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22화 (122/176)

122화.  < 진격하고 또 진격하라 (1) >

지수가 둥지 안에서 두루마리를 펴들었다.

망령왕의 무덤에서 손에 넣은 라이프 베슬 스크롤. 그 내용은 자신의 혼을 일부 뜯어내 특정한 사물에 이식시키는 주문이었다. 그렇게 라이프 베슬을 만들면 한 번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영혼 조각을 이용해 부활의 기회를 기다릴 수 있었다.

분명 대단한 주문이었지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혼을 찢어서 사물에 넣는다는 행위는 영혼에 큰 손상을 입힌다. 라이프 베슬 주문을 사용해 의사적인 불사자가 되면, 그 대가로 몸이 끊임없이 썩어들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리빙 데드, 리치가 되는 주문이었다. 굳이 싸우다 죽는 것을 걱정하지 않더라도, 수명 문제가 진지한 고민으로 다가올 즈음이 되면 라이프 베슬을 만드는 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지수는 이 창창한 나이에 남은 인생을 살점이 다썩은 꼴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수가 라이프 베슬 주문을 해석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수술을 위해서였다. 감정적인 면에서도 효율 면에서도, 자신의 혼에 달라붙어 있는 밴더스내치를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밴더스내치 또한 단순한 영체가 아니라 실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왕님, 나랑은 그냥 장난이었던 거야?>

"......."

<단물 다 빨아먹었더니 이제는 나가떨어지라는 거지! 너무한 거 아니야?>

“입 좀 다물자.”

지수가 집중한 채 스크롤에 쓰여있는 술식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자, 옆에서 밴더스내치가 연신 조잘댔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밴더스내치 또한 썩 기꺼워하는 기색이었다. 그야 남에게 기생하는 것처럼 붙어 살아가는 건 그녀로서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게 한숨을 쉰 지수가 두루마리를 다시 덮어놓았다.

작동 방식은 대충 파악했다. 라이프 베슬 주문은 결코 마법사로서 지수의 수준을 뛰어넘는 영역에 있는 주문이 아니었다. 해석 능력을 사용해 구조를 파악한다면 스스로 사용할 수 있게 익히는 건 간단했다. 지수가 작업 테이블 위에 용린의 만년필을 올려놓았다.

<이건 왜?>

“네 몸이야.”

그 말에 밴더스내치는 무슨 농담을 하는 거냐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지수는 진지했다. 밴더스내치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용린의 만년필에 쓰인 소재는 용왕 아그리올라의 유해. 혼과 그릇의 적합도 또한 가장 발군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밴더스내치가 소리쳤다.

<펜? 지금 나 보고 펜이 되라는 거야!>

“작은 용이라 말하지 못할 것도 없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만년필이 용으로 보이는데?>

“겉면은 용의 비늘로 둘러싸여 있고, 안에는 잉크 대신 용의 피가 흐르지. 마력을 넣으면 입에서 불꽃도 뿜어낸다고.”

밴더스내치는 어이가 없다며 계속 뭐라뭐라 떠들었지만, 지수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이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다. 완전한 용왕이 된 지금에 와서도 밴더스내치의 보조는 충분히 쓸모가 있었다. 그녀의 혼을 봉입한다면 언제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무기에 담아두는 것이 맞았다.

지수가 눈을 감고 자신의 영혼을 감지했다.

성녀에게 가르침받은 영혼시.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밴더스내치와 자신의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절제해내야 한다. 까딱하면 자신의 영혼에 손상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라이프 베슬의 주문을 발동한 지수는 조심스럽게 주문의 범위를 조절하며 밴더스내치의 영혼을 떼내었다.

그 다음 단계. 분리된 영혼의 조각을 사물에 이식한다. 전개한 주문에 마력을 불어넣자 밴더스내치의 혼이 용린의 만년필 안에 안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주문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에고 웨폰 밴더스내치의 탄생이었다. 만년필이 혼자서 달각댔다.

<에고 소드도 아니고 에고 펜슬이라니….>

"일단 테스트. 흘려 넣는 주문들을 증폭시켜봐."

