”

“누가 더 센지 한 번 겨뤄볼까, 자식아!”

“나, 나는 무기나 갑옷에 의지할 생각은 없지만…저런 것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들어가서야 곤란하겠지!”

헌터들은 엉망진창 소리 지르며 다투기 시작했다. 한 세대를 대표하는 최강자들의 모임치고는 상당히 체면을 구기는 광경이었다. 순간, 지수가 몸에서 가볍게 마력을 발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이질적인 마력의 기척. S급 헌터들은 그 기세에 움찔하고 휙 지수 쪽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모은 지수가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말했다.

“무슨 착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용왕의 시체를 판매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지금은 그런 느긋한 짓을 할 때가 아니었다. 움직이기 위한 자금 따위는 매드 티 파티의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원조받을 수 있었다. 이미 돈을 확보하는 것 따위가 중요한 단계는 한참 지나있었다.

지수의 말에 S급 헌터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렇다면 설마 그냥 자랑이나 하려고 부른 것인가? 아니면 우린 이런 것도 가지고 있으니 대적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위협? S급 헌터들과 눈을 마주친 지수가 입을 열었다.

“그냥 드릴 생각입니다.”

“뭣…!”

“그것도 각 개인에 맞춘 주문 제작으로요. 물론 공짜는 아니고, 이쪽의 요구 한 가지를 들어주신다면. 여러분들께도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헌터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요구가 무엇이든, 엄청나게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들어주어야만 했다. 용왕 소재의 무장. 저울 한쪽에 걸려있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시선을 읽은 지수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은 모든 S급 던전을 격파할 생각입니다. 제 지시에 따라서 원정대에 참여해주세요.”

그것이 전부였다. 여왕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아그리올라의 시체 따위 통째로 쓰레기 소각소에 갖다 버리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사실 그들에게 큰 도움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잡졸들의 발을 묶어만 두고 있어 주면, 전부 이쪽에서 끝낼 것이다. 문제는 그런 발묶기 역도 S급 헌터 수준이 아니면 감당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대체 불가능한 중요한 전력이었다. 이쪽에서 장비를 퍼줘서라도 한 명도 죽지 않게, 쓸모 있는 수준까지 역량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지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거절하실 분들은 지금 떠나주세요.”

물론, 떠나면 힘으로 무릎 꿇려서 말을 듣게 할 테지만. 지수가 잠깐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야기가 재미있게 됐다는 웃음. 호승심. 욕망. 상승욕구. 모여있는 S급 헌터들의 눈동자는, 전에 없는 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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