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용사님께서 가라사대 (1) >
새하얀 세계 끝에 대전쟁의 용사가 있었다.
김유성의 손바닥과 가슴팍에는 크고 작은 검들이 꽃혀있었다. 양팔을 벌린 채 벽에 걸려있는 김유성은 마치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것 같았다. 봉인 안에 있었기 때문인지, 김유성의 외견은 젊은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육영웅의 통솔자. 최강의 각성자. 여신의 계시를 받은 용사.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실제로 대면하자 그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지수는 어째서 김유성이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이내 납득했다. 그는 여왕의 봉인을 유지하고 있는 말뚝이다. 기둥 중 하나에 김유성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마 봉인의 핵과 같은 장소일 것이다.
김유성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다른 육영웅들과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싸워서 쉽게 압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김유성의 새파란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이 새끼. 너 몬스터냐? 아니. 다시 보니까 그것도 아닌데. 희한하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온 거야?”
지수가 놀라서 흠칫했다. 김유성은 지수가 가진 용왕으로서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간파한 듯했다. 검 하나 맞대지 않고, 묶여있는 채로 그냥 한 번 슬쩍 보고서. 말도 안 되는 통찰력이었다. 이런 것이 그냥 경험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계속해서 지수를 관찰하던 김유성이 말했다.
“아, 대충 알겠네. 너 마왕의 이레귤러구만.”
지수의 심장이 덜컹했다. 꿰뚫어 보이는 것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김유성은 만난 지 몇 초도 되지 않았는데 지수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항에 대해서 단언하듯 말하고 있었다.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김유성이 피식 웃었다.
“뭘 또 점쟁이라도 보는 것처럼 쳐다보냐. 눈 깔아 인마.”
“잠깐만요. 마왕의 이레귤러라는 게 무슨 뜻이죠?”
“엉? 이레귤러 몰라? 지금은 표현이 바뀌었나? 어느 날 갑자기 각성하는 애들 말고, 별 희한한 방법으로 각성하는 놈들 말이야. 시치미 떼지 마, 너도 척 보니까 그쪽이구만.”
지수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김유성의 말에 지수가 당황한 것은 이레귤러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었다. ‘마왕의 이레귤러’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지수 또한 자신의 능력이 마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유성은 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수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추궁하자, 김유성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이레귤러라고 해도 별 게 아니야. 감염당한다고 하면 되나? 이계의 존재한테 인연이니 동경이니 집착이니 뭐 그런 게 생겨서, 마음을 애태우는 걸 기폭제로 각성하는 거지.”
하지만 대전쟁이 한창일 때 인간이 몬스터에게 어떤 감정을 죽을 만큼 애태우는 경우는 보통 한 가지밖에 없었다. 증오. 살의. 복수심. 인간을 멋대로 잡아먹는 저 빌어먹을 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싹 청소해버리고 싶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원한다. 그렇게 수많은 이레귤러가 태어났다.
그렇다면 요즘 시대에 이레귤러 각성자가 극히 희귀해진 것도 납득이 갔다. 몬스터는 던전 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으니까. 접점이 없다면 강렬한 감정을 품을 일도 없다.
“이게 또 인간이란 것들은 몬스터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몬스터의 힘을 동경한단 말이지. 오우거한테 사람이 짓이겨지는 걸 보고 있으면, 나도 저런 힘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그렇게 이레귤러로 각성하는 거야.”
몬스터의 능력을 동경해 손에 넣는 것. 그것은 협회장의 실험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점을 간파하고, 각성한 인간의 후천적인 이레귤러화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서민하야말로 그 최대의 성공사례였다.
각성하지 않은 백지상태. 광기에 가까운 염원. 이계의 존재를 향한 동경.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가지고 싶은 능력이 발현된다. 인형사는 시체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을, 조련사는 다른 몬스터들을 뜻대로 다루는 힘을.
