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21화 (121/176)

121화.  < 용사님께서 가라사대 (6) >

지수가 사라지고 새하얀 세계에는 김유성만이 남았다.

“자, 그러면….”

공간의 이곳저곳에서 여왕의 기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바깥으로 나가려 날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덮고서 자고 있던 이불을 누가 갑자기 걷어내, 신경질적인 잠꼬대를 중얼거리는 느낌. 그런 것이 이 정도였다. 치솟아오른 여왕의 탁류에 김유성이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용사의 검은 모든 것을 벤다.

하지만 이미 김유성의 검은 그 예리함을 잃고 있었다. 마땅히 베어냈어야 할 흉흉한 기운은 끊어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에게 사명을 맡긴 순간, 김유성은 용사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렸다. 김유성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답이 안 보인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용사의 눈은 진실을 간파한다.

하지만 이미 심안의 안광 또한 반쯤 흐려져 있었다. 하기야 심안이 있었다한들, 분출되고 있는 여왕의 기운을 소멸시킬 방법 따위 꿰뚫어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질 것이 뻔한 싸움이었다. 검을 쥐고 있는 손바닥에서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칼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내가 떨고 있는 건가?”

용사의 마음은 꺾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김유성의 마음엔 공포가 차오르고 있었다. 저런 것과 싸우고 싶지 않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다. 여왕의 본질을 알고 있는 김유성에게, 그 본체를 마주하는 건 그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사실로서 체감했다.

하지만.

용사는 언제나 불가능에 도전한다.

억지로 칼자루를 꽉 쥐어 떨림을 멎게 만들었다. 몸에서 이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용사 클래스의 모든 능력들이 지금도 시시각각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기록을 스스로 깨뜨려 해체한 김유성의 존재 자체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용사 클래스의 권능들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어릴 적부터 김유성이 꿈꿔온 용사라는 건, 어느 날 각성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누군가가 부여해주는 이름이 아니었다.

“어떤 재앙 앞에서도… 검을 들고, 일어나 싸우는 자.”

반쯤 감겨있던 김유성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미 자신의 모든 검들을 지수에게 찔러넣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것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한 자루뿐이었다. 다시 말해 충분하다. 그리고 아래쪽으로부터 거대한 탁류가 쏟아져 올라왔다.

검을 들고 선 앞에는, 세계를 먹어치우는 괴물이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끈질긴 소고집이 바로 용사다.”

용사의 용은 용기의 용 자.

적이 베이지 않는다면 몇 번이고 다시 휘두르고, 답이 보이지 않는데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추하게 물고 늘어진다. 김유성이 몸에서 투기를 일으켰다. 자신이 주역이었던 이야기는 한참 전에 끝났지만,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퇴장해야 될 때를 모른다 불평해도 어쩔 수 없어. 젊은 녀석들이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거든.”

꺼지기 직전의 불이 가장 밝게 타오른다는 이야기일까. 그게 아니면 전에 없던 결의의 영향일까. 어쩌면 단순한 기적일 지도 모른다. 공포에 떨리는 몸을 억누른 채 여왕과 마주 선 지금, 김유성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한계를 돌파했다.

김유성의 몸이 이전과는 또 다른 황금빛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용사 김유성의 최전성기였다. 불타는 듯 온몸에서 빛을 내뿜는 김유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게다가, 사실 혼자도 아니고 말이야.”

“...어이가 없군.”

대꾸하듯이 내뱉어진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차가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던 곳에서 구두 소리가 또각였다. 누군가 말한 것은 김유성의 등 뒤에서였다. 김유성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망토와 나풀대는 양복. 가면 뒤쪽으로 은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내뱉는 음성들에는 하나하나 짙은 경멸과 짜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스나크는 나와 동류다. 그 녀석과 나는 근저에 있는 사고방식이 비슷해. 그러니까 한 번 여왕의 정체를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시키면, 내 의견에 동조해줄 거라고 생각했지.”

