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당신이 선물해준 거니까 (6) >
영역의 결계를 뚫는 것은 간단했다. 한 번 쓱 쳐다봐 구조를 해석한 지수가 가볍게 파사의 마력을 흘려 넣자, 환상으로 이루어진 외벽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세 명의 마녀들이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 억지로 돌입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지수가 성큼성큼 안개로 덮인 영역 속을 걸어갔다.
한쪽 편에서 거대한 폭음이 뻥뻥 울려 퍼졌다. 소리를 따라 걸어가자, 아는 얼굴 둘이서 불꽃을 튀기며 싸우고 있었다. 지수가 손을 휘두르자 일순간에 불길이 멎었다. 격렬하게 부딪치던 오성화와 망량 두 사람이 멍하니 지수를 바라보았다.
“싸우지 말아요.”
지수는 한마디를 내뱉고서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또 싸우지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저쪽에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이번에는 김혜성과 이매가 서로 물고 물리기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수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현상해석. 지수가 두 사람의 궤도를 일시에 간파했다. 정확히 한 박자 뒤의 간격. 뛰어든 지수는 김혜성과 이매의 손목을 동시에 잡았다. 불의의 기습에 제압당한 두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랐다.
“싸우지 마세요.”
지수는 단지 김혜성과 이매의 손목을 잡고 멈췄을 뿐이었지만, 풀풀 흐르는 마력에는 또 헛짓거리를 했다간 말로는 안 끝난다는 위협이 담겨있었다. 중재하는 것도 참 일이었다. 두 사람을 놓아준 지수가 다시 영역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완전히 하는 짓이 마왕이랑 똑같군.’
자신답지 않은 행동에 생각이 복잡했다. 그리고 중심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피부가 떨릴 정도의 마력이 느껴져 왔다. 이쪽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터져나가는 불과 얼음, 바위의 폭풍. 인형사와 서민하는 둘이서 거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까 전의 두 싸움이 소꿉놀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전장에는 새빨간 기운에 휩싸인 별동별이 있었다. 서민하는 휘몰아치는 마법들을 피하고, 어떨 때는 손톱으로 잡아 찢으며 세 명의 마녀와 흑기사를 몰아쳤다. 그것에 대응하는 인형사 또한 대단했다. 거의 눈으로 쫓기도 힘든 속도였다.
‘적막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수가 느긋이 품평했다. 애초에 서민하는 주문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몸으로 싸우는 모양인 데다가, 흑기사가 적막을 발동하면 마녀들의 마법이 봉인당해 역효과가 되어버린다. 여러모로 상성이 안 맞는 조합이었다.
“자, 자. 거기까지.”
그리고 지수가 휙 손을 휘둘러 해주의 비술을 발동했다. 마녀와 흑기사에게 연결되어있던 인형사의 실이 전부 끊어졌다. 검은 갑주에 감싸인 거체가 쿵 바닥에 무릎 꿇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변에 인형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수의 얼굴을 본 인형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잊어버릴 리가 없다. 호텔에서의 싸움에서 만났던 바로 그 남자였다. 천적 중의 천적. 인형사의 방식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지수의 능력은, 그녀에게 있어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인형사와는 대조적으로, 지수와 서민하는 동네에서 길 가다 만난 것처럼 태연하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숨을 쉰 지수의 시선에 서민하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너는 또 왜 여기 있어?”
“부탁받아서. 여긴 지나가면 안 되는데.”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서민하가 길을 막아섰다. 설마 지수가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약속은 약속이었다. 이 통로를 누구도 지나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서민하의 일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지수는 옆에 쳐져 있는 결계의 벽을 허물었다.
이내 지수는 길을 빙 둘러 뚜벅뚜벅 통로 저편까지 걸어갔다. 너무나 간단한 동작이었기에 어떻게 제지할 새도 없었다. 통로 건너편으로 넘어간 지수가 서민하를 돌아보았다.
“이러면 됐지?”
지수의 말에 서민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반쯤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분명 서민하가 지키고 있는 길목을 지나가게 하지는 않았다. 지수가 새로 길을 만들어냈을 뿐. 서민하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자 지수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결해볼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누가 싸우려 들면 네가 나서서 말리고. 알았지?”
서민하가 기세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가는 지수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평소와 달리 묘하게 상쾌해 보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의 지수와는 근본적인 동기가 달랐다. 곤란에 처해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해서, 납득할 수 없는 악행을 막으려고,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어서. 언제나 지수는 바깥의 사정에 떠밀려서 행동했을 뿐이었다.
마음 한편에서 어쩔 수 없구만, 하고 불평하며 싸우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이 하고 싶으니까 한다. 아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건 싫으니까 막는다. 그것뿐인 이유지만, 순수하게 자신의 동기로 걸어가고 있었다.
영역의 중심에 허다인과 백묵이 보였다.
지수는 기척을 죽인 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고집불통인 백묵은 몰라도 허다인은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차분히 대화 해서 화해하도록 설득하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두 사람에게 가까이 간 순간 커다란 위화감을 눈치챘다.
