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외 등급 해석사-117화 (117/176)

117화.  < 용사님께서 가라사대 (2) >

지수가 침을 삼켰다. 방금 그 말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여왕과 싸워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 그런 것이 있다면 만사형통이었다.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황금열쇠나 마찬가지다. 더 이상 허다인과 백묵이 대립할 필요도, 봉인의 기둥을 가지고 끙끙댈 필요도 없어진다.

아무리 차분하게 기다리는 데에 특출난 자신이 있는 지수의 인내심도 이번 건에 한해서는 패배를 인정했다. 지수는 일 초라도 더 빨리 그 방법을 알고 싶었다. 지수가 김유성에게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김유성이 눈썹을 찌푸렸다.

“너 멍청이냐? 내가 그걸 너한테 왜 말해줘?”

지수가 미치겠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김유성은 지수에 대한 의심을 다 거두지 못한 듯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김유성의 입장에서 지수는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이방인일 뿐이었다. 지수가 가지고 있는 용왕으로서의 면모도 수상함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지수는 충분히 납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알려주시면 제가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전할게요. 그쪽도 봉인에서 나오고 싶을 거 아니예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김유성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분명히 미끼를 덥썩 물 것이라 생각했는데, 김유성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어보였다. 손이 묶여있지만 않았어도 코까지 후비적대고 있었을 것 같았다. 김유성이 말했다.

“어. 필요 없어.”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김유성의 손은 묶여있는데도 마치 지수에게 중지를 들어서 내민 듯한 환상이 보였다. 이건 정말로 경이로웠다. 김유성이라는 남자는 지수가 만난 그 어떤 인간들보다도 단기간에 사람 속을 긁어내는 데에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그 백묵 조차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수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협상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건 협박 뿐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지수가 김유성을 찌르고 있는 수많은 검들 중 하나의 칼자루를 꾹 눌렀다. 아파서 악 소리를 지른 김유성이 너 미쳤냐는 듯 지수를 노려보았다.

“야, 뭔 짓거리야! 진짜 죽고 싶냐?”

“가르쳐달라고요. 여왕 공략법.”

헹, 웃기고 있네. 김유성은 코웃음을 쳤고, 지수는 또 다시 김유성에게 박힌 검을 꽉 눌렀다. 아프다고, 아악! 김유성이 소리질렀다. 폭력에 의한 호소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슬픈 생물이었다. 묶여있는 김유성은 어차피 지수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붕붕 저은 그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 살짝 귀띔해주는 정도는 상관없겠지.”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냐고요.”

지수가 입술을 이죽이며 비꼬자, 김유성이 꽉 눈을 감았다. 여기서는 참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되뇌고 있는 것 같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김유성이 자기 앞쪽에 가볍게 턱짓을 했다. 거기 앉아보라는 뜻이었다. 지수가 털썩 주저앉자, 김유성이 귀찮아 죽겠다는 태도를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너, 여왕을 처음 봤을 때 무슨 느낌이 들었냐.”

“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처음 봤을 때 무슨 느낌이 들었냐느니 뭐니 하기 이전에 지수는 여왕을 본 적이 없었다. 용왕을 직접 토벌한 데다 마왕과 대치해본 적도 있는 지수지만, 여왕 만큼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야 여왕은 지수가 각성하기 한참 전부터 봉인되어 있었으니 당연했다. 가지고 있는 건 해봐야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지식들 뿐이었다. 그조차 상당히 막연한 이야기들이었다.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괴물. 이계의 침식을 일으키고 있는 존재. 그 마왕조차 손을 놓고 포기한 재앙. 여러 가지 묘사를 들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무시무시한 것인지, 어째서 쓰러뜨릴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사실 본 적이 없는데요.”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죽여야 되나 끙끙대고 있었다고? 네가 무슨 김칫국부터 마시기 대회 세계 챔피언이냐?”

김유성이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지수는 대꾸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김유성이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좋아. 일단 네 이야기나 좀 해봐.”

“갑자기 무슨….”

“거 참 말 많네. 일단 네가 뭐 하는 놈인지 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바깥 상황이 대충 어떤지도 듣고 싶고.”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신뢰를 얻는 데에 자기소개와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교과서에서 보아온 김유성의 생애와 달리 저쪽에선 지수에 대해 요만큼도 모른다는 것 또한 불공평한 일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지수는 김유성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추려서 말해주었다. 김유성의 태도를 보니 딱히 지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지수가 겪은 것들 중에서 굵직한 사건들만을 아는 한도까지 전달했다.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졌지만, 김유성은 딱히 조바심을 내지 않고 지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긴 봉인 속에서 그 오랜 세월을 혼자 갇혀있었는데 인내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이다. 이윽고 지수가 이야기를 대충 끝맺자, 김유성은 미묘한 표정을 하고서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가 물었다.

