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용사님께서 가라사대 (4) >
솔직히 말해 지수는 그리 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단신으로 육영웅을 쓰러뜨리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대전쟁 시절 최전성기의 육영웅이라 해도. 과신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허다인과 백묵, 우진. 지수가 만나본 육영웅들은 확실하게 지수보다 하수였다.
그러니 육영웅의 리더인 김유성이라고 해도, 제대로 싸운다면 못 이길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지수가 가지고 있는 힘은 통상적인 각성자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어 있었다. 그것이 지수의 생각에 상식적인 판단이었고, 그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유성의 분신이 휘두른 검이 지수의 코앞을 갈랐다.
‘이게 뭐야 대체…!’
완전한 계산착오였다. 김유성을 단순한 육영웅의 일원이라 생각하면 안 되었다. 그는 명실상부 최강의 각성자였고, 다른 육영웅들은 그를 뒤따르는 역할일 뿐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김유성은 다른 육영웅 전부를 상대해도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수준의 전투능력이 있었다. 장검이 거칠게 바람을 갈랐다.
지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장난이 아니었다. 김유성이 만들어낸 분신은, 정말로 지수를 죽이려 달려들고 있었다. 이곳은 환술 속에서처럼 죽어도 몇 번이고 부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이를 테면 던전 안이나 마찬가지다. 안에서 죽으면 정말로 죽는다. 지수가 김유성을 향해 소리쳤다.
“이것 좀 멈춰줘요!”
하지만 김유성은 지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혀를 찬 지수가 분신을 떼놓으려 주문들을 날려보냈지만, 김유성의 분신은 룬 자체를 써걱 베어 갈라버렸다.
‘이게 말이 돼?’
지수가 혀를 내둘렀다. 김유성의 검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자를 수 있었다. 방어가 전혀 불가능하다. 보통의 공격처럼 보호막으로 위력을 줄인다든가, 마법으로 견제하는 것 따위의 수작은 통하지 않았다. 저 검의 궤도 위에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종잇장을 잘라내듯이 깔끔하게 잘려 나갈 것이다.
백묵처럼 방어력을 믿고 뻗대다간 한칼에 썰려나가기 딱이었다. 그것은 칼날이 날카롭다든가, 휘두르는 힘이 엄청나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용사의 검이 모든 것을 가르는 건 개념 차원의 이야기였다. 그냥 법칙이 그런 것이다.
방해도 방어도 불가능하다면 가능한 행동은 피하는 것 뿐이었다. 지수가 어떻게든 최소한의 대응이라도 할 수 있던 것은 해석 능력 덕분이었다. 현상해석. 금색으로 빛나는 지수의 눈동자가 김유성의 분신이 휘두르는 검의 궤도를 읽어냈다.
하지만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른 이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최선의 수를 계속해서 두는 것으로 천천히 몰아넣어 갈 수가 없었다. 승리로 이어지는 경우의 수. 그것을 저쪽 또한 읽고 있었다. 용사의 심안. 김유성의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찌를 만한 약점이 없어.’
거북한 상대였다. 좀처럼 주도권을 이쪽으로 가져올 수가 없었다. 마왕과 대치할 때도 이런 인상을 받았었다. 휘둘러진 검을 피한 지수가 재빨리 거리를 벌린 순간, 김유성의 분신이 지수 쪽을 째릿 노려보았다. 무언가가 온다. 지수가 직감했다.
한 순간 뒤, 허공에서 거대한 참격이 발현되었다.
찌이익!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전조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회피가 불가능했을 속도였다. 그 작동 방식은, 김유성이 눈의 초점을 맞춘 곳에 참격이 몰아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거리를 벌려도 문제였다. 직접 휘두를 때처럼 절대적인 절단능력은 없어도, 위력과 범위는 오히려 대단했다. 집단전도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무슨 자기가 마법사야?’
지수는 억울하다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용사라는 게 대체 뭐길래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것인가. 거리를 좁히면 절단 공격, 거리를 벌리면 심검. 빈틈이 없었다. 심검을 피하려 드니 또다시 분신이 거리를 좁혀왔다.