뚜벅뚜벅 걸어온 것은 마왕이었다. 루드비히가 김유성의 옆에 섰다. 김유성은 말없이 나타난 마왕을 바라보았다. 스나크라는 이름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이지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건 추측할 수 있었다. 마왕이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체념한다. 쓸데없는 걱정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게 당연하고 합리적인 판단일 텐데. 설마 이렇게까지 포기가 느릴 줄이야. 하긴, 아는 사람이 다치는 게 싫다고 무작정 자리를 뛰쳐나간 시점에서 눈치채야 했다.”

루드비히가 생각하고 있던 이지수의 인물상이라면, 일부러라도 자리에 앉아 루드비히와 대화했을 것이다. 사태의 파악과 정보의 획득을 위해. 하지만 이지수는 백묵과 허다인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걸 알자마자 뛰쳐나갔다. 상식적인 반응이라 해도 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계산 착오군. 스나크는 내 생각보다 더 감상주의자였어.”

이내 마왕이 김유성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기가 차는 건, 용사 네 행동이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김유성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가면 너머의 눈동자에는 언제나 심드렁한 마왕답지 않게 격렬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교양과 이지를 갖춘 평화주의자가, 미친놈을 향해 마땅히 품어야 할 분노였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있나? 봉인의 핵이 무너지고 있다. 여왕을 가둬두고 있던 감옥의 근간이 말이다!”

“나도 눈 있어, 인마.”

“애써 미뤄뒀던 폭탄이 코앞까지 다가와버렸다. 세상을 구하는 용사라는 인간이, 세상을 종말을 향해 힘껏 떠밀어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농담이었다면 웃었겠지.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일을 벌여놓을 줄이야!”

김유성은 입술을 이죽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녀석을 바깥으로 내보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핵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 말고는. 걔는 네가 들여보낸 거잖아? 자업자들이니 네가 그걸 나한테 따지면 안 되지.”

“배짱이 좋군. 내 앞에서 하찮은 거짓말을 하다니.”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김유성을 노려보는 그 눈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강렬한 기운을 흘렸다.

“모든 걸 베어내는 용사의 검. 네가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공간을 잘라 통로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쯤은 가능했겠지. 그런데도 넌 네 모든 근간을 스나크에게 쑤셔 넣어버리는 길을 택했다. 흥미 본위로 세상을 위험에 빠뜨린 거다!

그러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는 듯 김유성이 웃었다.

“가능성에 걸고 희망을 맡긴 거지. 어차피 조금 뒤 세상이 다 끝나버린다면, 어떻게 발버둥은 쳐봐야 할 것 아니야.”

그 말에 루드비히가 또다시 눈을 부라렸다.

“예정된 멸망을 미뤄두기만 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영원히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가당치도 않군. 너는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알고 있나? 네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나? 몇 년. 며칠. 심지어는 몇 분 동안이라 해도 그동안 생명은 살아간다!”

루드비히가 으르렁대며 김유성에게 말했다.

그 주장은 합리적이었다. 아무리 세상의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조금쯤 뒤로 미루는 것쯤은 가능하다. 일 년을 미룰 수 있다면 일 년. 십 년을 미룰 수 있다면 십 년. 백 년을 미룰 수 있다면 백 년 동안,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구도 그것을 의미 없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성이 자신의 가슴을 땅땅 두드렸다.

“아 그럼 배 째든가.”

“…뭐라고?”

“배 째라고. 꼬우면 못 하게 막았어야지. 어쩔래, 나 죽일래? 어떡하냐. 나 어차피 조금 있으면 사라지는데?”

“이런, 이 미친놈이…!”

야만인 수준의 폭론에 마왕은 할 말을 잃고 분노에 떨었다. 하지만 김유성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전쟁 때 몇 번이나 반박하며 싸웠고, 결국 알아낸 것은 서로의 가치관이 너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결말이 나오지 않는다. 해묵은 논쟁을 지금 여기서 재개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저항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차피 넌 지금 나한테 협력을 요청해야 할 상황이잖아? 여왕이 이대로 현실에 접촉해버리면 너도 곤란하니까.”