기묘한 밧줄이 백묵의 팔다리를 구속하고 있었다. 그 밧줄을 다루고 있는 것은 허다인이었지만, 느껴지는 마력은 이질적이었다. 방금 본인에게 당하고 왔기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밧줄에 서려 있는 기운은 마왕의 것과 똑같았다.
심상치 않았다. 저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허다인의 한쪽 손에 들려있는 구슬은 봉인의 기둥이었다. 빛나는 구슬이 구속당한 백묵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다가간 지수가 휙 허다인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는 접근을 알아채지도 못한 듯했다. 허다인이 놀라서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묶여있던 백묵이 피식 웃었다.
“...늦었군, 용왕.”
까딱하면 허다인에게 마지막 일격을 당할 뻔했는데도, 백묵의 태도는 태연했다. 겁먹긴커녕 요만큼의 동요도 없었다. 온몸을 감싼 철갑의 강건한 방어력보다도, 저 배짱이야말로 백묵의 강점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 딱 맞췄구만 늦기는 무슨.”
“십 초만 늦었어도 상황 종료였다.”
백묵 또한 한마디도 지지 않고 질책했다.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봐주세요 좀. 이쪽은 긴급상황이라길래 겨우 잡은 마왕의 실마리도 내팽개치고 온 거거든요?”
이내 허다인이 손목을 잡고 있던 지수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가 나비로 흩어져 저편으로 거리를 벌렸다. 허다인의 태도는 낯설었다.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 있던 평소와는 달리 초조함에 감싸여있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야 모든 게 다 끝나갈 즈음에 가장 커다란 변수인 지수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당연했다.
다시 하회탈을 쓴 허다인이 지수를 바라보았다.
“…나를 막으러 온 거야?”
“네."
지수 또한 허다인을 바라보았다.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허다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사실 허다인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용왕과 마왕이 개입하지 않으리란 걸 전제로 두고서 이행한 계획이다. 지수가 멀쩡하게 이곳에 도착한 시점에서 이미 허다인에게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항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힘에 부친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런 문제였다. 입술을 깨문 허다인이 말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아. 너도 여기까지 왔다면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말로 해서 멈출 수 있는 지점은 한참 전에 지나갔어. 이건 전쟁이야. 죽은 사람도 나왔을지 몰라. 그걸 알고서도 불식을 공격했어… 내버려 두면 더 많이 죽을 테니까!”
“그런 사람 없어요.”
“뭐?”
“싸우는 거 다 말리고 왔거든요. 그래서 조금 늦었고.”
그리고 다시 싸움이 번지지 않도록 말도 해두었다. 그 말에 허다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주 작은 흔들림이었지만 확실히 포착했다. 허다인은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떨림은 이내 잦아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가면을 쓴 허다인이 말했다.
“...오해하는 것 같으니까 이참에 말해둘게.”
허다인의 몸이 공중에 뜨는 것과 함께, 주변에서 수십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나풀대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비 하나하나는 마력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극대의 주문으로 변화했다. 불시에 수백 개의 거대한 마력탄들이 하늘에 나타났다. 웬만한 마법사들이 본다면 이치에 어긋난다며 고래고래 이의를 제기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치를 무시하는 것이 허다인이었다. 지수라고 해도 상처 없이 막아낼 수는 없을 수준의 폭격. 허다인이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너를 제자라고 부른 건 쓸모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이용할 가치가 있어 보였으니까! 정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생각해본 적 따윈 한 번도 없어. 필요해서 잠깐 어울려줬을 뿐인데, 바보같이. 그런 말을 진짜로 믿고 있는 거야?”
“믿어요.”
지수가 즉답했다.
예전이라면 허다인의 말을 듣고 당연한 일이라 납득했을 것이다. 실망할 것도 뭣도 없다. 제자랍시고 아껴주기에 지수와 허다인의 인연은 너무나 얄팍했다. 누각의 식구도 아닐 뿐더러 지도는 환상 속에서 한 번 받은 것이 끝이었다. 오히려 그런 걸로 스승과 제자라고 부르는 게 멋쩍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달랐다. 이 사람한테는 그런 이치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 알았다. 제자라고 말했다면 정말로 제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지수의 눈동자에 허다인이 흔들렸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나한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그걸 방해한다면 너 하나 치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허세부리지 마세요.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아까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정말로…!”
허다인이 위협하며 소리쳤다. 마력탄들이 쿠릉대며 떨렸다. 마력의 기류가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이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지수가 슬쩍 묶여있는 백묵을 바라보았다. 그는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작게 턱짓했다.
지수가 피식 웃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현상해석. 지수의 황금색 눈동자는 허다인 곁에 떠있는 수많은 마력탄들의 궤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내렸다. 수십 갈래로 뻗어 나간 선들은, 전부가 지수가 서 있는 자리로부터 살짝 빗나가 있었다.
직격시킨다 해도 지수에게 치명타가 되진 못할 거라고 알고 있으면서, 그럼에도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다.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 여린 것도 이 정도면 병이었다. 지금쯤 하회탈 안이 얼마나 울상이 되어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고개를 살짝 숙인 지수가 고해하듯이 말했다.