<네, 네. 분부대로.>

일어난 지수가 용린의 만년필을 손에 쥐고 룬을 몇 개 그려보았다. 펜촉 끝에서 빛과 함께 마력이 쩌렁쩌렁 터져나갔다. 확실히 예전과 달리 별도의 과정 없이도 발현된 주문에 밴더스내치의 기운이 느껴졌다. 상당한 전력 강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력 강화라고 한다면, 변화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지수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가렸다.

‘심상해석.’

지금은 발현하고 있지 않았지만, 현상해석처럼 원한다면 언제든지 발동할 수 있다는 실감이 확실하게 있었다. 겉면에 드러나지 않은, 본질과 속내를 읽어내는 힘. 이것이 있다면 어떤 적이 온다고 해도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질 일은 없었다.

<그건 웬만해서 안 쓰는 게 나을걸.>

말한 것은 만년필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르듯 나타난 밴더스내치의 영체였다. 밴더스내치 또한 지수의 안에서 김유성과 있었던 일들을 전부 보고 있었다. 심상해석을 발동했을 때의 지수의 실감 또한 함께 느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던 점들이 있었다.

<그건 심안이 아니야. 왕님이 용사의 심안을 해석했을 때, 이것과 똑같은 기능을 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한 결과 발현된 물건이지. 언뜻 보기에 효과는 비슷해 보여도 작동 원리는 전혀 다를걸. 당연히 부작용도 있을 테고.>

밴더스내치의 말에 지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심상해석을 써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이라면 지금도 상당히 떠올릴 수 있었다. 단순한 기력 문제는 둘째 치고서라도, 너무 많은 정보의 포화로 머리에 부하가 걸릴지도 모른다는 점. 남용하다간 다른 사람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구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 그것 말고도 많았지만, 대부분이 정신적인 문제들이었다.

김유성은 그런 문제들을 코웃음치며 무시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용사의 축복으로 인해 언제나 최적의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수는 달랐다. 이 모든 위험들은 오로지 지수가 스스로 감수하고 커버해야 했다.

‘정품이 아니니까 오류가 많아도 어쩔 수 없다는 건가.’

그리고 콧숨을 쉰 지수가 말했다.

“그래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용하겠어.”

위험할 수 있다느니 하며 물불 가리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언제 여왕이 풀려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둥지에서 돌아오자 지수의 책상 위에 새까만 왕관이 놓여있었다.

훅마녀에게 받은 것이었다. 망령왕의 무덤에서 발견한 S급 던전의 유물. 모든 언데드들을 지배하고, 죽인 적을 유령으로 사역하는 언데드 로드의 다이어뎀. 본격적으로 S급 던전들의 공략을 시작하려는 지금, 이런 물건을 단순히 구석에 박아놓을 수는 없었다.

지수가 책상 위의 왕관을 쓰자 밴더스내치가 말했다.

<멋지네. 원래 왕한테는 왕관이 필요한 법이지.>

주머니에 끼워넣은 만년필에서 웅웅대며 음성이 들렸다. 지수는 고개를 돌렸다. 확인하자 정유현과 오성화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이제는 행동에 나설 시간이었다.

***

모든 사정을 설명한 뒤, 두 사람이 보인 표정의 차이는 극명했다.

“그렇구만. 그래서 누각이랑 우리 보스가….”

오성화의 경우엔 무언가 상쾌하게 납득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민감한 부분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여왕이 지금껏 몇 개의 세상을 먹어 치워온 괴물이라는 부분은 제대로 설명했다. 그런데도 오성화는 별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수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이면 꼴 사납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반면 정유현은 머리가 복잡하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잠깐만 이야기를 정리하고 쉴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지수가 오성화를 쳐다보았다.

“별로 안 놀라는 기색이시네요.”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거 아니야. 엄청 센 몬스터가 있어서 그걸 못 죽이면 전부 다 망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하루 빨리 강해져야 한다.”

오성화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분명 뼈대는 그러했지만 요약해도 너무 요약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여왕을 몬스터라고 분류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흥미로운 사색거리였지만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있을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오성화가 가슴을 팡팡 두들기며 말했다.