그리고 지수는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를 동경해서, 어떤 언어라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그렇다면 마왕의 이레귤러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했다. 지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묶여있는 김유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걸 다 한 번 슥 보고서 알아낸 거예요? 대체 뭘 근거로….”
처음에는 독심술 같은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김유성은 지수 자신조차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사실까지 알아맞히고 있었다. 단지 마음을 읽는 것이라면 지수가 모르는 걸 알아맞힐 수 있을 리 없었다.
“근거 같은 거 없는데? 그냥 알아.”
벽에 박혀있는 김유성이 콧숨을 쉬며 대답했다. 자신은 탐정처럼 단서들 가지고 머리 굴리고 이러는 것이랑은 연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입가를 비튼 김유성이 한숨을 쉬었다.
“심안이라는 건데, 용사 능력 중에 하나다. 뭐든지 눈으로 직접 보면 대충 파악이 되는 거지. 눈앞에 있는 게 뭐 하는 놈인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그냥 팍팍 떠오른다고.”
그것은 지수의 해석 능력과는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능력이었다. 모든 과정을 파악하는 것으로 해답을 추론해내는 해석 능력과 달리, 김유성의 심안은 과정을 아예 생략하고서 해답만을 손에 쥐는 힘이었다. 물론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지수가 받은 인상은 완전히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썹을 찌푸린 지수가 김유성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있는 걸 나 보고 어떡하라고? 나도 짜증 나서 죽겠거든? 친구 새끼가 몰래 짝사랑하는 걸 눈치채도 뭐 이건 알아채서 미안하다 할 수도 없고, 힘내라 할 수도 없고. 끄고 싶어도 끄지를 못한다고. 싸울 때만 발동되면 덧나기라도 하나?”
김유성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난다는 듯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그 능력 때문에 상당한 고생을 한 듯했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을 감안해도 정말 어마어마한 능력이었다. 방금 지수와 대면해서 잠깐 눈을 마주친 정도로 이 정도다. 전투에 활용한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술이 될지 상상도 안 갔다.
‘현상해석이랑 동격. 아니면 그 이상이야.’
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용사 김유성은 단순히 육영웅의 리더일 뿐인 것이 아니었다. 최강의 각성자라고 불릴 만했다. 육영웅이라는 한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지장이 될 정도로, 다른 육영웅들과는 몇 단계 다른 영역에 있었다.
“뭐 또 다른 능력도 있어요?”
“뭐든지 벨 수 있는 거랑. 죽어도 살아나는 거?”
그건 또 뭐야. 지수가 질린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김유성이 별거 아니라는 듯 콧숨을 흘리며 능력을 설명했다.
“아니, 게임 같은 데서 보면 용사가 죽으면 교회에서 부활하잖아? 그거랑 똑같아. 나는 죽어도 죽어도 부활할수 있어. 그럴 때마다 좀 약해지기는 하지만. 그래서 용왕 같은 놈이랑 싸워도 어떻게든 해볼 만하겠다 싶었지.”
“잠깐만요. 그쪽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었는데요. 한 번이라도 죽었다 살아나면 사람들이 ‘기적이다.’ 이러면서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내가 좀 잘나서 한 번도 안 죽었으니까.”
죽으면 약해지는데 굳이 죽을 필요는 없잖아. 이런 비장의 카드는 마지막까지 숨겨둬야 하는 거고.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김유성이 말했다. 이치에는 맞았지만 도저히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 김유성이라는 양반은 하나만 있어도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을 종합 선물세트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너, 바깥에서 온 거냐? 마왕이 만든 봉인이니까 마왕의 이레귤러가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한데. 사실 그놈은 진짜 이상하거든. 내가 신기한 거 가르쳐줄까.”
“뭔데요?”
“마왕 그놈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자식이야.”
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몬스터라는 것들이, 용왕 아그리올라나 여왕 같은 존재들도 전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계의 존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고. 하지만 김유성은 그 말뜻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몬스터들의 고향이라 해야 하나… 여왕이 원래 있던 세계하고도 또 다른, 전혀 별개의 세계에서 찾아온 놈이란 말이야. 그 놈은 말하자면 외계인 같은 거라고.”
