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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외 등급 해석사-118화 (118/176)

118화.  < 용사님께서 가라사대 (3) >

새하얀 세계의 바닥에 생긴 균열은 아주 자그마했다. 눈을 가져다대고 저편을 엿보기에 딱 맞을 정도의 크기였다.

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틈새 저편에 여왕의 본체가 있었다. 이 세상에 이계의 침식을 흩뿌리고 있는 근원. 각성자와 몬스터. 대전쟁.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역시나 조금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야. 볼 거면 빨리 봐! 저거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데?”

심호흡을 하는 지수에게 김유성이 재촉하며 타박을 주었다. 김유성은 뭐가 그리 급한지 어서 들여다보라며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친구한테 추천해준 영화의 감상을 어서 빨리 듣고 싶어하는 어린애 같았다. 지수가 김유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여왕이 좀 예뻐요? 막 여자 모습이예요?”

“…너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데?”

김유성이 이 자식 혹시 정신이 반쯤 나간 게 아닌가 하는 눈으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경멸하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착란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지수의 질문은 황당했다. 멋쩍어하는 지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뭔가 제 반응을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이상하잖아요. 깜짝 놀라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거예요?”

“촉이 꽤 좋은데. 그것도 해석 능력인가 뭐시긴가냐?”

“그냥 눈치로 알죠 그 정도는.”

어깨를 으쓱인 지수가 김유성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생겼어요?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말해줘봤자 의미가 없어. 여왕은 정해진 형태 같은 거 없으니까. 별에 별 모습을 다 취할 수 있지.”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설명을 들어도 확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아무튼 말로 백 번을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정확했다. 지수는 바닥에 생긴 자그마한 균열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지수의 눈동자가 저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새까만 어둠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빛이 들지 않기 때문인가 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단지 살아있다, 움직이고 있다. 그 정도만이 파악되었다. 이내 지수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나며 해석 스킬을 발동했다.

보고 있는 풍경을 해체해 분석한다. 그와 동시에.

“윽!”

이내 지수가 황급히 균열에서 눈을 떼내었다.

“뭐 이상한 거라도 봤나?”

묶여있는 김유성이 물었지만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한 순간 지수는 여왕의 진짜 형체를 포착했다. 아주 잠깐이었을 텐데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방금 본 것이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해석이 안돼.’

마왕의 경우와는 달랐다. 해석이 거부되거나 통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해석은 제대로 기능했고, 그렇게 해석된 결과가 ‘해석 불능’이었다. 마치 온 세계가, 아니 수많은 세계가 압축되어 뒤섞여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검증이 불가능했다. 도저히 지수의 인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 아니었다.

계산기가 어느 정도의 크기를 뛰어넘은 숫자를 표시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했다. 답을 적어내릴 여백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해석불능. 여왕을 마주한 이들은 보통 무시무시한 괴물 따위를 보고서 공포를 느끼곤 하지만, 해석 능력을 가진 지수는 그 이상으로 여왕이 지닌 본질에 다가서버렸다.

단순한 괴물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은 생물이라고 하기도 꺼림칙했다. 세계 그 자체가 의지를 지닌 채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런 것을 죽일 수가 있는 건가?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것은 지수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존재였다. 다른 이들이 여왕이라고 느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의 표상일 뿐이다. 저건 삼라만상이 뒤섞인 혼돈이다. 아그리올라 열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라고 하는 게 차라리 간단할 것 같았다.

지금 여왕이 봉인되어있다는 이 상황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봉인을 풀고서 여왕을 토벌하자니. 지금 자신들은 겨우겨우 이루어낸 봉인이라는 기적을 걷어차고, 스스로 세상을 다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자연히 떠올랐다. 그 정도의 존재였다.

“저건… 안 돼요.”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그냥 위험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세상 모든 걸 마구잡이로 뒤섞어놓은 것 같다고요! 저게 대체 뭔지도 모르겠는데 한 가지는 알겠어요, 감당이 안 된다는 거!”

“그렇군. 일단 좀 진정해라.”

