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용사님께서 가라사대 (5) >
너야말로 여왕을 쓰러뜨릴 유일한 조커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한 도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싸구려 극본의 전개 같아서 현실감이 없었다.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기분이었지만 코웃음칠 수도 없었다.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지수가 패배한다면 세상 모든 것이 여왕에게 먹혀버리는 것이다. 지수가 알고 지낸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도 구별 없이. 사람들이 쌓아온 이야기도 기술도 문화도 전부 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깨에 세상을 짊어지게 되어버린 인간의 기분 따위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던 지수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서는 김유성이 지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예전부터 이런 부담감을 가진 채로 싸워왔던 것이다. 같은 입장이 된 지금에 와서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왜 갑자기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냐. 기분 나쁘게.”
벽에 묶여있는 채인 김유성이 말했다. 입술을 꽉 깨문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손으로 대전쟁을 끝낸 용사에게, 지금에 와서야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토할 것 같은 기분 든 적 없어요?”
“뭔 소리야 그게?”
“기대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큰 역할 같은 거 떠맡기 싫고 관심도 없다고, 좀 내버려두면 안 되냐고. 무리라고 못하겠다고 다 내던져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적 없냐고요.”
어깨에 짊어지기 부담스럽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는 없는 건가. 그게 지금 지수가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단순한 체질이나 적성 문제일지도 몰랐다. 확실한 사실은, 지수는 영웅 같은 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인종이라는 것이었다.
자신 따위가 세계를 구할 희망이라니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자신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알아서 해결해주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믿음에 매달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명예를 떠넘길 수 있으면 백 번이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김유성이 한심한 질문이라는 듯 지수를 바라보았다.
“난 그딴 거 느낀 적 없는데. 애초에 못하겠다 손 들고 도망쳤다간 마왕 그 놈이랑 똑같아지는 거 아니야.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하지. 오기로라도 내 쪽에서 항복은 안 해.”
“…마왕을 되게 싫어하시네요.”
“사이가 좋을 리 있냐. 너는 소설도 안 읽어 봤어? 원래 용사랑 마왕이란 건 대대로 앙숙지간인 법이라고.”
김유성이 잘 만들어진 익살이라는 듯 큭큭댔다. 지수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웃기려고 한 말이면 하나도 안 웃겼다. 뭐, 농담은 이쯤 해두고. 콧숨을 쉰 김유성이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하려는 게 뭔지는 대충 이해가 간다. 혹시 네가 실패해서 세상이 끝장나버리면 반쯤은 자기 책임이라 생각하고 있지. 그래서 부담감에 위가 쑤신다는 거고.”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정확한 통찰이었다. 그러자 김유성이 한숨을 쉬었다. 너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 그런 걸 딱딱 잘라서 생각 못하면 혼자 온갖 일 다 떠맡을 텐데.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김유성이 말했다.
“나랑은 경우가 다르긴 하네. 나는 내가 바래서 용사가 된 거니까. 불평이 있을 리가 없지. 너는 반쯤 떠밀려 맡겨진 거나 마찬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김유성은 스스로 세상을 멋지게 구해낼 영웅의 힘을 바랬다. 그 결과 각성해 용사가 된 것이고. 그저 능력의 특이성 때문에, 한계를 넘어서 강해진 탓에 얼떨결에 여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 된 지수와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뭐, 이렇게 돼버렸다고 위로라도 건네주고 싶은데.”
하지만 김유성은 자긴 마음에도 없는 위로 같은 거 할 줄 모른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지수에게 말했다.
“근데 어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 갖고 징징대봤자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것쯤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책임감 때문에 위가 쑤시면, 그딴 것 알 바 아니라고 내팽개치든가.”
“내팽개치라고요?”
“잘 들어봐. 여왕이 폭주하는 걸 방치했다간 너도 죽을 텐데, 네가 죽기 싫어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지 않겠냐. 네가 강하든 약하든 일단 발버둥은 쳐봐야 될 거 아니야.”
그것은 김유성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고방식이었다.
죽음의 위험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피할 수 없는 멸망이라면 최대한 유예하다 순순히 받아들이면 된다. 그따위 헛소리를 진심으로 지껄이는 마왕보다는, 봉인 안에 갇혀있던 자신이 훨씬 생기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싹 다 부차적인 문제야. 네가 나처럼 영웅병 걸린 정신병자인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죽기 싫어서, 아는 사람이 죽는 게 싫어서. 그런 소시민적인 이유로 싸우면 안 될 법이 있나? 세계쯤이야 덤으로 구해버리라고, 덤으로.”