지수는 잠깐이라도 발목을 잡기 위해 김유성의 분신에게 룬들을 쏘아냈다. 하나하나가 묵직한 한 방이었다. 그러자 분신은 휙휙 가볍게 검을 휘둘러 날아가던 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양단했다. 잘려나간 룬들은 그대로 증발했다. 몇 번을 봐도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저래도 되는 건가?
‘웬만한 공격은 해봤자 그냥 통째로 베어버린다 이거지.’
방금의 광경을 보고서, 지수는 확실하게 납득했다.
솔직히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던 점들이 있었다. 아그리올라를 비롯해 대전쟁에서 날뛰고 있었다는 수많은 재앙들에 비해, 육영웅들은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들은 대단한 각성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손으로 대전쟁을 끝낼 수 있을 정도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의 해답을 이제야 알았다.
그곳에 이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육영웅들은 그냥 옆에서 좀 도와준 정도고, 사실은 김유성 이 인간 혼자서 다 해먹었던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능력들을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둘둘 두르고 있다면 대전쟁의 난다 긴다 하는 괴물들을 싸그리 청소할 수 있었던 것도 납득이 갔다.
지수가 휙 망토를 펼치고 공중으로 날았다.
그러자 김유성의 분신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밟고서 지수를 쫓아 따라왔다. 정유현처럼 중력을 제어하거나 지수나 서민하처럼 비행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진짜 허공답보였다. 이제는 놀랄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래, 이 정도야 기본적으로 탑재가 되어있으시겠지.
“빌어먹을 사기캐!”
지수가 저주했다. 김유성은 거의 완전무결에 가까운 각성자였다. 이 세상에 주인공이라는 게 있다면 이 인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수가 평범한 각성자였다면 손쓸 도리도 없이 당해버렸을 것이다. 이런 치트키를 몇 개나 친 괴물과 같은 링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듣는 규격 외의 능력자였다.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쓰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건.’
지수의 손바닥 위에 용언문자가 떠올랐다. 완전한 용왕으로 거듭난 지금, 예전처럼 밴더스내치의 힘을 빌려 오랫동안 용언을 빚어낼 필요는 없었다. 동시에 지수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재버워키가 체셔 고양이의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용언마탄.”
고양이의 정령무장이 용언문자를 삼켜 마탄을 장전했다.
김유성의 분신이 새파란 눈동자를 빛냈다. 지수가 위험한 짓을 하려고 한다는 걸 순식간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용사의 심안에는 심리전이고 뭐고 통하지 않았다. 진짜 난리났네. 속도에 박차를 가한 김유성이 특공의 기세로 달려왔다. 분신이 검을 내리쳤지만, 그 궤도는 처음부터 읽고 있었다.
“완벽한 공방일체지만, 파고들 틈은 있지.”
지수가 휘둘러진 검을 한 발짝 차이로 피했다. 칼날이 코앞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동시에 정령무장의 총구를 분신의 머리에 겨누었다. 지금이라면 검으로 대응할 수 없겠지. 공격당한 직후의 카운터. 그것이 지수가 노린 빈틈이었다.
“용언마탄.”
지체는 요만큼도 없었다. 정령무장의 총구에서 파괴광선이 터져나갔다. 여파에 공간 자체가 흔들리며 울렸다. 마탄의 위력은 아그리올라에게 발사했을 때보다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이것이 지수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일격이었다.
용왕의 비늘마저 꿰뚫은 주문이다.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이것을 정면에서 맞고 버틸 수는 없었다. 번쩍인 섬광이 사그라들자, 김유성의 몸은 흔적도 남김없이 불타 사라져있었다. 너무 과한 것 같기도 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안도의 한숨을 쉰 지수가 김유성을 돌아보았다.
“이제 됐죠?”
그러자 돌아온 것은 눈썹을 팍 찡그리고 있는 김유성의 얼굴이었다. 대체 지금 뭐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됐기는 뭐가 돼?”