초조하게 소리치는 지수를 김유성이 제지했다. 지수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면서도 김유성의 반응에 의문을 느꼈다. 김유성은 지수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시에 지수의 말을 듣고 전혀 놀라지 않는 듯이 보였다.

“흠. 솔직히 이건 좀 기대 이상인데.”

그리고 눈썹을 까닥인 김유성이 지수를 보며 말했다.

“설마 보자마자 단숨에 꿰뚫어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바로 본제에 들어가도 되겠어. 이걸로 네가 세 번째다.”

“뭐가 세 번째라는 거죠?”

“엄청 무섭게 보인다, 꿈틀거리는 괴물이다, 끔찍한 악마다. 이딴 표면적인 거 말고. 여왕의 진짜 본질을 눈치챈 거. 지금까지 마왕이랑 날 빼면 너 하나밖에 없어.”

김유성이 지수를 향해 피식 웃었다.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렇다면 방금 지수가 해석 스킬로 슬쩍 엿본 여왕의 본모습을 김유성 또한 간파했었다는 것인가. 본인이 여왕의 이레귤러라서? 그게 아니면 해답을 포착하는 용사의 심안 덕분에?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도 여왕을 쓰러뜨릴 방법이 있다고?’

지수는 여왕의 존재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저런 것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김유성 또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쓰러뜨릴 수 있다 떠들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묶여있는 김유성이 말했다.

“대전쟁 때, 나는 여왕의 정체에 대해서 가설 하나를 세우고 있었지. 적당히 이름을 붙이자면 방주설쯤 될까.”

“방주요? 배?”

“그래. 요즘은 SF소설 같은 거 유행 안 하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이 세상이 멸망할 것 같으니까 다 같이 다른 세계로 이주하자. 그렇게 타고 온 방주가 여왕이라는 거지. 던전이니 몬스터니 하는 건 이를 테면 테라포밍 비슷한 거고.”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다른 별을 테라포밍해 환경을 조성하는 것처럼, 이 세계를 이계와 비슷하게 만드려는 것이라면 게이트도 던전도 그 안에 들어있는 유물이나 지식들도 전부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김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어떤 놈이 나타나 내 앞에서 직접 부정해주더군. 네 가설은 완전히 틀렸다고.”

“그게 누구죠?”

“마왕.”

김유성이 짜증난다는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여왕은 단순히 이계에서 태어나고 만들어져 건너온 게 아니야. 그 증거라고 내밀었던 게 또 기가 막혔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마왕이 김유성에게 내민 것은 하나의 연구기록이었다. 레포트는 던전 안에서 나타나는 유물 및 기술을 대조해 분석하고 있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읽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던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물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쓰는 달력이나 문자부터 존재가 확인된 괴물들의 종류, 그런 괴물들을 사냥한 역사와 기술. 던전 안의 문물들이 전부 하나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엔 상충하는 부분이 수십 가지는 있었다.

마왕은 그 모든 모순점들을 일일이 상세하게 서술해놓고 있었다. 마치 그것으로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가 있기에, 미리 준비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한숨을 쉰 김유성이 지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너는 이해하겠냐?”

“여왕은 이계에서 이 세상으로 건너오기 전에도, 이미 몇 개나 되는 다른 세계들을 거쳐 지나왔다….”

지수가 아연해하며 입을 벌렸다. 마법의 지팡이니 신성의 검이니. 현대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물건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것들 모두 똑같은 이계의 문물이라 생각하겠지만, 각각 전혀 별개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물건일 가능성도 있었다.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맹점이었다.

“그리고, 마왕은 또 한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지.”

조사하다 보면, 마법밖에 존재하지 않는 한 세계가 있었다. 이내 마법과 함께 신성력이 공존하는 한 세계가 발견됐다. 마법과 신성력에, 오러도 존재하는 한 세계가 발견됐다. 마법과 신성력, 오러에 정령술까지 존재하는 세계도 발견되었다.

마왕이 이계의 구분을 해가면 해갈수록 사실은 명확해져 갔다. 한 세계에 있던 기술이 다음번의 세계에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발전이 충분한 수준에 달했을 때, 모든 기록이 돌연 끊어졌다.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사실은 끔찍했다.