“확실히 저는 의심도 많고, 사교성 제로에, 주변에 선을 긋고 사는 재수 없는 놈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성격은 배배 꼬여서 남한테 빚지는 건 기겁하고, 저쪽이 먼저 뭔가를 해주기 전엔 이쪽이 나설 이유도 없다 생각하는 못나빠진 인간이죠.”
그리고 지수가 코트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노란 괴황지에 경면주사액으로 그려져 있는 기묘한 문양. 그것은 허다인 또한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허다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행부…?”
다른 무엇도 아닌 오행부를 잘못 볼 리는 없었다. 위조의 가능성 따위 없었다. 허다인이 자신의 진기를 나누어 만든 생명의 부적. 그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고, 지금은 허다인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낸 뒤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을 터였다.
그런데 왜 그것이 지수의 손에 들려있는 것인가.
눈썹을 내린 지수가 은은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이런 걸 대뜸 받아놓고, 난 제자 같은 거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할 만큼 배은망덕하진 않아요.”
“너, 그걸 어디서.”
“선물받은 거예요. 봉인의 기둥 속, 과거의 스승님한테.”
스승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건 상당히 멋쩍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제자로 여겨주었으니까, 나도 당신을 스승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뿐인 이야기였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는가. 완전히 반칙이었다. 지수의 대답에 허다인이 휘청대며 고개를 떨구었다. 애써 짜낸 거짓말들이 전부,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고 들통나버렸지 않은가. 본심을 숨기기 위해 마음에 둘러쳐온 벽이 무너져내렸다.
공중에 떠 있는 마력탄들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내 허다인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미 전의를 잃고 있었다. 그녀 손에서 빠져나온 구슬이 데구르르 바닥에 굴렀다. 엎드린 허다인의 등이 들썩였다. 울고 있었다. 지수가 저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서로 싸우지들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고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숨기는 거 없이 다 터놓고. 이런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책이 나오기도 하니까….”
지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 싸움을 나서서 말리고 중재하다니, 정말로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위로하고 분위기를 북돋아줘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내 지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책을 본 지수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허다인이 들고 있던 장정본. 그것은 지수가 찾아 헤매던,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수기로 쓰인 책이었다.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인가 궁금했는데 설마 허다인의 손에 있을 줄이야. 지수가 재빨리 바닥에서 책을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 본문은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잘 살펴 보면 이중으로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암호문?’
지수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이전에 루드비히의 수기를 해석하려고 했을 때, 해석 스킬 자체가 해석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경고를 보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떨까. 지금의 지수라면 그 마왕과 비교해도 격으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책 하나 읽는데 무슨 일이 일어 날지 모른다고 쫄 필요는 없었다.
‘잘만 하면 마왕의 비밀을 캐낼 수 있다.’
그리고 지수가 수기의 내용을 해석하려고 든 순간,
책이 혼자서 불타기 시작했다. 해석하려는 것과 동시에 한 박자 먼저 사그라들고 있었다. 불길이 인 것은 정확히 지수가 읽어내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해석이 끝나는 것보다 빠르게 스스로 사라지고 있다. 마치 해석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미리 무언가의 술식을 짜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불타는 책에 감돌던 마력이 해방되었다.
마왕의 이질적인 기운이 공명했다. 백묵을 묶고 있던 밧줄이 허다인의 제어를 벗어났다. 뱀처럼 꿈틀대는 밧줄은 그대로 날아와 지수의 팔다리를 묶었다.
“뭐!”
구속되는 것과 동시에 지수의 모든 능력 또한 정지했다. 하지만 결국 마왕의 기술을 어쭙잖게 흉내 낸 것일 뿐이다. 지수라면 반쯤 억지로 풀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힘을 끌어올릴 때, 바닥에서 데구르르 굴러온 봉인의 기둥이 빛났다.
“어."
이건 정말로 조짐이 좋지 않았다.
“용왕!” “지수야!”
허다인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백묵이 벌떡 일어났다. 지수는 필사적으로 밧줄을 끊어내려 했지만 한 박자 늦었다. 구슬이 빛나며 지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설마 또 저기에 갇힌다고? 빛이 번쩍인 뒤, 지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
눈을 떠보니 새하얀 세계였다.
정신을 차렸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너무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안에선 허다인에게서 받은 오행부가 불타 잿가루가 되어있었다. 지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이 부적은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주인을 대신해서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었나.
지수가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위기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는데, 이곳이 봉인의 기둥 안이라면 이전과 같은 요령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아그리올라보다 더한 괴물이 있지는 않을 테고.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한 남자가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냐, 너는?”
가시가 돋혀있는 목소리였다. 지수가 고개를 올려들었다. 남자의 몸엔 수많은 검들이 박혀있었다. 그는 찌르고 지나간 검들은 말뚝이 되어, 남자의 몸을 새하얀 세계의 벽에 매어두고 있었다. 위협적인 삼백안. 새파란 눈동자.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는 황금색의 머리카락.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김유성?”
“뭔데 친한 척이야. 너 나 알아?”
지수의 말에, 수십 자루의 검에 꼬치가 된 용사가 입가를 이죽였다.