김유성이 웃었다. 처음부터 전부 다 계산대로였다. 김유성이 봉인의 핵을 무너뜨리고 여왕이 활동을 재개하려 하는 순간, 반드시 이곳에 마왕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부 다 알고서 저지른 일이었다. 마왕은 이걸 결코 방관할 수가 없다.

이대로라면 여왕의 탁류가 틈새로 주르륵 흘러나가 현실과 이어져버릴 게 뻔했다. 어떻게든 그 전에 탁류들을 잠재우고, 무너진 봉인을 덕지덕지 붙여 구색이라도 맞추어놓아야 한다. 마왕이 이곳에 나타난 건 즉 봉인의 응급처치를 위해서였다.

“나는 너를 경멸한다.”

“나는 너를 동정한다고.”

루드비히가 이를 꽉 깨물었다. 처음에 의도한 바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거꾸로 흘러갔다. 전부 김유성이 마왕에게 말도 안 되는 초강수로 엿을 먹여버린 탓이었다. 자신의 꾀에 자신이 걸려버렸다.. 아마도 지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조금쯤은 쌤통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상당히 감흥이 이는데.”

용사와 마왕이 나란히 서서, 울부짖으며 새어 나오고 있는 여왕의 허물을 바라보았다. 모든 불길함을 모아놓은 듯한 기척. 너무 늦은 대전쟁의 종막이 여기에 열리고 있었다. 김유성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루드비히를 쳐다보았다.

“설마 너랑 같이 싸우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용사와 마왕의 공동전선이다. 대전쟁의 드림팀이잖아.”

“뻔뻔하게 말 걸지 마라.”

“그리 화내지 말고. 어차피 밖에 있어 봐야 남들 방해만 해댈 거잖아? 그러면 나랑 같이 놀아달라고. 내 생애 마지막 싸움이야. 지켜 보는 사람 하나 없는 건 너무 쓸쓸하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루드비히가 김유성을 쳐다보았다. 저 인간 때문에 공들여 만든 봉인은 개판이 됐고, 어떻게든 봉합해 몇 달이라도 더 여왕을 가둬놓으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선, 먼저 새어 나오는 여왕의 찌꺼기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 작업은 마왕 혼자서는 힘에 부친다. 솔직히 말하면, 색이 다 바랜 용사라 해봐야 도움도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인정해야 했다. 보아하니 김유성은 용사의 능력을 잃어가면서도 순간적이지만 전성기 수준의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터져나오고 있는 투기의 빛을 볼 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혀를 찬 마왕이 기이한 기운을 끌어올렸다.

“마음만 같아선 몇 번이고 저주를 쏟아내고 싶지만…. 곧 죽을 인간한테 욕을 하는 것도 뒷맛이 나빠.”

그것은 이미 예정된 운명이었다. 자신의 근간이 되는 기록을 전부 까발려 한 놈한테 박아버렸으니. 지금의 김유성은 말 그대로 섬광이었다. 그렇다면 그 빛나는 광채, 전부 놈이 싸지른 똥을 치우는 데에, 이 자리에서 여왕을 상대로 써주겠다는 것이 루드비히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말 그대로 세계를 위한 시간 벌기군.”

“그 시간 벌기를 부숴버린 게 다름 아닌 너다.”

은발이 흔들리고 금발이 휘날렸다. 이윽고 하나의 탄환이 된 용사와 마왕은, 일제히 여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

땅바닥에 있던 구슬이 완전히 박살났다.

봉인의 기둥이 깨지는 것과 함께, 광채 속에서 지수가 튀어나왔다. 예전처럼 공간의 틈새에서 마왕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지수가 봉인 속에 들어가있던 것은 비교적 잠깐이었다. 그렇다면 바깥도 그리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주변을 보았다.