근거 따위는 없지만 김유성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용사의 심안은 일방적으로 정답을 엿본다. 그것은 너무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하기에, 근거를 찾아내 해답을 도출하는 지수의 해석 능력으로는 백날을 조사해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마왕의 이레귤러인 너는, 이레귤러로서도 규격 외라는 거지. 너 같은 변수가 대전쟁 때 있어야 했는데.”
하긴 마왕 자체가 대전쟁이 종반에 접어들 때 나타난 놈이니 어쩔 수가 없나, 하고 김유성이 한숨을 내뱉었다.
지수가 의아한 것은 그것이었다. 김유성은 너무나 지나치게 멀쩡했다. 광기에 휩싸여있기는커녕 오히려 여유마저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세계. 김유성은 아마도 수십 년을 이곳에서 혼자 지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지조차 못하고, 의식만이 각성한 상태로 이야기할 상대도 없이 혼자서.
‘읽을 책들이라도 널려있으면 또 몰라.’
정신이 붕괴하기엔 충분할 수준이었다. 지수가 나타난 순간 드디어 이야기 상대가 나타났다며 환희의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정도였다. 적어도 이렇게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수가 판단하는 한 김유성은 지금 일부러 강한 척을 하거나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수의 의문에 김유성이 간단하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용사 능력 중에 여신의 가호라는 게 있어서. 어떤 종류의 정신간섭도 받지 않고, 언제나 최적의 상태로 사고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이제 와서는 가증스럽기만 하지만.”
또 치트키스러운 능력의 등장이었다. 정신계 공격을 주축으로 하는 적은 저 능력 하나만으로 그냥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김유성 혼자 모든 걸 다 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김유성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지수가 용사에게 물었다.
“가증스럽다고요?”
“그래. 내가 각성한 게 여신의 계시란 걸 받고 그런 건데 말이야. 내가 뭐 신을 믿거나 그런 건 아니어도, 뭔가 여러 가지 도움이 되길래 마음 한편으로는 의지하고 있었지. 여차할 때는 여신이 있으니까, 하고.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엄청난 뒤통수를 맞아버렸단 말이야.”
김유성이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는 듯 증오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계의 침식으로 나타난 각성자들. 대전쟁 시절, 그런 초창기의 각성자들이 재빨리 힘에 적응하고 사용법을 익힐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식을 용사에게 알게 모르게 가르쳐준 여신이라는 존재.
그 덕분에 김유성은 육영웅을 이끌고 대전쟁에서 수많은 마물들을 토벌할 수 있었지만, 심안을 각성한 순간 알아차려버린 그 여신의 정체는 바로.
눈을 감았다 뜬 김유성이 지수를 바라보고 말했다.
“나는 아마 여왕의 이레귤러다.”
까마득한 소년 시절의 이야기다. 괴물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영웅이 되고 싶어서,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괴물을 동경했다. 각성자라는 개념이 나타나기도 전, 이계의 침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괴물을 향한 동경이 방아쇠가 되어, 김유성은 염원하던 영웅의 힘을 각성했다. 그것이 훗날 육영웅을 이끌게 되는 용사의 근원이었다.
“영웅은 개뿔이. 결국 여왕 좋은 일만 다 시켜주면서 이용당한 것뿐이야. 그런 엿을 먹고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아무튼 손도 발도 꼼짝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할 수 있는 건 생각밖에 없다고.”
“뭘 생각했다는 건데요.”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뺑이치고 있다 생각하는데? 이 꼴이 되어서까지 추하게 시간을 끌고 있는데, 설마 그냥 항복해서 체념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생각할 거리라고는 하나밖에 없지. 김유성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어떻게 해야 이 휴전 중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그런 이야기였다. 김유성이 적의에 가득찬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여왕이랑 맞짱 떠서 이길 수 있는 방법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