“덤으로….”
“내가 너희들한테 무슨 폐라도 끼쳤냐? 그러니까 너희도 날 귀찮게 하지 마라. 이렇게 배짱 좋게 나가란 말이야.”
지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세계의 존망이란 것을 원 플러스 원 행사로 뒤따라오는 사은품 취급 해버리다니. 너무나도 담대했다. 영웅의 그릇이라는 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내팽개쳐도 된다. 자신의 페이스로 싸워라. 가벼워진 지수의 마음이 유쾌해졌다.
자신이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그걸 넘어서 이 세상 자체가 끝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책임감. 그런 것은 부담되니까 꺼지라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내팽개쳐버린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하는 말이라면 영웅 실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한테 피해를 끼친 게 없으니 너희들도 나를 가만 좀 내버려둬라. 그것은 지수가 평소에 품어오던 생각과 똑같았다. 잠깐 심호흡하던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좋은 말씀도 해주실 줄 아네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용사님이라고, 용사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받들어 모셔야지.”
“네, 네. 용사님. 그래서 더 하실 말씀은?”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지수가 피식 웃었다. 그 말에 김유성 또한 안심한 듯 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심연의 끝에는 다다랐나?”
심연? 김유성의 말에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였다. 자신의 기억을 뒤적거리던 지수가 이내 아, 하고 탄성을 흘리며 작게 손바닥을 때렸다.
“심연이면 S급 던전 맞죠?”
“S급 던전? 뭐야 그게.”
김유성의 반응에 지수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S급 던전이라는 말은 지수 세대에 와서야 만들어진 단어였다. 대전쟁을 살던 김유성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요즘 세상에선 그렇게 불러요. 백묵 씨가 이름은 그게 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편이 좋다고 그러시던데요.”
지수의 말에 김유성이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낙담이었다. 김유성이 말했다.
“아이고, 기껏 멋들어진 이름으로 지어놨더니. S급 던전이 뭐야? S급 던전이. 백묵 그놈은 운치란 걸 하나도 몰라.”
그 점에 대해서는 지수도 완전히 공감했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전인미답의 시련들. 그것을 ‘심연’이라고 부르는 것과, 'S급 던전’이라고 부르는 건 하늘과 땅 수준의 감성 차이가 존재했다. 됐어. S급 던전이든 뭐든 걔네 마음대로 하라 그래. 조금쯤 삐진 듯한 김유성이 말을 이었다.
“심연은.”
“S급 던전이요.”
'S급 던전은. 제기랄! S급 던전은, 한 마디로 설명해서 세상 하나가 멸망할 뻔했던 위기들의 기록이다.”
그것은 조사나 추론 따위로 얻어낸 사실이 아니었다. 용사의 심안으로 본질을 꿰뚫어본 결과였다. 실제로 세상을 한 번 박살낼 뻔했던 위기들. 여왕이 먹어치운 가장 흉흉한 기록들. 그것이 소위 S급 던전이라 불리는 것들의 정체였다.
“그러니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유물도, 하나하나가 세계 자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한 물건들이겠지. 당연히 나중에 열린 게이트 일 수록 더 무시무시한 게 나올 테고. 솔직히 마지막 즈음에 뭐가 튀어나올지는 나도 감이 안 잡힌다.”
지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떠올린 것은 지수가 직접 들어가 보았던 S급 던전이었다. 망령왕의 무덤. 그 안에 있던 것은 수천 수만의 언데드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얻어낸 건 죽인 존재를 사역하고, 모든 언데드를 지배할 수 있는 새까만 왕관. 확실히 세상을 끝장 낼 만한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마왕이 스승님께 줬다는 길드 아지트.’
누각의 아지트는 평소 공중을 떠다니는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체는 소유자가 상상하는 대로 모습과 능력을 바꾸는 신기루의 성이었다. 그렇다면 그 또한 걸맞은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게 합당할 것이다.
‘그런 게 초입에 있던 물건들이라면.’