“왜요? 무슨 불쌍한 사람 쳐다보는 것처럼.”

“네가 생각하기엔 왜일 것 같냐?”

김유성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상당히 많은 축약이 들어가 있었지만, 지수는 지수 자신이 겪은 경험을 최대한 성의 있게 전달했을 뿐이었다. 김유성이 말했다.

“네 이야기를 정리하면 무슨 뜻인 줄 알아?”

“뭔데요.”

“너는 마왕의 이레귤러로 각성한 데다 현직 용왕인 동시에 여제급 위계 뱀파이어의 계약자고, 마녀들을 다 통솔하는 중이면서 백묵이랑 동맹을 맺은 허다인 제자여야 하거든?”

“맞아요.”

아주 정확한 요약이었다. 역시 심안을 가진 용사쯤 되면 이해력 또한 보통 수준은 넘어가는 건가. 지수가 상쾌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한귀로 흘리며 대충 듣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경청해주었다는 건 상당히 뿌듯한 일이었다. 이내 김유성이 입가를 이죽였다.

“시나리오 쓰고 앉아있네. 그게 말이 되냐? 허세도 좀 적당히 부려야 꼬맹이가 귀엽네 하고 애교로 봐줄 거 아니야!”

그 말에 지수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설마 못 믿어서 그러시던 거였어요?”

“야, 너 같으면 믿겠냐? 싫으면 증거를 보여보라고, 증거를. 진짜면 내가 너한테 엎드려서 절이라도 해줄 테니까. 여왕을 쓰러뜨릴 방법이고 뭐고 시원하게 다 말해주지.”

“그 말 진짜죠?”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을 털었다. 뭐 큰일이라도 났나 걱정했는데 그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어난 지수가 용왕의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지수의 머리에 용의 뿔이 돋아나고 눈동자가 황금색 안광으로 빛났다.

“일단 이게 용왕이 된 상태고요.”

김유성이 눈썹을 찌푸리며 지수를 쳐다보았다. 굳이 지수가 뭐라고 설명해줄 것까지도 없었다.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는 용사의 심안은, 지수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수는 굳이 입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래도 거짓말이냐는 과시의 목적이었다.

동화책의 페이지가 촤르르륵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모자장수의 모습을 한 재버워키가 나타났다. 지수가 옆에서 망토로 자신의 몸을 감싸는 재버워키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얘가 흑마녀가 준 선물로 계약하게 된 정령이예요.”

다음에 보여줄 것은 허다인이 가르쳐준 비의였다. 명경지수의 요령으로 몸 안의 기운을 비운 뒤, 지수가 허주의 술을 발동시켰다. 발밑의 그림자가 들끓으며 재버워키가 지수의 몸에 융합했다. 망토를 펄럭이는 지수가 김유성에게 말했다.

“이게 정령이랑 융합하는 기술이고요.”

보여줄 것은 아직 수도 없이 많이 남아있었다. 오행이나 내림 같은 허다인의 기술들. 성녀에게 지도받은 영혼시. 요령을 익혀 쓸 수 있게 된 우진의 적막. 백묵이 가르쳐준 병렬사고. 지수가 기술을 하나씩 시연할수록, 김유성의 얼굴은 깜짝 놀란 표정에서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이 되어갔다.

“그리고 또 이건….”

“됐어. 그만해. 너가 미친놈이란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

지수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지수는 비정상적인 규격외의 괴물이었다. 정령과 융합하고 용의 유령과 동화한 채로, 온갖 마법들에다 용왕의 힘, 육영웅들의 비기들을 전부 다 혼자서 써대는 것이다.

“확실히, 싹수가 보이네.”

심드렁했지만 김유성은 내심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지수의 해석 능력이 대단한점은 바로 그 확장성이었다. 전혀 다른 구조 자체를 이해해 분석하는 그 능력은, 이론상 어떤 기술이든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마왕의 이레귤러니 범상치 않은 놈일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짜 그냥 난리가 났구만. 생각한 것 이상이야.”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김유성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귀신한테 홀린 것 같은 기분이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마음껏 들려주지.”

“엎드려서 절하겠다고 하신 건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마음껏 들려주지.”

“엎드려서 절….”