김유성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리자, 지수의 뒤쪽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잠깐만. 이거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돌아보자 그곳에는 김유성의 분신이 멀쩡히 부활해있었다. 지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생각해보면 김유성이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용사는 죽지 않는다고. 벽에 매달려있는 김유성이 혀를 쯧쯧 찼다.
“내가 너한테 기대하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우직하게 겨뤄봤자 끝이 없지. 해석사라며? 맥락을 파악해야 될 거 아니야. 정공법으로 싸워서 용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거의 잘난 척에 가까운 말이었다. 지수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너 머리 굴리는 게 특기 아니냐? 아까부터 막무가내로 싸우고만 있잖아. 출제자의 의도란 걸 파악해보란 말이야.”
그 말에 지수는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막무가내로 싸우기는 개뿔이, 지수는 아까부터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 생각을 굴리느라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도 한쪽에서는 부활 능력에 대한 대응책을 짜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김유성의 말은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출제자의 의도. 이 경우에는 김유성 본인의 의도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단순히 지수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수가 강하다는 건 방금 것으로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았다.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확실히 이대로라면 끝이 없었다. 김유성이 몇 번이나 부활할 수 있는지도 감이 안 잡히고, 계속해서 부활하는 김유성을 몇 번이고 쓰러뜨리려 했다간 지수가 먼저 체력이 바닥날 것이다. 좀 더 확실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가였다. 지수가 사고를 계속했다.
필사적으로 실마리를 붙잡고 생각했다.
출제자의 의도라. 김유성이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이지? 만나고서 처음 받았던 인상은 껄렁한 양아치였다.
‘아니야. 저 인간은 뭔가 더…음흉해.’
그 말투 탓에 용사 김유성은 이성적 사고보다는 직감이나 본능에 의존하는 타입이란 인상을 받았지만, 상당히 대화를 나눈 뒤인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김유성의 경박한 태도는 전부 일종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생각이 깊고, 행동 하나하나에 철저한 의도를 품고 있는 류의 인간이었다.
당초의 이야기는 김유성이 지수에게 여왕을 쓰러뜨릴 방법을 가르쳐주려 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술 따위가 아니라 방법론의 문제일 것이다. 평범하게 싸워서 여왕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직접 본 지수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도, 여왕의 공략법의 갈피를 지수가 스스로 깨닫게 유도하려는 것일지 몰랐다. 즉 어떠한 발상의 전환만 있다면 손 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게 퍼뜩 하고 떠오를 리가 없잖아….’
지수가 달려오는 유성의 분신을 바라보았다. 검을 이용한 절대적인 절단. 다른 무엇보다 모든 걸 앞뒤 따지지 않고 베어버리는 저 능력이 문제였다. 대응하거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 뭘 어떻게 할 것도 없이, 그냥 법칙이 그런 것이기에.
‘잠깐만. 법칙이라고?’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언가 감이 잡힐 것도 같았다. 모든 것을 베어 넘기는 용사의 능력. 그건 특별히 마력을 불어넣어 기술을 발동시키는 종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기미가 있었다면 지수의 눈이 곧바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시 발동되어있는 상태인 것도 아니다. 칼끝이 땅바닥에 질질 끌릴 때에도 바닥은 절삭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능력이었다. 그 조건을 관찰해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필요한 것은 법칙을 정확히 해석해 규명하는 것. 의식해야 할 지점을 포착하니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김유성이 모든 걸 베어내는 것은 양손으로 검을 쥔 채 휘두를 때뿐이었다. 즉 잡고 있는 게 검이 아니면, 양손으로 쥐고 있는 게 아니면, 공격의 형태가 휘두르기가 아니면. 절대적인 절단이라는 법칙은 적용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해석 끝.”
문제지에 답을 적어낸 지수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여기까지 알아냈다면 뒤는 간단했다. 김유성의 분신을 적당히 끌어들여 유도한 순간, 지수는 마력의 사슬을 뻗어내 김유성의 한쪽 손목을 구속했다. 한 손이 묶여 양손으로 검을 쥐지 못하면, 모든 걸 베는 용사의 능력은 쓸 수 없다.