“이건 뭐 월드 이터라고 해야 하나.”

방문한 세계에 자신이 먹어치워온 이계의 기술들을 토해내 적응시키고, 그 세계가 그걸 받아들여 충분히 발전하면 통째로 흡수한 다음 또 다른 세계로 떠난다. 수많은 세계를 먹어치우며 차원을 표류하는 포식자… 그것이 여왕이었다.

“방주는 개뿔이. 까보니까 끔찍한 해적선이었던 거지.”

“지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으라고요?”

“누가 백 퍼센트 사실이래냐? 지금 시점에서 제일 유력한 가설일 뿐이야. 진짜라고 믿을지 말지는 네가 눈으로 본 대로 판단하라고. ...이렇게 말해봐야 이미 답은 나와 있겠지만.”

지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해석 스킬로 여왕의 본모습을 엿보았을 때 느꼈던 인상. 여러 세계가 혼돈 속에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듯한 모습. 지수는 지금 김유성이 말한 여왕에 대한 추론이 진실이라고 왠지 모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 세계에서 뽑아갈 건 뭐, ‘과학기술’ 정도 되려나? 여왕 눈에는 참 먹음직스럽게 보였나 보지. 한 번 먹어치우면 다음 세계에서도 다다음 세계에서도 두고두고 활용될 테니.”

입술을 삐죽인 김유성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그런 걸 상대로 해서야 손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 마왕 자식은 여왕을 죽이길 포기했다.”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루드비히의 선택 또한 아플 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상대는 이 세계 저 세계를 먹어치우고 다니는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김유성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봉인도 영원하지는 않아. 애초에 마왕쯤 되는 놈이니까 만들 수 있던 거고, 이것도 잘해봤자 십수 년 뒤에는 깨져버리겠지. 그게 아니어도 무슨 사고가 일어나면 무너질 테고. 그때까지의 유예만이라도 잘 먹고 잘살다가, 여왕이 폭주하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멸망하자는 거야.”

“정말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겁니까?”

지수가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너무 암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수라고 해서 달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떻게 다 같이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왕은 정말로 지수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섬뜩한 존재였다.

그리고 김유성이 웃기는 놈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뭐 때문에 이 얘기를 하고 있던 건데?”

“네?”

“여왕을 쓰러뜨리자고 이러는 거 아니야. 마왕 그 자식은 포기가 빨라도 나는 도저히 그딴 식으로 체념하고 살지는 못하겠거든? 그러니까 네가 좀 힘내줘야겠다.”

지수가 가만히 눈을 끔뻑였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그랬다. 김유성은 처음부터 여왕을 쓰러뜨릴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거였나…. 아니면 이건가?”

고민하던 김유성이 자신의 가슴팍을 찌르고 있던 검 중에서 하나를 뽑아냈다. 그리고 뽑힌 검이 공중에 떠오르자, 이내 또 다른 김유성의 형체가 나타나 검을 쥐었다.

“무슨?”

그것은 환영 같은 잡기술이 아니라 엄연한 실체였다. 지수는 한 순간 깜짝 놀랐지만 이내 납득했다. 이곳 봉인의 핵을 이루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용사 김유성의 모든 기록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김유성을 재현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수많은 검에 꽂혀 매달려있는 김유성의 본체가 말했다.

“대전쟁이 한창일 때, 전성기 시절의 내 전투 기록이다. 일단 그걸 제압해 봐.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니까.”

“아니, 잠깐만요! 갑자기 무슨…!”

지수가 싸울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김유성의 분신이 검을 빼들고 달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봐주는 것 따위 요만큼도 없는 살기등등한 기세였다. 일단은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용린의 만년필. 무기를 든 지수가 반사적으로 룬들을 만들어내 쏘아내자, 김유성의 분신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룬들을 그대로 써걱 베어버렸다. 용사의 검은 모든 것을 벤다. 잘려나간 주문이 증발했다.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검풍에 지수의 머리카락 끝이 잘려나갔다.

이건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보여달라고. 얼마나 싹수가 있는지.”

벽에 매달린 채 관전하는 김유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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