“아무튼 던전행은 맡겨두라고. 그건 이쪽 전문이니까.”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쪽은 충격 때문에 전의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각오하고서 밝힌 진실인데, 오성화는 완전히 평소 페이스 그대로였다. 상대가 강하다면 이쪽이 더 강해지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인가. 그건 상쾌할 수준의 미소였지만, 지수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지수는 여왕의 본질에 대해 끔찍할 만큼 알고 있었다.

“...솔직히, 당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군.”

정유현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더없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봉인에 잠들어있던 여왕. 봉인을 만들어낸 마왕과, 봉인의 말뚝이 된 용사. 용사의 소실. 여왕의 정체. 코앞까지 닥쳐버린 위기.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소화하는 것조차 벅찰 것이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정유현이 지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박사 너는 일을 과장해서 떠드는 성격은 아니지. 남들이 걱정하지 않게 꽁꽁 숨기면 또 모를까. 그렇다면 정말로, 예전 협회장 따위는 귀엽게 보일 정도의 위기군.”

정유현의 표정에서는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다행히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듣고 체념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은 듯 싶었다. 오히려 진지하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한다. 어떤 때에도 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정유현은 그런 인간이었다. 테이블 위에서 꽉 주먹을 쥔 정유현이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겠군. 박사 너한테 최대한 협력하는 수밖에. 집행부를 움직이기 위해선 다소 억지를 부려야 되겠지만, 애초에 절차를 하나하나 밟아가는 조직은 아니었으니.”

“길드 창설 신청은 처리됐나요?”

“그래. 접수원은 D급 헌터가 길드를 차리려 한다고 한바탕 웃었다만…너라면 자격 심사 같은 귀찮은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지. 신청서를 받자마자 병정이 협회장 직권으로 바로 결재했다. 이미 행정상 정식으로 등록돼있어.”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지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당면한 목표는 최단기간 내에 모든 S급 던전을 돌파하는 것. 유사시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할 수 있게 관련 권한자들을 장악해놓아야 했다. 그런 면에서 헌터 협회의 협회장인 김도형과 정유현은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오성화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새로 만들었다는 길드 이름은?”

“<용궁>이에요.”

지수가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용왕이 군림하는 궁전. 목적이 목적이니, 길드의 이름은 최대한 위압감 있게 짓는 것이 좋았다. 그래야 압박할 때 상대 쪽에서 주눅이 들 테니까. 이제부터는 초강수만을 두면서 끊임없이 전진해나가야 했다. 하지만 오성화와 정유현의 반응은 지수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용궁? 그거 토끼와 자라에서 나오는 거잖아.”

“꼭 중국집 이름 같군.”

혹시 이름을 잘못 지은 건가? 지수는 반쯤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응접실과 같은 방 안. 새까만 도복을 입고 있는 사내가 서있었다. 사내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혀를 차며 말했다.

“꼬맹이. 이건 대체 뭐 하자는 농담이지?”

지수는 자리에 앉은 채 말없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권성’이라 불리는 외국의 S급 헌터였다.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협력이 필요하니까. 눈앞의 권성 뿐만 아니라 연락이 닿는 S급 헌터들은 전부 호출시킨 상태였다. 호출에 응하지 않는 이들을 제압해 데려오려 나간 인원도 있었다.

“내가 여기 온 건 백묵 그사내의 부름이었기에 그런 거다. 육영웅이라는 살아있는 전설에 나름대로 경의를 표한셈이지.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도 끝났군. 영웅도 노망이 들어버린 모양이야.”

권성의 몸에서 격렬한 기세가 터져 나왔다. 순수한 살기 뿐만이 아니라 내공 또한 담고 있는 압박이었다. 웬만한 각성자들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쉴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태연하게 펜으로 무언가를 적어갔다. 작성하고 있는 건 평가지였다. 꽉 이빨을 깨문 권성이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일단 가보면 알 거라더니, 알려준 장소에 앉아있는 건 누군지도 모르겠는 꼬맹이 하나. 그러고서는 꺼내는 말이. 던전에 갈 테니까 협력하라고? 그 전에 간단히 실력 테스트를 해보겠다고? 개소리는 너희 집 강아지랑 놀아줄 때나 지껄여라!”

사내가 일갈해도 지수는 들은 체 만 체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멀쩡한 척을 하고 있어도, 이 정도 기로 압박하고 있으니 놈의 속은 타들어가는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나이 치곤 훌륭하다 평가해줄 수 있었다. 혹시, 백묵의 제자인가? 이내 지수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꺼낸 말은.