그것만 없다면 지수에게는 무서울 게 없었다.
또 부활하면 성가시니 지수의 마력으로 둘둘 둘러싸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했다. 김밥말이에 말린 김밥 같은 꼴이었다.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분신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는 김유성이 만족스럽게 입가를 올렸다.
“그래. 이제 요령을 알겠나?”
지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념 레벨에서의 싸움이 될 경우, 단순한 심리전이나 힘싸움이 아니라 법칙을 규명하는 것이 승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그런 식으로, 사고방식을 바꿔보라는 것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의문은 남아있어요.
“이거랑 여왕을 쓰러뜨리는 방법이랑 무슨 상관이예요?”
지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물론 관련이 있으니까 싸움을 붙여서 지수에게 경험을 시킨 거겠지만. 김유성이 지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었다.
“여왕의 능력은 세계의 법칙을 바꾸는 거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김유성 쪽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입맛을 쩝 다셨다.
“아니, 바꾼다기보단 이 세계의 법칙 위에 다른 세계의 법칙을 덧칠한다고 하는 게 맞겠군. 이계의 침식도 그 응용이고. 그래서 보통 방법으로는 쓰러뜨릴 수가 없어. 룰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상대랑 게임을 해서 어떻게 이기겠냐.”
바둑을 두다가 오목으로, 오목을 두다가 오셀로로 종목이 바뀌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바둑에서 체스로 바뀔 수도 있었다. 자신의 말로 상대방의 왕을 잡으면 이길 수 있다, 그런 근본적인 법칙과 전제를 마음대로 뒤집는다.
“던진 사과는 아래로 떨어진다. 숨을 쉬어야 살고, 숨을 참으면 죽는다. 칼에 찔리면 상처를 입는다. 이런 당연한 사실도 여왕 앞에 서면 당연하다고 확신할 수 없게 되지.”
말 그대로 룰의 개찬이었다. 가장 악질적인 건 그렇게 법칙을 바꾸어도 이쪽에서는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여왕만이 게임의 규칙을 아는 상태로 말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심리전이고 뭐고 불가능하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예 승부라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법칙의 해석이야. 원래 하던 게임 방식을 고수하면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해봤자 여왕 앞에서는 삽질일 뿐이지. 세계의 근간이 되는 법칙이 바뀌면, 곧바로 눈치채고 그 법칙에 맞는 수단으로 대응해야 돼.”
어떤 의미로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었다. 여왕이 바둑을 두자고 하면 바둑으로, 오셀로로 싸우자고 하면 오셀로로. 장기가 좋겠다고 하면 장기로. 저쪽이 승부의 룰을 통째로 고쳐 쓰든 말든, 그 모든 게임에서 여왕에게 승리하면 된다.
“나로서는 불가능해.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용사의 능력은 만능에다 완전무결이지. 하지만 그 탓에 완결된 채로 닫혀있어. 상하좌우 대각선 어디든 달려갈 수 있는 최강의 체스말이 있어봤자, 바둑을 둘 때는 하등 쓸모가 없다고.”
그리고 김유성이 짜증난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마왕 그 놈이라면 요만큼 정도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놈은 처음부터 여왕을 이길 생각은 요만큼도 없이 시간 벌이에나 집중하고 있었지. 한 차례라도 더 게임을 지속시키려고.”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질질 끈다고 해서 여왕과 무승부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시간 문제일 뿐. 게임은 여왕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즉 이 세상이 여왕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건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야. 싸운다면 이기기 위한 수를 둬야지. 하지만 나한테는 수단이 없고, 마왕 놈한테는 의지가 없었지. 이대로는 안 돼. 솔직히 조금쯤은 초조해하고 있었지. 하지만 방금 걸로 확신이 들었어.”
“무슨 확신이요?”
“용사의 이름으로 보증해주지, 해석사.”
김유성은 지수를 바라보며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너야말로 여왕을 쓰러뜨릴 유일한 조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