“닥쳐! 이런 꼴로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

화를 내는 김유성이 턱짓으로 수많은 검에 꽃혀있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켰다.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못 지킬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죠.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해봐야 좋을 게 없으니 다물고 있기로 했다.

흠흠 헛기침을 한 김유성이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신기하다 생각하긴 했어. 원래 여기 들어오면 혼이 묶여버려야 되는 건데. 너는 왜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냐? 영혼에 드래곤 유령이 붙어있어서 그런 건가.”

“아."

그 점에 관해서는 추측이지만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지수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손바닥 안에서 오행부가 재로 변해있었다. 그 부적은 소유자가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스스로 사그라들어 피해를 대신 받아준다는 물건이었다. 오행부가 지수를 지켜준 뒤 재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 상황도 전부 계산된 건가?’

생각해보면 지수가 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마왕 때문이었다. 허다인이 들고 있던 마왕의 책을 해석하려던 순간, 그게 방아쇠가 되어 마왕의 마력이 폭주하더니 그대로 봉인의 핵 안쪽까지 끌려와버렸다. 그러면 마왕의 의도는 무엇인가.

마왕은 지수가 오행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나? 아니면 마왕은 단지 귀찮은 놈을 봉인 안에다 쑤셔넣을 작정이었는데 오행부가 그것을 막아준 것인가. 하지만 이 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나올 일은 없었다. 김유성이 말했다.

“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까진 관심 없고. 중요한 건 네가 여기서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지.”

“그게 중요해요?”

“여왕을 쓰러뜨릴 방법을 알아내고 싶다며.”

김유성이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가 눈을 끔뻑이고 있자 김유성이 말했다.

“싸워서 쓰러뜨릴 거라면, 일단 적이 어떻게 생겨먹었나 확인은 해봐야 할 거 아니야. 적을 알고 나를 알라, 몰라?”

합당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여왕을 관찰해볼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왕과 대면하기 위해선 우선 봉인을 풀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까딱하다간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생겼나 확인 한 번 해보겠답시고 그런 거대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설명하자 김유성은 웃긴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바보지?”

“아니, 왜 자꾸 바보래요?”

“여기가 어디냐? 봉인의 핵이지. 여왕을 붙잡아서 꽉꽉 눌러놓은 뚜껑이라고. 그러면 여왕 본체는 지금 어디 있겠냐.”

그 말에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당연한데도 생각하지 못했다. 봉인의 말뚝인 김유성이 눈앞에 있다는 건 이곳이 봉인의 핵이라는 뜻이고, 그건 바로 이곳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여왕과 가까운 곳이라는 의미였다.

“그래. 바로 이 밑바닥에 잠들어계신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배짱이 있으면 한 번 훔쳐보라고. 구멍 사이로 슬쩍 엿보는 정도는 가능할 텐데. 당연히 리스크야 있다만.”

“리스크라고요?”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곳이 봉인의 핵이고, 자그마한 틈새를 통해 여왕의 형체를 살짝 엿보고 오는 것뿐이라면 리스크 같은 게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 까딱 잘못하면 틈새가 벌어져 봉인이 풀려버린다든가? 지수가 조심스레 질문하자, 묶여있는 김유성이 기가 찬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딴 위험이 있으면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보고 오라 말해주겠냐? 내가 말한 리스크란 건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러면….”

“전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러한 이야기였다. 여왕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실체를 두 눈을 뜨고 바라본다면, 체념해서 마음이 꺾여버릴 수도 있다. 이건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었다. 바로 그 마왕마저 그러했으니까. 김유성이 도발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볼 거냐?”

지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용기를 낸 것은 아니었다. 합리적으로 사고했을 뿐이다. 어차피 여왕을 쓰러뜨릴 거라 마음먹었다면 한 번은 정면에서 마주할 테고, 만약 그 때 마음이 꺾일 것이라면 돌이킬 수 있는 지금 꺾이는 게 나았다. 굳이 대면을 뒤로 미룰 필요 따윈 없었다.

그 대답에 피식 웃은 김유성이 바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 순간 무형의 참격이 발현해, 김유성이 초점을 맞춘 곳을 거칠게 찢어냈다. 방금 김유성은 팔다리를 묶인 채 시선만으로 검을 휘둘렀다. 말로만 듣던 심검이라는 것이었다.

지수가 아연해하며 돌아보자, 김유성의 참격이 찢어낸 곳에는 아주 자그맣게, 새까만 균열이 생겨있었다.

“그럼, 한 번 들여다 봐.”

벽에 묶여있는 김유성이 지수를 보고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