백묵과 허다인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얼굴을 향하자, 정리되지 않은 정보의 나열들이 지수의 머리에 억지로 쑤셔넣어졌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허다인의 표정을 포착한 순간 간파할 수 있었다. 지금 허다인이 품고 있는 감정. 지수는 자신 때문에 봉인 속으로 끌려가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죄책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음 졸이는 걱정. 약간의 호기심과 그보다 작은 기대.

해설과 답지라는 비유가 와닿았다. 지수의 해석 스킬이 현실에 펼쳐져있는 해설을 읽어낸 것이라면, 이것은 답지를 엿본 것 같았다. 근거 따위 하나도 없지만 직관으로 알았다.

이렇게 선명한 감정이라는 것은 바깥쪽의 근거들을 잘 분석한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현상해석과는 차이가 있었다. 통찰하는 것의 방향성이 다르다. 지수의 왼쪽 눈동자에는 푸른빛의 안광이 감돌고 있었다. 용사의 심안? 아니, 지수가 각성하게 된 이 능력을 표현하자면.

“심상해석….”

지수가 가지고 있던 맹점의 보완. 현상의 겉면만을 봐서는 간파할 수 없는 본질을 통찰한다. 김유성의 기록에 직접 찔린 채 전부 엿보고 해석한 지수이기에 발현한 힘이었다.

그리고 지수가 고개를 휙 돌아보았다.

봉인의 핵이 완전히 박살나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첫째, 자신의 기록을 전부 잃어버린 김유성은 아마 곧 있으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둘째, 더 이상 여왕이 봉인에서 풀려나는 건 한참 뒤에야 닥칠 일이 아니게 되었다.

위기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얼떨결에 떠넘겨진 자’가 아니라 ‘믿고 맡겨진 자’로서, 책임감 또한 느꼈다. 더 이상 느긋하게 사태를 관망한다느니, 어떻게 할지 못 정햇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반 발자국 뒤로 빠져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고수하는 건 지금까지로 충분했다.

이제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지수가 옆에 서있는 백묵과 허다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조금쯤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만큼 지수의 눈빛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도 아까웠다. 헛기침을 하고 본론을 말했다.

“제 길드를 만들 겁니다.”

그것은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집단은 있었다.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같이 행동하는 동맹도 있었다. 하지만 지수가 스스로 조직적인 단체를 만든 적은 없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 리더 자리에 앉겠다니.

“너….”

“알아요. 안 어울리는 거.”

지수가 꽉 주먹을 쥐었다. 정말로 체질이 아니었다. 길드장이라니 우습기만 하다. 하지만 사람이 체질에 맞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금은 반장 같은 건 귀찮아서 싫다며 손들지 않고 있어도 될 초등학교 회의시간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총력을 기울여, 최대한 빠른 시간에 모든 S급 던전을 공략합니다. 다른 곳의 지원도 아낌없이 받아낼 생각이예요. 방해하는 곳이 있다면 전력으로 쳐부술 겁니다. 누각과 불식은, 만들어질 제 길드의 산하 길드가 되어주세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불식과 누각은 국내 최강의 길드라고 말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런 두 길드를 다짜고짜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이제부터 자신이 만들 새 길드의 산하에 집어넣겠다니. 미친놈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백묵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완전히 결심했나.”

“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지수가 가장 경멸하는 것과 같이, 난폭한 방식을 써서라도 일을 진행시킬 것이다. 거절하는 쪽의 협력이 필요하면 힘으로 굴복시킬 것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강행할 것이다. 백묵은 썩 기꺼운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허다인은 크게 당혹해하며 말했다.

“갑자기 왜 그래? 누구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었어?”

그 말에 지수가 푸욱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는 깨진 구슬이 널브러져있었다. 누구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었냐고?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답해줄 수 있었다. 지수는 천천히 깨진 구슬 조각들을 손바닥에 쓸어담았다.

“...전언이예요. 용사님께서 가라사대.”

허다인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말을 듣고서야 생각났다. 저 푸른색 안광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지수의 한쪽 눈동자에서, 육영웅을 이끌던 옛 동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반드시, 여왕을 쓰러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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