“혹시 지금 이게 최대출력이에요?”

그것은 권성의 꼭지를 돌아버리게 하는 데에 충분한 말이었다.

이게 최대출력이냐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주제도 모르고. 그렇게 원한다면 진짜 최대출력을 보여주마, 갈! 노호성을 토한 사내가 몸 안의 기를 집중시켜 끌어모았다. 이 건물이 통째로 부서져도 상관없다. 그런 생각으로 발한 기공이었다. 쿠구구궁. 심상치 않은 힘에 바닥이 통째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뼈가 으스러진 다음 후회…!”

“네 거기까지.”

그리고 뚝.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던 건물이 조용해졌다. 책상에 앉은 지수가 한 손을 들자마자, 사내가 발하고 있던 기공이 전부 흩어져 사라졌다. 지수의 오른쪽 눈에서 황금색 안광이 흩날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해주의 비술이었다.

“음. 주먹보다는 마력을 방출해서 싸우는 타입이시고…. 주문제작할 장비는 각반에 건틀릿 정도면 되겠네요.”

권성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또한 S급이라는 경지에 이른 헌터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는 아니었다. 방금 눈앞의 청년은 운용되고 있는 자신의 기에 개입해, 강제로 틀어막아 가라앉혔다. 결코 애송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애송이 또한 적어도 S급의 초입 정도에는 다다른 상태일 거라고 확신했다.

권성이 웃었다.

“그런가. 너는 백묵과 싸우기 위한 ‘관문’인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 인간답군. 너를 쓰러뜨려야 만날 수 있다…그런 거겠지?”

자세를 다잡는다.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 권성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오래전의 기억. 예전에 백묵을 만났을 때, 자신은 그의 갑옷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권성이 된 지금은 어떨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앞의 청년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걸 받아봐라!”

몸 안의 내공으로서 자연지기를 재현한다. 불타는 마력이 권성의 주먹을 둘러쌌다. 한 사람의 권사로서, 지금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 얻은 깨달음. 모든 기의 흐름을 자신의 의지로 제어해, 극점에 다다랐을 때 나선으로 회전시킨다. 충돌하는 기세와 함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업화를 날려보내는 일권. 그 오의의 이름은.

“권성오의- 패왕열풍권!”

그렇게 권성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든 순간, 지수와 권성 사이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난입한 것은 한 명의 여자아이였다. 놀란 권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급히 주먹을 거두려했지만, 이미 날아가버린 패왕열풍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각오를 담아낸 주먹이었다. 그리고 충돌. 참상을 예감한 권성은 눈을 질끈 감고,

치이익.. 하고, 열기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패왕열풍권을 막아낸 것은 여자애의 손바닥이었다. 새하얀 손바닥에는 작은 그을음 하나 생기지 않았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 소녀는, 권성을 쳐다보지조차 않고 있었다. 마치 지나가려다 부딪히려는 사람을 손으로 가볍게 제지한 듯한. 그 정도의 태도였다. 앉아있던 지수가 서민하에게 말했다.

“한 대만 쳐봐.”

그리고 순간적으로 서민하가 팔을 휘둘렀다. 권성은 재빨리 반응하여 어떻게 반대편 팔을 들어올렸으나, 그 정도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권성의 어깨에 서민하의 수도가 작렬하자, 권성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강기가 가볍게 허물어졌다. 권성은 신음을 흘리며 땅바닥에 무릎을 처박았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방어력도 좀 부족한가. 각반 말고 흉갑도 필요하겠네. 비늘보다는 뼈가 나으려나….”

“합격이야?”

“뭐 아슬아슬하게. 인재가 없네, 정말.”

솔직히 엄청 센 은거기인 한둘쯤은 나타나 줄줄 알았는데. 지수가 끙끙댔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서민하가 권성을 질질 끌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두 사람이 나간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서 들어왔다. 나타난 건 수많은 식물들의 덩굴에 둘러싸여있는 남자였다.

덩굴남이 지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또 뭐야. 마녀는 어디 있지?”

이번 사람은 제발 좀 셌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종이를 넘긴 지수는 다음 평가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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