하나의 법칙이었다. 던전이라는 것은 나중에 개방되는 것일수록 위험하고 강력하다. 그것은 즉 지금 지수가 확인하고 있는 S급 던전의 유물들이 가장 별 거 아닌 편이라는 뜻이었다. S급 던전들의 끝자락을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걸 감당할 수가 있나? 하지만 김유성은 오히려 그것이 이용할 수 있는 기회라는 듯 지수에게 다그치며 말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수단의 확보야. 여왕이 어떤 법칙으로 세상을 덧칠하든 대응할 수 있게, 거의 모든 공격수단을 갖춰야 하지. 그러면서도 하나하나가 강력해야 돼. 하나의 세계나 마찬가지인 여왕에게 흠집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즉 검은 왕관이나 신기루의 성 같은, 수많은 세계의 위기를 초래한 물건들. S급 던전의 유물들을 전부 모아서 여왕을 상대할 때의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바로 김유성이 고민한 끝에 내놓은 여왕의 공략 방법이었다.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다음 나타날 S급 던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면? 공략을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면? 모든 유물을 모았는데도 여왕을 쓰러뜨리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면? 온갖 조건이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하나라도 어긋나면 모든 계획이 우르르 다 무너지지.”
도저히 제대로 된 전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계획이라 말하기에도 상당히 어폐가 있었다. 차라리 도박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왕을 쓰러뜨린다는 건 상식적으로 무리라고 생각되는 일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니까. 합리만을 뒤쫓아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체념하는 것보다는 나아.”
김유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번뜩였다.
“어쩔 수 없다는 말 한마디로 포기할 수 있겠냐.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발버둥을 쳐주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해도 이빨로 물고 늘어져주겠어. 그걸 위해서 여태까지 견뎌왔어. 그리고 실제로 지금, 네가 내 앞에 나타나주었다.”
갑자기 봉인 안에 굴러들어온 이상한 꼬맹이. 그 이야기를 듣고, 지수가 가진 해석 능력의 진가를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김유성이 속으로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구원으로 다가왔는지 지수는 모를 것이다. 김유성이 웃었다.
“정말 성가신 눈이야. 지금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이 보이거든. 뻔히 보이는데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네?”
지수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김유성이 반쯤 억지로 몸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나섰다. 김유성의 몸을 꿰뚫고 있는 검들이 벽에서 뽑혀나오기 시작했다.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벽의 구속에서 해방된 김유성은, 수많은 검에 꽃혀있는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리고 푸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지수가 멍하니 고개를 내려다보자, 자신의 가슴팍에 김유성의 검이 찔려있었다. 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는 직접 찔린 뒤에야 김유성의 몸에 박혀있던 검들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것은 용사 김유성의 기록이었다. 한 자루 검으로 살아 갔던 김유성이기에, 그 기록 또한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지수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기록이라면 읽을 수 있다. 읽을 수 있다면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가슴팍에 꽂힌 칼날을 바라보며, 지수의 눈동자에서 황금빛 안광이 흘렀다.
“그래, 나로는 안돼.”
그것은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김유성의 ‘경험치’였다. 그가 품었던 각오와 긍지. 이루고 싶었던 소망.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관철한 신념. 대전쟁을 겪으며 바뀌어 간 사고방식.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실전에서 최적화된 전투논리.
“나처럼 단순히 ‘아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석하는’ 너니까, 어떤 적에게도 대처할 수 있어.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라 맡기는 거다. 전 인류 따위는 내버려두더라도, 나 한 사람 분 정도는 책임감을 느껴달라고. 너한테 전부 걸었으니까.”
그리고 새하얀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지수는 깨달았다. 봉인의 기둥 정도야 예전에도 들어와보았다. 그러니 예전과 같은 요령으로 탈출하면 된다 생각했지만, 이곳은 용사 김유성의 기록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이곳을 깨뜨려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사 김유성 그 자체를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김유성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해적 룰렛이라도 하는 것처럼, 김유성은 한 자루 한 자루 자신의 몸에서 검을 빼내 지수를 찌르고 있었다. 조금씩, 김유성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안광이 사라져갔다. 지수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왜 …?”
“어떤 거대한 위기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맞설 것. 그게 용사라는 클래스가 가진 조건이다.”
그렇기에 김유성은 용사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지금 김유성은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숙원을 맡기는 중이었으니까. 염원한 끝에 손에 넣은 힘이 사라져가는 건 씁쓸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주역이었던 이야기는 훨씬 예전에 끝났어. 너희들의 시대다. 영감탱이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끼어들 만큼 촌스럽지는 않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 알겠냐?”
김유성의 손이 지수를 툭 밀쳤다. 낭떠러지에 발이 걸렸다. 지수는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잠들어있던 여왕의 기운이 틈새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새하얀 세계가 조금씩 새까맣게 물들어간다.
지수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김유성은, 처음으로 한숨을 쉬거나 비웃는 기색 없이 순수하게 웃고 있었다.
“네 손으로, 반드시 여왕을 쓰러뜨려라.”
떨어지는 지수의 왼쪽 눈동자에 푸른 빛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